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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여 인종을 전하자.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123 추천 수 0 2019.12.04 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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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9:6-38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창세기 槪觀)

 

17:19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라고 했고, 4: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는데, 이것을 표면적으로 보면 이삭을 말하는 것이고, 영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이룰구원 면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교회는 약속된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위의 말씀은 교회가 믿음의 자녀를 낳고 영적인 후손을 낳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말함인데, 이 말씀을 껍데기 위주로 생각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나온다는 말로만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근본이 틀어져 버린다.

 

간혹 100세가 된 노인이 아이를 낳기도 하는데 이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낳는 자녀가 약속의 자녀가 아니다. 약속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가 있다. 사라는 늙은 노인이라서 자녀를 못 낳는다. 이게 일반적 이치로 보는 거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100세이던 200세이던 언제고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신앙성이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예수 믿는 사람이 나이적으로는 아무리 늙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아브라함에게 이뤄진 것처럼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거다. 무슨 자녀냐? 영 위주, 영 기준으로 된 약속의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거다.

 

969살을 산 무두셀라를 인간의 생리적으로 보면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의 눈으로 보게 되면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다. 이게 무슨 말이냐? 우리의 신앙성은 육신적 사고방식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영적 신앙성은 육적인 것을 초월해 버린다. 육신을 초월한 영적 생명의 신앙의 자녀를 낳는 것을 말하는 거다. 생명적 신앙의 교훈으로 자라는 자녀가 참 자녀라는 거다.

 

영 주격, 영 기준으로라야 바른 신앙이 된다. 육 주격적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리 영적 영적이 말을 한다고 해도 바른 신앙이 되는 게 아니다. 육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이니, 축복이니말을 해도 영 주격, 영 근원의 신앙과는 관계가 없는 거다. 근원이 다르다.

부모의 신앙성이 영적이라면 이 부모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그 자녀로 통해서 이뤄질 수도 있는 거다. 왜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전제를 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이 돼야 한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는데, 육의 소원 목적을 가진 신앙의 부모가 자기 자녀의 육적인 소원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일꾼으로 써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게 자녀를 위한 것으로 아는 교인들이 많다. 이런 정신, 이런 기도가 계:의 심판에 회부된 자들과 같은 신앙정신인 줄을 모른 채 이런 기도를 하고 있다.

 

이삭이 약속을 따라 난 참 자녀라면 이스마엘은 약속을 따라 난 자녀가 아니라 율법을 따라 난 거짓 자녀인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스마엘을 지옥 갈 자로 보면 안 된다. 율법을 따라 났다는 것을 신앙적으로 보면 이스마엘은 껍데기라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되어지지 않는 모든 종교적 사역은 껍데기 일이요, 여기에는 생명의 역사가 없다는 거다. 지금도 이런 일을 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보면 껍데기 신앙인 이스마엘의 후손들과,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이 서로가 앙숙이다. 둘 다 껍데기들인데 껍데기들끼리 앙숙이다. 크게 보면 이들은 다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아브라함의 신앙성에는 들지 않는다. 예수님에게도 들지 않는다. 왜 그러냐? 껍데기로 보면 이들은 아브라함의 족보 속에 들어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족보는 껍데기이고 이 껍데기 속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건데 이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잡지 못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에 들지 않은 거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인들을 보고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져야 되겠거늘이라고 하신 거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생명의 예수 안에 드는 거다. 콩알이 콩 껍데기 안에 들어있는 것은 껍데기가 중요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콩알이 보호를 받고 충실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줄기로 올라오는 양분을 껍데기로 통해 콩알이 받아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콩알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껍데기에 붙어있어야 되는 거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이거다. 우리는 언제나 생명에 붙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걸 보는 거다. ‘모양새가 콩이다. 팥이다하는 게 중요할 때도 있지만 뭘 빨아먹느냐?’ 하는 그 생명을 보는 거다.

 

나무에 접을 붙이는 사람이 접을 붙이려고 하는 나무의 세포라든지 생장의 특성 등을 연구도 안 하고 아무 나무에나 접을 붙이면 되는 거냐? 가령 느티나무가 오래 산다고 해서 죽은 사람을 거기에 꽂아놓으면 죽은 사람이 사는 거냐? 같은 생명이 아니면 생명전달이 안 되는 거다.

 

본문.

 

196-38.

 

6-8: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롯이 폭도들에게 형제라고 했다. 그러니까 롯이 폭도인 이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 있다.

 

롯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목숨을 걸고 자기 집에 온 나그네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런 거냐? 롯은 소돔 고모라 성에 들어와서 이미 이들에게 짓밟혔다. 즉 이들이 주격으로 되어있다. 그러니 이들의 소유격으로 사는 롯이 자기의 주격인 이들에게 말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듣겠느냐? 이걸 교회로 보면 오늘날 교회 안이 깡패 투성이가 돼버렸다. 그래서 목사님이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들어먹는다. 목사의 권위가 무너졌다. 교회 인도자의 권위성은 진리요 생명인데, 오늘날 목사에게는 이게 없으니 교인들에게 먹힌 거다.

 

롯에게는 생명적 권위성이 없다. 그러니 이미 그들에게 먹힌 거다. 먹힌 상태로 나가서 말을 하니 누가 그 말을 듣겠느냐? 타락한 인간들은 롯을 용기가 대단한 것으로 보겠지만 신앙의 본질을 가지고 보면 네가 지금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이렇게 보이는 거다. 그러니 이런 롯으로 통해 자녀가 보호가 되겠느냐? 롯의 식구들이 보호가 되겠느냐? 롯의 집에 온 나그네가 보호가 되겠느냐? 롯이 자신부터 문제가 되어있는데 자기 식구들이나 나그네를 무슨 능력으로 보호하겠다는 거냐? 그러니 악한 무리들이 이런 롯의 말을 알아주고 순종할 리가 없다. 오히려 대들고 막 덤비는 거다. 이게 지금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속화된 교회를 말하는 거다.

 

이게 누구의 책임이냐? 여러분들이 판단을 할 때 소돔 고모라 백성들의 책임이냐, 롯의 책임이냐? 이걸 바로 판단해야 한다. 우리가 어느 교회에 가도 그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는 첫 번째로 목사님의 책임이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에 바로 서지 못한 목사는 자기를 고치려고 하는 것은 없고 자꾸 교회 밖의 남의 말만 한다. 도덕성이 그렇고, 소원 목적이 그렇고, 세상 탓을 한다. 이렇게 되면 자신부터가 하나님 앞에 죄 된 것은 발견이 안 되는 거고, 발견이 안 되니 고치지 못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는 건데, 교회가 이 말씀을 남에게 하는 말로 듣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을 향해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믿는 자기 속의 숨은 죄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방인들을 향해 예언을 하더냐,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언을 하더냐? 이걸 생각해 봐라. 간혹 이방인을 향해 예언한 것도 있긴 한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예언을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 이 말씀을 자기에게로 가지고 와서 자기 속에 들어있는 범죄성을 깨닫고 회개를 해야 한다.

 

9: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이게 남의 일 같으나 이걸 교회로 가져와서 보면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깡패 같은 기질을 가진 교인들이 판을 치는 교회에 의인이 하나 들어오면 악한 교인들은 이 사람이 자꾸 눈에 거슬러서 못 살게 굴고 해를 입힌다.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 말은 악한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 롯은 빠지라는 거다. 교회적으로 말하면 악한 자신들이 교인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겠다는 거다. ‘롯 너는 물러나라. 저리 비켜라. 우리가 다 하겠다이 말이다. 롯은 이들에게 완전히 신용불량이다. 롯은 지금 이 수준밖에 안 되는 거다.

 

또 가로되 이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롯은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소돔 고모라 사람들에게 사사건건이 많은 간섭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참에 그동안 롯이 자기들 앞에서 의인인 체하며 자신들을 지도하려고 했던 것에 대해 앙갚음을 하겠다는 거다.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이 장면이 마치 돈을 빌려줬는데 돈을 빌려간 사람이 그 돈을 언제 준다. 언제 준다라고 하면서 계속 거짓말을 하며 피해 다니니까 돈을 빌려준 사람이 돈을 빌려간 사람의 집에 들어가려고 밤중에 찾아가서 그 집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 연상이 된다.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나그네들이 롯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버렸다.

 

11: ‘문 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롯을 문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 밖의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육의 눈을 밝게 만드는 게 쉬울까, 어둡게 만드는 게 쉬울까? 둘 다 같다. 하나님 앞에는 영육 간에 무엇을 하시던 어려운 게 없다. 모든 걸 초월하는 분이시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든 걸 초월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잘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이것을 잘 안 믿는다. 그래서 교인들이 자꾸 육에 사로잡힌다. 이건 죄에 포로가 된 거다.

 

지금 이 사건에서 롯이 하는 행동을 볼 때 롯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몰라본 거다. 알았다면 이런 행동이 안 나온다. 롯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몰라보니, 영의 눈이 어두우니 롯으로 이걸 알게 하기 위해서 무리들의 육의 눈을 멀게 한 거다. 이러면 어떻게 되느냐? 무리들은 롯도 안 보이고 하나님의 사자들도 보지 못한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 롯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소돔 고모라에 살면서 이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보도록,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보도록 그들의 영의 눈을 열어주어야 했는데 이게 없었다는 거다.

 

그러면 이 무리들이 그 전에는 하나님의 사자도 알아보고 영의 눈이 밝았었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이들을 저주를 하니까 육의 눈이 멀어버린 거냐, 아니면 평소에 하나님의 사자를 알아볼 수 없는 눈으로 산 결과가 이렇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냐? 후자다. 이걸 봐라.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영의 눈이 먼 이들은 자기가 살 길을 못 찾는다. 이걸 생각하면 씁쓸하다.

 

12-14: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신실한 종들에게는 미리 가르쳐 주신다.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소돔 고모라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짖었느냐? ‘하나님, 살려주십시오이거냐? 그들이 죄 짓는 일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하나님께 상달이 됐다고 표현을 한 거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사위들에게 말을 해도 듣지를 않는다. 그러니 그곳이 얼마나 죄가 가득 찬 곳이냐?

 

15-20: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롯의 말을 들으면 자기가 작은 산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봐주겠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게 지금 롯의 신앙을 말해주는 거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롯의 이 말을 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하나님의 사자들이 롯을 밖으로 끄집어냈으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음으로 멀리 도망을 쳐야 할 텐에 왜 변명이 붙느냐? 그러니까 롯은 구원에 대한 급박성과 경각심이 없는 거다. 롯의 신앙사상 정신이 이 모양이다.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롯이 이렇게 말을 하지 말고 뻘뻘 기어서라도 산으로 올라가려고 했다면 누가 아느냐?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롯을 순간적으로 높은 산으로 옮기실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이렇게 변명이 많은지?

 

21-23: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소알은 아주 작은 성이다. 이게 지금 롯의 신앙성을 말해주는 거다.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이 해를 사람으로 본다면 해가 빨리 솟아올라서 소돔 고모라 성을 태워버려야 하겠는데 롯이 굼벵이처럼 안 나가려고 하고 있으니 이 롯을 볼 때 얼마나 답답하고 미울까?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신앙 믿음은 제 성격 제 성질대로 나온다는 거다. ‘안 그렇다가 아니라 자기 속에 든 대로 나오고, 제 성격 성질대로 나오는 거다.

 

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사람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어떻게 피하겠느냐? 유황불이 비같이 내렸으니 이걸 피할 인간이 있겠느냐?

 

이게 하나님의 심판인데, 이걸 안 믿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게 하려고 화산이 터졌는데 유황이 솟아올라서 소돔 고모라 성과 주위를 다 불바다로 만든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뜻을 깨닫는 게 감소가 될까, 더 진해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실 때는 이런 저런 방편을 다 쓰신다. 그런데 유황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렸다라고 하지 않고 화산이 터져서 성이 멸망됐다라고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 뜻이 감소가 된다.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화산이 터져서 멸망이 됐다고 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것을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을 하겠느냐?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봤다. 뒤에 뭐가 있느냐? 자기 집이 있고, 장롱에 감춘 금은보석이 있고, 밤마다 춤추고 노래하던 무대가 있다. 이걸 축소시켜서 교회로 보면 교회의 성질을 말해주는 거다. :의 큰 음녀 바벨론 교회와 똑같다. 지금도 이런 교회가 많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목사님들이 이런 타락적 요소들을 자기의 신앙 속에서 못 찾고 있다. 그래서 지금이 마지막인 거다. 교회의 질을 볼 줄 모르면 심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거다.

 

27-28: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그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이게 지금 아브라함의 신앙의 성질을 말해주는 거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선 사자들 앞에서의 그 신앙의 질에 와서 그 장면을 본 거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아브라함이 이 장면을 봤다. 이 장면을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서 그 신앙의 질로 본 거다. 여러분들도 신앙의 질이 여호와 앞에 정확하게 서면 소돔 고모라 성과 롯의 신앙의 색깔, 정신, 소원, 목적, 목회하는 방법이 다 보이는 거다.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화산이 터졌다면 폭탄이 터진 것처럼 구름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겠지만 유황불이 하늘에서 비같이 내린다면 그 연기가 옹기점처럼 생기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브라함이 영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았다는 것을 표현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과학적으로나 사학적으로 따지기보다 우리에게 향한 구원섭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게 옳은 거다.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누가 볼 때 이렇게 보인 거냐?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어떤 말을 할까? ‘아이고, 화산이 터졌네. 큰일 났구나. 저기가 어디냐? 소돔 고모라성이구나라고 말을 하겠지만 아브라함이 볼 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 거다. 그래서 이방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다라고 외쳐도 이들은 못 알아듣는다. 신앙의 눈은 항상 하나님이 앞선다.

 

29: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이 때 다른 성들도 심판을 받았는데, 특별히 롯의 거하는 성들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라고 힘주어 말을 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이게 뭘 말하는 거냐? 아브라함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인간의 세계도 이런 게 있는데, ‘내가 너를 경찰에 넘기고 싶지만 너희 아버지를 생각해서 내버려 둔다하는 게 있듯이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주님의 덕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고 있는 거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잘못된 게 많이 있을 수 있는데 그 때마다 마음 속에서 너 그러면 못 쓴다. 이래야 한다하는 주님의 교훈이 있다. 이건 주님의 권고성이다.

 

롯은 아브라함의 덕으로 부끄러운 구원, 불탈 구원을 얻었다. 아브라함의 이 마음이 누구의 마음이냐? 단순히 아브라함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안에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표현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도 표현을 해도 무방한 거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했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들어있는 건데, 이걸 단순히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사랑으로 인해 롯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가 믿음의 길이 아닌 죄악적인 길로 자꾸 달려가고 있을 때 내가 그의 육적인 면을 위해 기도를 하면 응답이 되느냐? 어느 면을 위해 기도를 해야 응답이 되는 거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할 때 당신의 백성을 건지시고 인도하시는 진리이신 그 분 앞에 인간을 만드신 그 분의 소원 목적을 잡고 기도를 해야 응답이 되는 중보의 기도가 되는 거지 육신적인 면을 놓고 기도를 하면 응답이 없다.

 

30: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롯이 소알보다 좀 더 높은 산에 올라가서 거주했다.

 

31: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큰 딸의 이 말이 세상의 도리를 쫓는 말이냐, 믿음의 도리를 쫓는 말이냐? 세상의 도리다. 두 딸이 믿음의 도리를 쫓는다면 이들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 아브라함 삼촌 집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자기 축복이다. 아브라함의 집에 신앙의 신랑감들이 많이 있는데 롯의 두 딸은 믿음으로 사는 아브라함 집의 사람은 자기들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오늘날 교인들이 결혼을 할 때 롯의 두 딸처럼 믿음의 도리가 아닌 세상의 도리를 쫓아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결혼을 할 때는 천국의 기업을 위해 결혼을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 기업을 찾으려고 결혼을 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잘 생기고, 많이 배우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돈 많은 사람을 찾는다.

 

32-38: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

 

믿는 사람이 세상도리를 쫓다보면 이런 방편이 나오게 된다. 참으로 겁이 없는 딸들이다.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해 놓고 이런 일을 벌였다. 두 딸은 인본주의를 썼고, 아비는 술에 취하니, 세상에 취하니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이게 부끄러운 일이냐, 자랑스런 일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이게 뭘 말해주는 거냐? 지금의 타락된 교회의 행태가 이 모양이라는 거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닌 인간 우리 식으로 찾자이거다. 생각을 해 봐라. 믿는 사람이 이런 정신으로 산다면 그 삶이 어떻게 되겠느냐?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다. 롯은 이것만 해도 주님의 큰 은혜를 받은 거다. 그런데 롯의 집안의 족보를 보면 롯의 두 딸로 인해서 모압과 암몬 족속이 나왔으니 이들이 롯을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할아버지? 삼촌? 아버지? 이모부? 할아버지라고 할 수도 없고, 아버지라고 할 수도 없고, 삼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이게 뭐냐?

 

이걸 신앙적인 면으로 생각을 해서 용어를 붙인다면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하는 거다.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의 신앙사상이 이렇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이 좋아서 세상과 짝을 지어 살면 여기에서 자기의 어떤 이력이나 공력이 나오는데, 이게 자기의 후손이다. 믿는 사람이 자기의 어떤 사상이 주격이 되어서 움직이다 보면 이에 따른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게 자기의 후손이다. 이런 면을 말하는 거다.

 

롯의 두 딸의 행동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걸 영의 눈으로 보면 남이 아닌 현재의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영적으로 보지를 못하니 자기는 롯의 두 딸이 아닌 것으로 아는 거다.

 

성경을 볼 때는 그 내용이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하나님의 본질을 놓고 거기에서 자기의 정신과 사상을 봐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을 버린 채 세상위주로 따라가면 자기의 신앙상태를 전혀 못 본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입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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