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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97 추천 수 0 2019.06.04 2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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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0:22-3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99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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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부활절 넷째 주일,

2019년 5월12일

 

22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여러분은 예수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정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대답이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만 하는데, 세상 문제를 생각하면 답답하기 그지없을 정도로 예수님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비해서 먹고 살기는 훨씬 좋아졌는데도 사람들은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도 평화와 안식이 더 확장되었다고 보기가 힘듭니다. 지금보다 열배나 더 잘살게 되어도 싸우는 사람들은 여전히 싸우고 폭력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불행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할 겁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구원자인 근거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자기 인식


이런 질문은 예수님 당시부터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0:22-30절에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의 솔로몬 행각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잠시 그곳에서 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언젠가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와서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구원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갈망한다는 말은 현재의 삶에 만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에는 정의와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했고, 그 사실을 절망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한 뒤로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기를 더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자칭 그리스도라는 인물들도 나타났습니다. 군중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가서 로마를 물리치기 위한 무력 혁명을 준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을 확인하려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당신의 정체를 당신 입으로 밝히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 소문에 대해서 질문하자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소문이 나돈다고 대답했습니다(마 16:14). 이런 궁금증은 세례 요한에게도 중요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렇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질문과 똑같은 질문입니다. 예수가 과연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교주인가 하는 문제가 당시에 뜨거운 감자였다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받고 어떤 대답을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다.’ 이렇게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마 11:4)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어서 시각장애인들이 보게 되고 걷지 못하던 사람들이 걷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삶의 나락에 떨어졌던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서 건짐을 받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비슷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거늘 ...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자신이 누군지를 가리키는 증거라고 대답하신 겁니다. 이런 표현은 요한복음에 자주 나옵니다. 요 5:36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 증언하는 것이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요 10:38절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런 고백은 바로 예수님의 자기 인식이기도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 즉 메시아인지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 불안한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불안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종종 드러납니다. 공생애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그것이 두드러집니다. 첫 장면은 마귀에게 받은 세 가지 시험이고, 마지막 장면은 십자가에서의 외침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말아야 하고, 메시야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상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주변의 평가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을 내세웠습니다.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지만 내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은 믿어야 할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일은 물론 인간 구원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


예수가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결국 예수를 통한 구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것이고, 못하는 사람은 거부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거부했습니다. 단순히 거부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몰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했어야만 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어야 합니다. 가장 종교적이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신앙관이 잘못된 것입니다. 집의 기초가 부실하면 집이 무너지는 것처럼 신앙의 토대가 잘못되면 결국 결과도 잘못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고수하면 신앙이 왜곡되고 위축되는 거와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은 한 마디로 승리주의입니다. 그들은 메시야, 즉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로마 제국과 같은 악한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가 세계 중심 민족이 되는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파라오를 물리친 모세나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행하고 승천한 것으로 알려진 엘리야 같은 인물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이 남은 돈으로 복권을 사고 1등 당첨을 기다리는 거와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관에 따르면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칼 마르크스나 레닌, 모택동,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세계적 부자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나 이건희 같은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능력을 행사한 인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은 한창 잘 나갈 때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옹립하려하자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겁니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대라고, 친구만이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일일이 문자적으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의 운명도 그대로 따를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모두 십자가로 죽을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만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만 대면해서 살았던 분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잘잘못을 일일이 따져서 상을 주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너무 높고 존엄한 분이기에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지만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너무 가까운 분이기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승리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할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건강할 때만이 아니라 병들었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의만 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하는 염려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고, 하늘의 아버지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를 담보한 자만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똑같은 메시아 관으로 삽니다. 쉬운 말로 잘 먹고 잘 사는 걸 구원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걸 무조건 탓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적적인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의 삶이 보호받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런 어려움이 해결되어도 다시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일단 긴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구호를 받아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이미 충분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추었는데도 더 많은 것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에 묶여 있는 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아도 나름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열정적으로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겁니다.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도 가능한 편하고 즐겁게,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면서 살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분들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진정성이 있었으나 결국은 자신들의 고정된 구원관에 묶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이런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대충 알면 되고 세상에서는 똑똑하게 사는 건 잘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영생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한 이유는 그들의 메시야관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본문이 아주 특별한 용어를 통해서 말합니다. ‘내 양’이 그것입니다. 26,2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양’이라는 표현은 자칫 편애처럼 들립니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우에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예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경험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걸 느끼는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인식하고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로 들어간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마치 텃밭과 사랑에 빠진 사람, 또는 그림이나 노래 같은 예술과 사랑에 빠진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런 특별한 관계를 가리켜서 ‘내 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내 양’이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핵심은 영생입니다. 본문 28절에서 예수님은 ‘내 양’들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술가와 시인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이 주어지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경험됩니다. 예수님과의 특별한 관계 자체가 이미 영생입니다. 영생은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생은 생명이 무한정 늘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수렴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 미혼모가 있다고 합시다.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입양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이와 입양할 사람의 관계는 이전에 남이었다가 이제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영생은 유일하게 영원한 존재인, 그래서 알파와 오메가로 불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가리킵니다. 그런 일치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는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만 의존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의 영생 경험은 종교적인 독단이나 자기도취나 자기합리화가 아닙니다. 생명의 능력에, 구원의 광휘에 휩싸이는 겁니다. 아무리 건강이 나빠져도 숨은 쉴 수 있고, 아무리 가난해져도 걸을 수는 있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 점수를 받으려고 전전긍긍했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우나 정말 실질적인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약속하신 영생입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즐겁게, 그리고 단단한 마음으로 제자들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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