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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4 추천 수 0 2019.10.05 19: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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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14-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0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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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8:14-17, 성령강림절, 2019년 6월9일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인생이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꾸로 흐트러지는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거는 생각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걸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한 조건들도 여기서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어떤 조건을 손에 넣으면 인생 성공이라는 주장은 좋게 봐서 선의의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 가운데서도 매 순간 참된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일희일비하면서 삽니다. 비교적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완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간 실존입니다.


이런 실존에서 최선의 삶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제가 개인적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최선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미 눈치챘을 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사람을 가리켜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롬 8: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바울의 이 진술은 폭탄 발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데, 바울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놀랍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17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속받을 하나님의 유산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생은 완성됩니다. 그 생명을 상속받을 자격이 주어지기에 하나님의 아들은 이미 삶의 완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대기업 총수의 아들은 자기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대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남성으로서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딸이라고 해도 됩니다. 17절에서는 중립적인 단어인 ‘자녀’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는지 아닌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령 공동체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맞은 첫 번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경험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사도행전 2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실감하기가 어렵다고 여기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숨을 쉬면서도 공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영과 바람과 호흡을 같다 보고, 그것을 루아흐라는 단어로 불렀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능력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자궁에서 나오면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하고, 죽을 때는 숨이 그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의 영


바울은 15절에서 영을 두 가지로 구별했습니다. 하나는 종의 영이고, 다른 하나는 양자의 영입니다. 종의 영을 받느냐, 아니면 양자의 영을 받느냐에 따라서 삶이, 즉 인생이 달라진다고 보았습니다. 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우리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바울의 이 말을 부정하지는 않을 겁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종의 영은 무서움을 특징으로 합니다. 종은 주인의 눈치를 봅니다. 주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노심초사합니다. 수능시험을 앞둔 학생이 점수가 낮게 나올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종의 영은 인생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안식과 평화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삶에 매달리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다른 단어인 사탄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들도 가끔 그런 말을 자녀에게 합니다. 현장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한 뉴스를 접하면서 자녀들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런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그러니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해.’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지만 종의 영을 추종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반복해서 듣고 자라는 아이는 인생을 무서워할 겁니다.


저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오늘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을 지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사회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증오와 혐오가 그 증거입니다. 반세기 전의 언어인 빨갱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고 선동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 이끌림을 받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발언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지금 가난을 무서워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만이 아니라 가난을 벗어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무서워하는 사회 분위기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조선일보는 얼마 전에 북한의 김정은이 지난 하노이 회담 실패의 책임을 물어 한 사람은 처형, 다른 한 사람은 강제노역, 또 한 사람은 근신에 처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 신문은 김정은을 공포의 인물로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그 보도는 대체로 오보로 판명이 났습니다. 저는 김정은을 좋아하지 않지만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북한체제를 좋아하지 않지만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조선일보는 왜 대한민국 국민을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사로잡히게 하는 걸까요? 그게 그들에게 장사가 되는 길이라는 답 말고는 다른 답을 찾기 힘듭니다.


기독교 신앙을 종의 영의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단적으로 구더기와 유황불로 표상되는 지옥에 대한 공포를 조장합니다. 이슬람교 포비아도 한국교회에 만연해있습니다. 심지어는 십일조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십일조를 빼먹었다가 집안에 큰 사고가 일어나서 더 많은 돈이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돕니다. ‘개콘’에 나올 만한 소재인데도 일부 사람들에게 먹힙니다. 그렇게 행패를 부리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는 게 여러분의 정신 건강에 더 좋습니다. 헌금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다는 기쁨과 교회 공동체에 속한 도반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거룩한 연대감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두려움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세련된 방식의 율법 신앙도 기본적으로는 종의 영에서 나온 겁니다. 주로 청교도 신앙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신앙에 노출되면 자책감의 노예가 됩니다. 뻔뻔한 것보다는 낫지만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양자의 영


바울은 로마 기독교인들이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제 인생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장 가깝게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릴 때 사용한 호칭입니다(막 14:6). 그냥 부르는 게 아니라 부르짖는 겁니다. 부르짖는다고 번역된 헬라어 ‘크라제인’은 환호성을 지른다는 뜻입니다. 종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가능합니다.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환호성을 외치듯이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환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고아였다가 친부모를 찾게 되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더구나 친부모가 전국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환호성을 올릴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인생을 환호성을 치듯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종의 영을 받아서 무서워합니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 제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이 여기서 가장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의 삶을 책임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저의 삶을 책임지는지는 제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혹 불안하기도 합니다. 폭풍우 속을 아버지와 함께 걸어가는 아이의 심정과 비슷합니다. 한편으로는 불안해도 근본에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확실하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단계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이런 신앙은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혼란스럽게 보이는 일마저 하나님 생명의 힘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테니스를 쳤습니다. 테니스는 제가 종종 한 이야기입니다. 군목으로 입대할 때부터 시작했으니까 대략 40년이 됩니다. 가장 좋아하는 취미생활입니다. 더 늙거나 몸을 다쳐서 앞으로 테니스를 전혀 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테니스가 아니면 대신 걸을 수는 있고, 걷지 못하면 휠체어는 탈 수 있으니까요.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할 상황이 오더라도 책을 읽거나 기도를 드리고, 커피와 차를 마실 수 있으니 내가 생존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테니스를 즐기는 것에 비해서 차를 마시는 것이 내가 생명을 경험하는 데에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을병에 걸리거나 심한 장애를 입어도 괜찮다는 말이냐, 하고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신가요? 그런 상황마저 제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런 상황이 닥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저와 함께하실 것이니 미리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면서 환호성을 올리는 것이라고 믿기에 저는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광과 고난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인생살이가 일시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신경 거슬리는 때도 있고, 짜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하는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환호한다는 이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에 가서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 종말이 이르러야 우리는 하나님을 실제로 아빠 아버지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얼굴을 얼굴로 대면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불분명합니다. 종말이 되면 우리는 모든 죄와 죽음의 힘으로부터 실질적으로 해방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시련과 어려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려움은 장애나 질병이나 가난만이 아니라 행복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한 인간 실존 전체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기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상속자에 대한 설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는 표현을 덧붙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영광과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듯이 우리도 영광을 받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과 고난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삶에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외면받습니다. 그의 고난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강조하지 우리도 고난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모른 척합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외면하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함께 받아야 한다는 말은 고난을 미화하는 게 아닙니다. 삶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고난이 없을 수 없는 이 현실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한 부류인 영지주의는 고난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문제를 없는 것으로, 비(非)실재로 간주했습니다. 세상은 모두 악하고 썩을 것이기에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악하고 영만 거룩하기에 육체에 속한 것들을 포기하고 영혼 구원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영지주의 신앙은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교회라는 성채에 갇혀서 사회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예배에만 관심을 둡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나치 시대의 독일교회가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의 한국교회가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역사에 하나님 나라와 정의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현실 속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불의한 역사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일상 자체가 사실은 고난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돈벌이를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은 많은 걸 고민해야 하고 때에 따라서 불이익도 겪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보십시오. 우리에게는 강력한 식욕이 있습니다. 먹지 않고는 생존하지 못하기에 식욕은 우리의 본능에 자리합니다. 다른 동물까지 잡아먹습니다. 채식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완전한 채식은 불가능합니다. 채식에도 균이 들어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일용할 양식도 배려해야 합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우리는 어울려서 살아야 합니다.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과도 역시 함께 살아야 합니다. 일상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인지를 늘 초심으로 돌아가서 성찰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다 고난입니다. 양자의 영을 통해서 인생을 환호하듯이 살아가도록 이끌림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인생의 숙제입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크고 작은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광의 빛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아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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