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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을 찾으라!

골로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5 추천 수 0 2020.10.11 23: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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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골3: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18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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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https://youtu.be/eOlfOvfmQVg 

성경본문 :골로새서 3:1-4 

“위의 것을 찾으라!”

부활 주일, 2020년 4월12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당신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뭔데?”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뭘까, 하고 자문해보신 적은 있을 겁니다. 대답은 다양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장 압축적인 대답을 알고 싶은 분은 오늘 설교 본문인 골 3:1-4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텍스트는 기독교 신앙의 압축 파일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그 파일을 풀어보겠습니다.

 

위의 것

오늘 설교 제목인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문장은 골 3:1절에 나온 것입니다. 제가 그 구절을 다시 읽어볼 테니,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를 살피면서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은 일단 우주 공간의 하늘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립니다. 죽으면 가게 될 천당으로 여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곳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롬 8:34절에도 나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주일 공동예배에서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하나님 우편을 우주 공간의 하늘이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하늘 어디에도 그런 공간은 없습니다. 우주는 비어있고, 우리가 다 일지 못하는 흑암 에너지와 흑암 물질만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위’는 어딜까요?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일상의 ‘깊이’를 가리킵니다. 그 깊이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늘이기도 합니다. 이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서 소개할까 합니다. 영국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이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톰 라이트의 글입니다. 그가 마커스 보그와 함께 집필한 『예수의 의미』 306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우리가 한때 땅에서 도망쳤던 하늘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몇 문장을 약간 고쳐서 직접 인용하겠습니다. “성서에서 하늘은 우리가 사는 우주 안의 어떤 장소(말하자면 몇 마일 상공의 어떤 장소)도 아니며 우리의 시간 속의 종착지(말하자면 최후의 사태)도 아니다. 하늘은 매일의 일상적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차원(God’s dimension of day-to-day reality)이다.”


이런 설명을 이상하다고 느끼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눅 24:50절 이하에 보면 부활의 예수가 분명히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으며, 행 1:6절 이하에서도 예수는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도 예수의 승천을 전합니다. 성경의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종교적 은유로 읽어야 합니다. 하늘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더 참되고 궁극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위의 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깊이입니다. 세상을 ‘신비’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사람은 그 깊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은폐성


그렇다면 일상의 깊이가 뭘까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일상의 표면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깊이입니다. 사물에도 표면과 깊이가 있습니다. 여기 해바라기 씨가 있다고 합시다. 겉으로는 아주 작고 투박한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걸 심으면 거기에 정말 새로운 세계가, 그야말로 신천지가 열립니다. 그 신천지는 씨앗 안에 숨어 있다가 어떤 순간이 오면 밖으로 드러납니다. 숨어 있는 그 세계가 바로 씨앗의 깊이이고, 성경이 말하는 하늘입니다. 이런 것은 너무 시시하게 생각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뭐가 시시하지 않은 이야기인가요?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장 궁극적인 현실(reality)로 다가옵니까? 좀더 실감 나는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년 전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를 비교해보십시오.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보십시오. 코로나19 사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현상이 1년 전에는 숨어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작은 사물과 지구와 우주와 인간의 모든 역사에는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 깊이는 은폐되었기에 볼 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춰있다고 말합니다. 들어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는 말은 해바라기 씨앗 안에 해바라기 꽃이 감춰져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은 씨앗을 단순히 씨앗으로만 다루지 않고 그 안의 해바라기 꽃을 상상하고 기다리듯이 하나님 안에 감춰진 우리의 생명을 찾고 기다립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씨앗의 겉모양만 보고 지나치는 사람과 그 씨앗의 미래인 꽃을 마음에 담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현실적인 삶을 사는 걸까요?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사는 일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과 변화될 미래의 생명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현실적인 삶을 사는 걸까요?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춰졌다는 말이 손에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한 가지는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절실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어렴풋이 생각하면 생명이 감춰졌다는 말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죽는다는 말은 아무리 분명해도 거리가 멀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매일 죽습니다. 우리의 기억도 매일 희미해지고 사라집니다. 이게 다 죽는 과정입니다. 살아있다고 하나 죽음이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게 분명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다시 산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우리의 몸이 다시 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씨앗에서 나온 꽃이 씨앗과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의 생명으로 변화되었듯이 우리도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은 이미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미래가 그에게 이미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갓난아기를 키워보신 분들이 계시지요? 아직 오지 않은 그 아기의 미래를 마음에 두는 엄마와 아빠에게 아기는 이미 훌륭한 인격체로 경험됩니다. 그 아기의 미래가 그들에게 이미 현실이 된 것입니다. 예수 잉태를 천사에게서 전달받은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영적 통찰력과 믿음 없이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근원이자 토대입니다. 신약 성경은 오직 이 한 가지 사실을 증언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셋째말씀’인 마 28:1-10절도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한 금요일과 안식일인 토요일이 지났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그러니까 오늘의 일요일 이른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가 묻힌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로 갔습니다. 여자들이 들여다본 무덤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천사가 이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만이 바울의 편지에도 자주 나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이 실감 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얄팍한 합리적 사유에 근거하여 “믿기 힘듭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물론 사람이 다시 산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시 산다는 성경의 표현은 지금의 삶으로 소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면 부활을 오해하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 부활의 실체가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합니다. 그 부활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춰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처럼 씨앗은 분명히 썩고 말기에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꽃이라는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와 더불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 변화된 생명의 미래가 골로새서가 말하는 ‘위의 것’이며,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입니다.


이런 설교 내용이 까다롭게 들려서 믿기 힘들다면 최소한 다음의 한 가지 사실만은 믿어야 하며, 믿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경험했던 생명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처럼 사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위대한 예술가처럼 살고 싶을 겁니다. 부자가 되거나 많은 후손을 두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까요? 각자 인생의 방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처럼 사는 건 어떻습니까? 선택하고 싶지 않으세요? 예수의 하나님 경험을 여러분은 원하지 않으세요? 이게 가장 의미 충만한 삶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알 겁니다. 저의 평생소원 역시 예수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부활이라는 성경 언어가 가리키는 하나님 안에 감춰진, 즉 일상의 깊이인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찾으라!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는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일상의 깊이에 은폐된 생명을 세밀하게 찾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의 보물찾기처럼 위의 것을 찾아서 그게 눈에 들어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예수는 이런 찾음의 영성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7:7절이 가장 유명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며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눅 15:8절 이하에는 한 드라크마를 잃은 여자가 등불을 켜고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 13:44절에는 밭에 묻힌 보물을 찾은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찾은 이들에게 한결같이 나타나는 현상은 기쁨입니다.

위의 것을 찾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골 3:2절은 좀더 풀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런 표현은 자칫 위의 것과 땅의 것을 분리하는 듯이 들립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를 드리는 데만 신경을 쓰고,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입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철학은 당시의 골로새 지역에 팽배했습니다. 육체에 속한 일은 저열하니까 가능한 한 멀리하려는 경향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죽어서 소멸하고, 원소로 해체될 것이며, 공기의 일종인 불이 되어 공중으로 상승하게 되고, 더 상승하면 순수한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유대교의 창조론을 이어받는 기독교 신앙에는 이런 순수 이데아를 위한 자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의 육체에 연관된 것들을 부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땅의 세속적인 원리에 떨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연 상태로 있으면 늘 땅의 것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거를 걱정하고, 그것을 독점하려고 과도한 경쟁에 떨어집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떨어집니다. 이런 세속 원리에 충실하면 위의 것, 즉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이런 대목에서 어려움은 여전히 땅의 것에 묶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실존입니다. 위의 것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하나님 안에 은폐되어 있을 뿐입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비유로 말씀드린 씨앗의 상태입니다. 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아프고, 외롭고, 때로는 짜증이 납니다. 삶이 무료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합니다. 땅의 것이 두렵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고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는 한 이런 긴장과 갈등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기독교인으로서 최선인가요?


골로새서도 우리에게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하지, 찾으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해결될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찾으라.”라는 말씀에서는 찾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평생에 걸쳐서 우리는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걸 단순화해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말씀과 운명을 통해서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진지하게 대하고, 땅에서 요구받는 것을 느슨하게 대하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할까요? 여기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학생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집중한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나타날 텐데, 위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교사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땅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여기 기업체를 운영하는 기업가가 있다고 합시다. 직원들과 더불어서 상생하는 것에서 기업가로서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라면 위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자기 기업을 키우는 데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이라면 땅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 위의 것을 찾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힘들어도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억지로 그렇게 살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만 실제로 삶이 풍성해질 수 있다는 거룩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듯이 친구가 많고 돈이 많고 온갖 즐거운 취미활동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의 영혼을 채우지 못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을 때 인간의 영혼은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거나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라는 말씀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코로나19 정국으로 훼손된 일상 가운데서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하신지요. 부활절 예배를 통해서 새 힘을 얻으셨는지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오늘의 일상에서 찾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마십시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며, 그 순간마다 놀라운 기쁨과 안식을 맛볼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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