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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얼레빗106. 대한민국임시정부 94돌을 맞아서
무겁도다 국민의 혼이여
굳세도다 국민의 혼이여
국민의 혼이 살아있으면 된다. 나라가 외세에 눌리면 산하는 유린될 수 있으나 그 국민의 혼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다. 국민의 혼이 어찌 무겁지 않으며 어찌 굳세지 않으랴. 자극을 받아 격동함이 심할수록 더욱 국민의 혼은 크나큰 힘으로 자라난다.”
위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이야기이다. 그 민족의 혼을 지키고자 빼앗긴 나라에서 혼신의 힘을 다한 사람들이 독립투사들이요, 독립투사들이 어엿한 독립정부를 꿈꾸며 만든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이다. 4월 11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들어 선지 올해로 94돌을 맞는 해이다.
지난해 필자는 상하이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유적지를 시작으로 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에 이르는 임시정부 피난길을 한 달여 동안 돌아 본 적이 있다. 이 답사 노정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거사 이후 5월 초부터 임시정부요원들과 일부 가족들이 상하이를 탈출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며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던 노정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조국의 광복을 찾기 위해 몸부림 쳤던 독립투사들의 투혼을 느꼈으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처절한 역사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특히 충칭에서 가까운 토교마을에 이르러서는 수당 정정화 여사의 “장강일기”가 떠올랐는데 화탄계 넘어 한인촌의 유적을 건너다 볼 때는 유달리 더 가슴이 저렸다.
“토교의 생활은 피난 다닐 때보다는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셈이었으나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쪼들리기는 마차가지였다. 그렇게 궁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대신 토교에 모인 우리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한 집안 식구들처럼 지냈다.” 정정화 여사는 토교 생활을 이렇게 그렸다. 없을수록 더욱 따스한 가족애, 이웃과 더불어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으려는 정신을 실천하면서 조국광복의 뜻을 포기하지 않은 선조들의 모습이 수채화처럼 눈에 선했다.
나라 잃고 망국노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중국, 일본 등지로 떠돌아다니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던 조상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다. 이런 감정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어제는 94년 전 중국땅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날이다. 공휴일도 아닌데 그게 대체 무슨 날이냐? 라고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의 여세를 몰아 4월 11일 중국땅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워 조국 광복을 찾는 날까지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헌신적인 삶은 대한민국이 지속하는 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독자 이한석 / 역사연구가, 신림동
편집자 설명 : 정부의 기념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이 4월 13일로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이날은 그저 세상에 공포한(알린) 날일 뿐 실제로 임시정부가 탄생한 날이 아닙니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현주소 瑞金2路)에 모인 각 지방 대표 29명은 밤새 논의한 끝에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했으며,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한 뒤 국무원을 꾸렸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일은 4월 13일이 아닌 11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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