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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요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7 추천 수 0 2020.01.08 23: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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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욜2:23-3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08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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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창조절 아홉째 주일, 2019년 10월27일

 

23.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7.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8.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크고 두려운 날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은 구약 <요엘>입니다. 요엘은 이 글을 쓴 선지자의 이름입니다. 길이가 세 장에 불과한 <요엘>은 다른 선지자들의 글과 비교하면 환상적이라고 부를 만큼 특이합니다. 요엘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1:15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 ”, 2:1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 ”, 2:11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3:14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이런 구절을 읽으면 뭔가 엄중한 사태가 일어날 것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욜 2:31절에도 나옵니다. 이 구절은 다른 구절에 비해서 그 표현이 훨씬 더 강렬합니다. 이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

 

요엘은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날이 크고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해와 달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합니다. 공포를 자아낼만합니다. 이런 자연의 이상 징조 이야기는 30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우주의 변형과 파멸에 대한 묘사는 묵시문학의 특징입니다. 이런 문학적인 텍스트는 신약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계 13:1절에는 바다에서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인 짐승이 나온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계 9:2절에는 지옥이라 할 무저갱의 구멍에서 연기가 올라와서 해와 공기가 어두워진다는 표현도 나옵니다.


요엘이 현대 우주 물리학을 알지 못했지만, 세상과 우주의 근본을 뚫어보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발언이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리곤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졌던 해와 달이 능력을 잃는다는 말은 우리가 보는 우주가 시작된 때가 있었듯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주는 138억 년 전에 빅뱅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축소되어서 하나의 점으로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그 우주 안에 있는 태양을 비롯한 모든 별은 사람처럼 태어나서 활동하다가 때가 되면 죽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전통인 창조론에 근거해서 해와 달의 운명을 거론한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도 틀린 게 아닙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거나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할 것이라는 요엘의 외침은 일상에 파묻혀 사는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외침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우리의 삶과는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교회에 왔을 때나 그렇구나, 하고 조금 느낄 뿐이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완전히 상관없이 우리는 삽니다. 여러분은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하나님을 주제로 하는 경우가 있는지요. 부부 사이에도 하나님은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이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문제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만은 조금이나마 옆에서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 설교할 때마다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실재(reality)로 설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쏟는 중입니다.


낯선 경험


31절이 말하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한다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크고 두려운 날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그날이 크고 두려운 이유는 만물이 질적으로 변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설교 중에 저는 외계인에 관해서 한마디 했습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합시다. 눈이 우리처럼 양쪽에 달리지 않고 앞뒤로 달렸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눈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다리는 문어처럼 여럿입니다. 입이 없고, 텔레파시로 대화합니다. 어쩌면 외계인은 거미나 잠자리처럼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외계인을 우리가 갑자기 만나면 당연히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놀라고 두려워하겠지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지금 지구에는 달이 하나입니다. 갑자기 다섯 개의 달이 나타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어떤 달은 위성을 다섯 개나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런 행성이 우주 어딘가에 없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신라 시대 살던 조상이 환생하여, 혹은 시간 여행으로 오늘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에게 지금 서울의 모습은 크고 두려운 세상입니다. 조금 더 작은 예를, 아기자기한 예를 들어볼까요? 동화에서 읽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여기 친구처럼 지내던 해바라기 씨앗이 두 개 있습니다. 한 개는 땅에 심겼습니다. 서너 달 후에 2미터 크기의 해바라기로 자랐습니다. 해바라기가 아직 씨로 남아 있는 친구를 불렀습니다. 씨는 해바라기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현상 못지않게 이상한 일이 지금도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궁극적으로는 언젠가 우리가 보는 우주는 다 붕괴합니다. 태양도 40억 년 후에 붉은 거성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우주의 크고 두려운 변화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으나 한 인간의 인생에서 그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뭔지는 이미 여러분이 눈치챘을 겁니다. 한 개인은 죽음을 통해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걸 경험합니다. 한 개인의 죽음은 우주의 붕괴입니다. 그 순간이 여러분에게 닥치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합니다. 놀라지 않으려면 그 미래를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최선입니다.


요즘 제가 설교 중에서 죽음을 너무 자주 말해서 불편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목사라면 죽음보다는 재미있는 삶을 더 자주 말하겠지요. 늙은 목사라서 저러는구나, 하고 이해해주시리라 기대합니다. 사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삶과 죽음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설교 시간에 죽음을 자주 말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주와 인류의 종말, 그리고 개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본래 삶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우주의 붕괴를 묘사하는 듯한 요엘의 말씀도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세상을 조금 쓸만하게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태양이 어두워질 정도로 완전히 질적으로 새롭게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모든 삶과 세계관과 인생살이가 총체적으로, 아주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뒤바뀌는 데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심판을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막 10:31). 우리가 고상하다고 여겼던 삶이 초라해질 수 있고, 초라하다고 여겼던 삶이 가장 고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했거나 부끄러워했던 모든 것이 완전하게 변형될 그 순간을 기대하십시오. 저도 그 순간을 기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요엘이 32절에서 선포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생명의 소리가 들릴 겁니다. 이 말씀을 저는 저를 구원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과감하게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사람에게 위기의 순간입니다. 세 가지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주가 대변혁을 겪는 때이고, 둘째는 세상을 완전히 다르게 보는 영적 시각이 열리는 순간이고, 셋째는 개인적으로 죽는 순간입니다. 세 번째의 경우로 생각해봅시다. 대다수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헛소리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유언은 가족에게 ‘나 먼저 가니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라고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말이 좋다고 하니, 또는 가족을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니 그런 말을 무심결에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말만 하더라도 다행입니다. 나쁜 경우는 남을 원망하는 유언입니다. 무협 소설이나 영화에는 ‘내 원수를 갚아다오.’라는 유언이 종종 나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마지막 말을 남기지는 않더라도 뭔가 한이 맺힌 상태로, 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죽는 일은 많습니다. 저는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의 이름을 실제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게 잘 안 되면 주기도문이 제 입에서 나오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며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순간에, 이는 오늘 요엘이 묘사한 장면과 비슷한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신 후 숨지셨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생명의 원천이신 여호와를 부르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재미있는 예를 들었습니다. 테니스를 잘하는 사람은 공과 자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몸에 익힙니다. 게임을 하다가 실수를 해도 그의 테니스 실력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테니스의 체질이 몸에 뱄기 때문입니다. 테니스 실력이 나쁜 사람은 어쩌다가 실수로 멋진 샷을 날려 점수를 얻었다고 해도 그게 별 의미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영적인 체력을 키우는 게 결정적인 순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이런 일은 수행과 같아서 세속에서 살아가는 일반 신자들에게는 좀 거리가 먼 이야기이긴 합니다. 그래도 준비된 사람이라면 상당한 수준에서 구도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농부 아내입니다. 정확하게는 남편이 소 농장을 운영합니다. 아내는 오전에 집안을 하고 오후에는 농장에 가서 남편과 함께 일하다가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저에게 하더군요. 농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수도원에서 지내는 느낌이라고 말입니다. 농장이 인가에서 떨어져 있어서 환경도 수도원 느낌이 들지만, 농장 소를 돌보면서 매 순간을 생명과 만나는 경험을 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여호와의 이름을 그 어떤 누구보다, 대학교수보다 더 가깝게 경험하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서로 높아지려고 벌이는 일들은 그의 삶에서 점점 더 작아지고 여호와의 이름에 연관된 일은 더 확장됩니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그런 느낌이 더 충만해질 겁니다.

 

구원을 얻으리라


요엘은 31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구원을 얻을 자는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이고,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구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구원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구원은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기에 아직 생명이 무엇인지 다 밝혀지지 않은 지금 구원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간접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서 배운 구원은 영원하고 참된 안식입니다. 안식은 쉼입니다. 영혼이 시달리지 않고 참된 평화를 얻는 삶이 바로 구원입니다. 요엘을 비롯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계속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대표적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에 시달렸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입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끊임없는 다툼이 이어집니다. 수시와 정시 비율 문제로 서로 입장이 갈립니다. 시행착오가 반복됩니다. 청소년들의 안식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처진 사람은 따라잡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앞선 사람은 더 치고 나아가려고 정신없이 달리게 만듭니다. 개인이나 사회가 뭔가를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정작 중요한 안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요즘 저는 십계명에 나오는 안식일 계명을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안식일 개념만 정확하게 이해하고 붙들어도 많은 부분에서 교회개혁과 세상 변혁이 일어날 겁니다. 안식일은 일상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노예와 나그네와 일용직 사람들도 안식일에는 무조건 쉬어야 합니다. 짐승도 쉬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을 기본으로 안식년 제도가 나왔고, 더 나아가서 희년 사상이 나왔습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생태계 전체의 안식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교회는 가난으로 인해서 노동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세상을 바꾸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간다운 노동과 정의로운 복지와 인간 존엄성과 생태 회복을 교회가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안식일을 성수 주일이라는 이름 아래서 주술적이고 율법적인 차원으로 격하시켰습니다.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고, 안식이 아니라 오히려 쫓김과 피로입니다. 피로 사회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피로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전 세계 개신교회가 특별한 날로 지키는 종교개혁 502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루터가 오늘 대한민국 교회에 나타난다면 뭐라 말할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변질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자기 의(義)를 붙들고, 은총이 아니라 인간 업적에 기울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루터가 제시한 믿음의 능력과 은총의 신비가 무엇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요. 그래서 결국 세상을 향해서 참된 안식을 외쳐야 할 교회 안에 아이러니하게도 영혼의 안식이 없는 게 아닐는지요. 스스로 안식을 모르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을 향해서 안식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영혼의 안식이 없으면 요엘이 말하는 구원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요엘 선지자의 강력한 메시지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오늘 여기서 실감하고 계십니까?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여호와의 이름을 영혼의 깊이에서 부르며 갈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호와의 날에 구원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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