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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21 추천 수 0 2019.06.04 2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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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2: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9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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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사순절 다섯째 주일,

2019년 4월7일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기자는 오늘 설교 본문 요 12:1-8절에서 보도된 사건이 유월절 엿새 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먼저 짚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요 11장에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으로 인해서 큰 위기를 맞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유대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가 회의를 열어 예수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요 11:53) 예수의 거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현상수배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인근의 베다니로 다시 가셨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린 마을입니다. 나사로의 집에 몇몇 지인들이 모였습니다. 나사로의 아래 누이인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머리에 그려질 겁니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고맙고 존경해마지 않는 선생님에게 밥 한 끼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나사로 세 남매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마리아의 향유


그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 남매의 막내인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앞서 오빠가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예수님이 속히 와서 고쳐줄 것을 기대했으나 예수님이 한발 늦게 오는 바람에 오빠가 숨을 거두자 섭섭한 마음인지 아니면 안타까운 마음인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리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겠나이다.”(요 11:32)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말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겁니다. ‘오빠가 이미 죽었지만 예수님이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거나 ‘이제라도 예수님이 오빠를 살려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난 마리아가 어떤 기분이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담백한 필치로 그녀의 행동만 묘사합니다. 요 12:3절입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서 언급된 향유는 마리아의 혼수품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액수는 노동자 평균 연봉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천만 원은 되겠지요.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그러자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습니다. 이런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게 아닙니다. 향유는 쏟아 붓는 게 아니라 몇 방울씩 뿌리는 겁니다. 그런 정도만 뿌려도 향유 냄새는 집안 가득히 퍼집니다. 마리아는 머리를 풀어서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이것도 예사롭지 않는 행위입니다. 먼 길을 오신 귀한 손님이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하면 충분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 발을 씻어줄 수 있겠지요. 일이 끝난 뒤에 마른 수건으로 물을 닦아주면 됩니다. 마리아는 지금 아주 특별한 퍼포먼스를 펼친 겁니다.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를 우리는 추정할 수 있을 뿐이지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그녀가 뭔가 한 마디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그녀는 끝까지 침묵을 지킵니다.


여러분은 마리아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요.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거나, 또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리아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거로 예상됩니까? 예수님은 오빠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뭔가 보답하고 싶긴 하지만 3천만 원짜리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긴다는 건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마리아였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저런 행동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거기 모였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속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늘 본문의 병행구인 마 26:6-13과 막 14:3-9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에는 나사로의 집이 아니라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것으로 나옵니다. 어떤 여자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화를 내면서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8,9)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을 가룟 유다라고 특정합니다. 유다는 예수를 잡아 줄 사람이라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다를 도둑놈처럼 묘사했습니다. 요한복음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유다에 대한 평가가 아주 나빴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발언이었든지 요한복음 가리키듯이 유다의 발언이었든지 그 발언은 가장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입장을 대변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


유다의 발언을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대다수는 지금 비슷하게 생각할 겁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광신자의 그것과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고 믿는 것까지는 좋지만 꼭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건 지나쳐 보입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평소 예수님의 뜻에 맞도록 비싼 향유를 바르게 사용했어야합니다. 영생의 길을 알려달라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9:21).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긴 했습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은 예수님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철부지같이 행동한 마리아를 따끔하게 책망할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마리아를 책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마리아의 행동 자체에 대한 것(7절)이고, 다른 하나는 가룟 유다의 주장에 대한 것(8절)입니다.

 

예수 장례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예수 당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을 다시 정확하게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는 말은 향유를 다 사용하지 말고 남겨두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마태복음의 보도는 좀 더 명확합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여자의 행동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낭비처럼 보이겠으나 마리아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고귀한 일을 한 겁니다.


합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은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예수 죽음의 영적인 의미를 다 알지는 못했겠으나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경험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암시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녀에게 예수님 외의 것들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을 알게 되면 다른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듭니다. 급기야 자신에 대한 관심도 축소됩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향유는 생명을 얻기 위한 수단입니다. 집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주식도 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려는 수단입니다. 만약 다른 것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여기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신약이 개발되었습니다. 너무 비싼 약입니다. 아파트 한 채 값입니다. 신약을 먹고 병이 낫는다는 것만 분명하다면 이 사람은 아파트를 팔지 않겠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이런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아파트를 팔아서 치료 경비를 대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니 향유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우리는 언젠가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향유를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할 순간을 맞습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향유이기도 합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든 향유를 버려야합니다. 삶과 죽음 문제를 미리 당겨서 생각했던 마리아에게 향유를 쏟는 일은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생명을 얻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세리모니였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머리로 손익을 계산하느라 마리아의 영성을 따라가지 못할 뿐입니다. 인류 역사는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진보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을 향유처럼 쏟아 부은 사람입니다. 예수의 거룩한 향기가 온 세계에 가득 퍼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와 예수는 같은 길을 간 게 아니겠습니다. 아니 마리아는 예수의 운명을 선취한 여자였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킨 마리아의 행위가 예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이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위도 전파되고 기억되어야한다고 진술합니다. 이 여자의 행위는 곧 예배의 한 구성 요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기억하고 거기서 발생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순전히 종교의식으로만 평가하면 곤란합니다. 실제 삶의 내용이고 그 깊이이고 그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예배가 실제 삶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가룟 유다의 반론이 여전히 가능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제는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귀한 것에 속합니다. 우리교회도 그런 쪽으로 재정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매월 재정보고에서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 교회 규모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구제비가 집행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이런 나눔의 삶에 참여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각자도생의 개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인간이 더불어서 인간답게 살아가야겠다는 휴머니즘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구제와 생명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필요가 없다거나 돕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가 항상 함께 한다는 말은 사실적인 겁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아무리 잘사는 나라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미국도 노숙자들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나거나 해결되는 게 아니라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밥을 먹는 것처럼,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걸 핑계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휴머니즘의 실천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대립되는 게 아닙니다. 차원이 다를 뿐입니다. 휴머니즘은 가장 고귀한 가치인 반면에 예수 신앙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가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에게서 가룟 유다의 생각과 같은 주장이 나옵니다. 교회가 이웃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자기들끼리 예배만 드려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그런 비판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겁니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구제는 원칙적으로 국가의 업무입니다. 요즘 용어로는 복지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는 국가로 하여금 복지정책을 과감하게 실천하도록 여론을 강력하게 견인해야합니다. 이게 가난한 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린 거 같은데, 남북이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평화 체제로 들어서면 국방비를 20% 줄이는 건 일도 아닙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도록 교회가 선지자의 역할을 잘해야 합니다. 교회가 구제에 나선다고 해도 그 돈이 몇 푼 되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함께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있지 않는다는 이 말씀이 가리키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제와 휴머니즘은 인간의 노력인 반면에 예수를 통한 생명은 하나님의 행위이나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은 아무리 큰 성과를 올려도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영혼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딘가에 묶이게 합니다. 이것이 인간 휴머니즘의 한계입니다. 예컨대 공산주의는 가장 극단적인 휴머니즘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이 자본주의적 노동시장에서 비참한 운명에 떨어지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공산주의를 제시했습니다. 능력만큼 노동하고 필요한 것만큼 가져간다는 구호를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정말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실패였습니다. 인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착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세웁니다. 자신이 도와준 것을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으면 감정이 상합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 구제 행위에서 그대로 실행되기는 전반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를 가장 예리하게 뚫어본 사람은 바울입니다. 사랑 장으로 불리는 고전 13장에서 바울은 인간 행위의 모든 것을 상대화합니다. 믿음과 예언과 지식까지 상대화합니다. 심지어 오늘의 주제인 구제마저 상대화합니다. 고전 13: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는 구제가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그것을 구별합니다. 사랑은 생명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서 무능력합니다. 성경 다른 구절에서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지만 우리에게 사랑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의 능력에 기대서, 즉 생명이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존해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문제는 예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처럼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특별한 경험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가룟 유다의 휴머니즘을 따라가는 게 최선입니다. 그 방식의 삶도 추천할만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면 세상에서 칭찬을 받을 것이며, 나름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며,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질 것입니다. 어느 쪽의 인생을 원하십니까? 향유를 부은 마리아, 아니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가룟 유다? 저에게 선택하라면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삶입니다. 예수님에게 가까이 갈 때에야, 즉 생명을 약속으로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사심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참된 의미에서 휴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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