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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과 왼손 사이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467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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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1-4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오른손과 왼손 사이"
2010년 2월 27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1-4

  오늘부터 산상수훈 두 번째 장인 6장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1-4절인데, 여기에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먼저 퀴즈를 냅시다. 오늘 설교 제목이 ‘오른손과 왼손 사이’인데,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몸통?, 과? 정답은 설교 끝날 때쯤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구제, 혹은 자선에 대한 말씀인데, 먼저 1절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의’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앞 장인 5:20 말씀과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는 의의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최고라고 여겼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부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높은 수준의 의를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 자체이시고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고, 그동안 왜곡되고 편협한 성서해석의 울타리를 예수님께서 제대로 다시 쳐주셨는데, 그 울타리를 채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를 채워나가는 것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계명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앞장에서 보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을 언급하시면서 항상 그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간음에 대한 규정에서도, 이혼에 관한 규정에서도, 맹세에 대한 규정에서도, 그리고 보복과 용서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과 계명을 주신 본질적인 목적에 대해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왜곡시켜버린 본질적인 의미와 계명을 지키는 정신과 마음가짐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는 계명에 담겨 있는 참된 목적과 정신, 그리고 마음가짐에서 출발하는 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보여지는 행위가 그럴듯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출발점이 잘못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외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경건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세 가지 관행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제, 기도, 금식입니다. 그것이 1절부터 18절까지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셋은 유대인의 경건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을 이루는 종교적인 관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 이 셋은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교회 역시 이 셋을 중요한 것으로 여겨왔고, 성도들에게 열심히 할 것을 권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행해야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를 언급하시면서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이 세 가지를 비판하거나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본 전제는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더 열심히 하라는 겁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의 경우 이 구제에 얼마나 힘썼는지 모릅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 교회로 가져와서 가난한 성도들이 필요에 따라 쓰게 했을 정도입니다. 기도 역시 뜨겁게 했고, 금식 역시 열심히 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주축이 되는 멤버들이 유대인이었던 것도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목적과 정신을 가지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목적과 정신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열심히 하되 그 목적과 정신을 기억하고 바르게 하라는 겁니다. 오늘은 구제에 관한 말씀인데, 유대인들이 구제를 하는 데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신명기 15:7-11입니다. 그 중에서 11절만 보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참 현실적인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이렇게 원망어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왜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요?’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그렇다’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이해되십니까? 하나님께서 공평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인간의 범죄 이후에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차고 왜곡된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구제입니다.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대신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공평하게 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15:7-11의 말씀입니다. 의미를 살려 읽으면 이렇습니다.

“불공평한 이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펴서 이 땅을 공평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제를 쩨데카(צדקה)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참 탁월한 해석입니다. 쩨데카의 본뜻은 사실 구제가 아닙니다. 쩨데카의 본뜻은 '의로움, 공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 뜻만 가지고 말하면 구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를 쩨데카라고 부르는 데는 랍비들의 성서해석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구제에 해당하는 전문용어가 없었는데, 랍비들이 미쉬나 탈무드 시대를 거치면서 쩨데카라는 말을 구제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의'에 해당하는 쩨데카라는 말을 구제라는 용어로 사용한 근본적인 이유는, 구제는 공의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의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고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공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의를 뜻하는 쩨데카를 구제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만큼 구제에 힘쓰는 민족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구제에 힘썼고 지금도 구제를 가장 많이 하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구제 모금도 많이 하고 구호 단체도 많이 있습니다. 서구 문학에서 유대인들을 구두쇠로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로는 가장 구제를 많이 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구제금을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티쿤 올람이란 '세상을 고친다'는 뜻인데, 이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구제를 통해 세상을 공평하게 하신다는 뜻과 같습니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쩨데카, 공의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통해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서 세상을 올바르게 고쳐나가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제는 의무입니다. 권장 사항이 아니라 의무 조항입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구제할 의무가 있고, 또 필요한 사람은 부끄러움 없이 구제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구제 받는 사람도 역시 구제하며 살 의무가 있습니다.

  유대교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에게 속한 것은 그에게 주라. 네 소유 중에 그의 것이 없나 살펴보라." 내가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제는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남의 것을 돌려주고 무슨 자랑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이러한 구제를 할 때 자랑을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통해 쩨데카, 곧 공의가 성취된다, 구제는 그 사람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므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 예수님 이후 시대에 정립된 사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구제에 대해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종교적인 의무로 여겼고 많이 했는데, 그 예로 예루살렘 성전에 구제를 위한 방이 따로 있었습니다. 성전의 한 방을 정해서 누구나 곡식이나 구제금을 갖다 놓을 수 있게 했고, 도움이 필요한 자는 누구든지 가져다 쓸 수 있었습니다. 회당에도 구제함이 있어서 누구든지 자유롭게 구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제를 하는 자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나 더 이해해야 할 것은 예수님 당시는 헬레니즘 시대였다는 겁니다. 유대교 내에서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구제를 당연히 해야 하는 종교적인 의무로 여겼지만 당시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말 그대로 자선이었고, 그러한 자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힘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돈이나 재산을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은 그가 가진 부와 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지요.

  쉽게 예를 들면 누가 수재의연금으로 천만 원을 냈다고 하면 사람들의 인식은 그 사람은 천만 원을 충분히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일억 원을 냈다고 하면 일억 원을 기꺼이 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반드시 공개적으로 합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가 자선한 금액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도 역시 동일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이지요. 더불어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에 따라 그와 걸맞은 금액을 자선했고, 그렇게 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날도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이러한 헬라적인 자선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유대인들 역시 그런 경향이 많았다는 것을 2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유대인에게 있어 구제는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항상 문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입니다. 당연한 것을 했을 때는 자랑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을 했을 때 본인 스스로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목적으로 할 때는 그것을 자랑하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고 하게 됩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 거액을 공개적으로 기부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그럼으로써 사회적인 지위까지도 높아지려고 하는 목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당이나 거리에서 합니다. 그것도 나팔을 불면서 말입니다. 나팔은 왕이 행차할 때 부는 겁니다. 여기서 진짜 나팔을 불었다기보다는 마치 왕이 행차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는 겁니다. 회당에서도 조용히 구제함에 돈을 넣지 않고, 사람들에게 일부러 알려서 내가 얼마의 금액을 기부하겠다고 떠들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공개적으로 하면서 알렸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유대인들 지도층 가운데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공의를 이루는 구제, 즉 쩨데카가 아닙니다.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동정해서 정말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신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공개적인 구제를 통해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거래에 불과하고 외식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왜 외식이냐? 쩨데카의 바탕은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쩨데카, 하나님의 공의의 바탕은 긍휼입니다.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명하신 구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바탕은 긍휼입니다.

  가난한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왜 도와야 하는가? 그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나의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이고, 내가 마땅히 사랑하고 섬겨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긍휼의 마음 없이 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거액을 해도 절대 쩨데카가 되지 못합니다. 자선은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구제, 즉 쩨데카는 되지 못합니다.

  그런 외식적인 구제를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있냐고요. 이것이 다른 사람의 손이라면 모를까, 한 사람에게 있는 오른손과 왼손을 말하는 것인데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수 있냐는 겁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종종 과장법을 사용하시는데, 이것 역시 그러한 예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과장법은 뻥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마치 그런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사법이 바로 과장법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됩니까? 은밀하게 하라는 겁니다. 나 자신도 모를 정도로 하라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나 자신도 모를 수 있을까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25:31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의 일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그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을 구분하여서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처럼 그렇게 구별한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4절)

  왭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절)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의인들이 무어라 합니까? 의인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공의를 뜻하는 쩨데카와 같은 어원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듣고 무어라 합니까? '아, 그럼요. 저희가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합니까?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그렇게 질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 대답하십니까?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즉 쩨데카를 행한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받으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칭찬과 상급을 받는 이들이 기억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언제 그랬냐는 겁니다. 잘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당연한 것으로 알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연한 것을 했는데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일일이 기억할까요? 기억 안합니다. 아니 기억 잘 못합니다. 누가 나중에 말하면 '내가 그랬었나?'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3:1-2도 같은 의미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형제 사랑과 손님 대접 역시 쩨데카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보면 '부지중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몰랐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섬기고 사랑하고 대접한 사람들이 천사인지 모르고 했다는 말도 되지만, 형제 사랑과 손님 대접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몰랐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기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형제 사랑, 당연한 것인데 뭘 그걸 일일이 기억합니까? 손님을 대접하는 것, 나그네와 객을 선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한 당연한 것인데, 뭘 일일이 기억합니까?

  이런 의미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본인 스스로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하라는 겁니다. 형제 사랑,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 나그네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것 마땅히 하고, 당연히 한 것 기억조차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일이 기억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서운해집니다. 우리는 Give and Take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으면 상대방도 그렇게 해주길 바랍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참 잘해주었습니다. 무언가를 희생하며 했습니다. 섬겼습니다.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것에 대해 별로 고마워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나에게 되돌아오는 것도 없습니다. 그럴 때 드는 마음이 서운함입니다.

  왤까요? 왜 서운합니까? 기억하거든요. 왜 기억합니까? 아직 내 마음 가운데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자가 되라,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남의 발을 씻기는 자가 되라,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네 형제 가운데 가난한 이, 어려운 이가 있을 때 네 손을 펴서 돕되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넉넉히 주라,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내가 믿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명하셨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낮아져 남의 발을 씻기라, 예수님께서 명하셨고 친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섬김 받는 자가 되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라, 내가 그러려고 왔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섬기고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것을 하고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됩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했다고 일일이 기억하지 마세요. 기억하지 않는 훈련을 하세요.

  서운한 감정이 들 때가 있어요. 왜? 사람이기에. 예수님 닮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아직은 연약하기에. 그러나 서운한 감정이 들 때 기억하지 않는 훈련을 하세요. 예전 일이 기억나서 서운해지지만 서운해지면 더 많은 일들을 기억해냅니다. 그러니까 더 서운해지고 화가 나고 괘심해지고 상처받고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예전 일이 생각나서 서운해질 때 거기서 그치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때마다 당연한 것 했다,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다 하는 생각만 하세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당연한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7-18)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경험한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나팔을 불 것도 없습니다. 다만 당연한 것으로 알고 열심히 돕고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고 잊어버리세요. 형제 사랑도 마찬가지고, 누군가를 돕고 섬기고 대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연한 것 했고 하나님께서 보고 기억하시니까 나는 잊어버리면 됩니다. 서운한 생각이 들 때도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훈련을 하세요.

  그래서 이 말씀은 구제의 방법에 대한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제를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구제의 바탕은 상대방에 대한 긍휼, 즉 사랑입니다. 그런데 자칫 구제가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이 될 수도 있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없이 하는 외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도움을 주었어도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도왔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금전적으로 도왔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려운 이를 돕는데 마치 나는 돈이 많으니까 당신에게 선심을 쓴다는 식으로 주거나 상대방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면서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해야 하는가? 도움을 받는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쩨데카에 대한 랍비들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쩨데카에 대한 내용도 점점 더 발전을 하게 되는데, 특히 주후 12세기 중반의 람밤(רמבם), 본명은 모세 벤 마이몬이고 흔히 마이모니데스라고도 불리고 유대교에서는 람밤이라고 불리는 랍비의 경우는 쩨데카를 여덟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높은 단계의 구제 방법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어 사업을 일으키게 하거나 동업을 하거나 혹은 직업을 구해주어 구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돕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경우 도와주는 사람이나 도움 받는 사람 모두 대등한 대인관계를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 경우는 단순한 구제라기보다는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인 구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구제하는 자나 구제받는 자가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앞서 소개한 성전의 어느 방을 구제용으로 구별해서 누구나 곡식이나 구제금을 갖다놓게 하고 필요한 사람들은 가져가게 하는 경우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섬겼던 왕십리중앙교회에서 그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았는데, 교회 마당 한편에 큰 쌀독을 놔두었습니다. 예전에는 성미라고 해서 쌀을 교회에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을 모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아예 쌀독을 교회 마당에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성미를 거기에 붓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중에 동네의 어려운 분들이 와서 퍼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교회는 교회 마당에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들어와서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하루아침에 바닥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역시 필요해서 가져간 것이라 생각하고 계속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돕는 사람도 그리고 그 도움을 받는 사람도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 않고 구제하는 사람도 누군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구제의 계명을 지킬 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돕는 자는 누구를 돕는지 알지만 도움을 받는 자는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는지 모르는 경우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그런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교인들이나 청년들 중에 저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일정액을 맡기면서 '목사님이 보실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써 주세요.' 혹은 '누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워 학교 등록을 못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직접 주면 상처가 될 것 같아 저라고 밝히지 마시고 전달해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면 받는 사람이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알더라도 그렇게 마음이 어렵지 않게 됩니다. 제 경우는 본인이 알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누가 했는지를 알려주는 편이었습니다. 그 분의 뜻을 잘 이해하고 부담스럽게 받지 말라는 것이지요.

  주는 것도 잘 주어야 하지만 받는 편에서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 도움을 받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는 사람이 그런 마음을 갖고 한다면 편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어려운 중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구제에 있어서는 구제를 하는 사람도 상대방을 배려하여 잘 해야 하고, 구제를 받는 사람 역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감사함으로 잘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있을 때 설교 중에 그런 말 한 적도 있었습니다. 돈 있으면 나에게 가져오라고 말입니다. 오해 없이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은데 직접 전달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고, 혹은 정말 누가 도움이 필요한지를 잘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나에게 오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실제로 온 분들이 제법 되었어요. 지금도 가끔 제게 그런 목적으로 돈을 보내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신나요. 제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부자가 된 것 같아 신나요. 그리고 그렇게 부탁하는 분들의 뜻에 따라 정말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전달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십시오. 다른 사람 돕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거든 저에게 가져 오세요. 제 눈에는 도와줄 곳이 많습니다.

  이처럼 구제의 단계를 여덟 가지를 들고 있는데, 강조점은 도움을 받는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최대한 자존심에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람밤의 글을 읽고 이 사람 구제에 대해 참 연구를 잘 했다 싶었어요. 그리고 든 생각이 이 사람 예수님의 가르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주후 12세기 중반 사람이거든요. 이미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에 널리 펴진 가르침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구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상과 같이 두 가지 면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구제의 바탕이 무엇이냐, 즉 구제를 하는 목적과 정신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쩨데카, 즉 공의를 이루는 것이며, 그 바탕에 있는 정신은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욱 더 구제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산상수훈에는 대전제가 있다고 했지요? 무엇입니까? 죄용서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를 받았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더욱 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돕고 대접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제와 도움과 섬김과 대접하는 동기와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코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거나 그렇게 해서 자신이 높아지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일 뿐이고 자기 의에 불과한 외식이요 위선일 뿐이고 이미 상을 다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죄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것으로 여기고 하고 당연한 것을 했으므로 기억하지 않는 것, 이것이 구제와 섬김과 사랑에 대한 태도이고 마음가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는 구제를 하는 방법인데, 말씀드린 것처럼 구제를 받는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해서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방법은 모르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존심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알더라도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있는데, 화가 중에 밀레 아시죠? '만종', '이삭줍기' 등을 그린 분인데, 밀레와 그의 친구인 장 자크 루소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밀레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림도 잘 그렸고 너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파리로 가서 그림을 배우고 싶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자기가 책임지고 있기에 가족을 놔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밀레의 그림 솜씨를 아낀 친구인 루소가 가족은 자기가 돌볼 테니 유학을 가라고 합니다.  

  파리로 왔지만 밀레는 가진 것이 없기에 돈벌이를 위해 누드화를 그리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밀레의 그림을 보던 사람들이 밀레를 비웃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후 밀레는 밥벌이를 위해 누드화를 그리는 것을 그만두고 농민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도 없고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서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인 장 자크 루소가 오더니 하는 말이 누군가 그림을 살 사람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돈까지 주면서 그림은 자기가 골라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로 직전에 완성한 그림인 '접목하는 농부'라는 그림을 집더니 3백 프랑이라는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밀레의 가족은 오랜만에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몇 년 후 밀레는 친구인 루소의 집을 방문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왤까요? 루소의 집에 그 그림이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친구인 밀레를 위해 늘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습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그냥 주면 자칫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수 있는데 지혜롭게 그리 한 것이지요. 친구를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에 했던 퀴즈를 다시 한 번 내겠습니다.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친히 보여주신 이 사랑이 우리가 행하는 구제와 형제 사랑과 섬김과 대접의 바탕이자 근거이자 동거가 되고 유일한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주십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이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복된 길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이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도 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구제와 섬김, 이웃 사랑을 더 확장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마음가짐과 태도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되, 양에 있어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도 하게 하십시오. 이웃사랑과 구제와 섬김의 지경을 더 넓히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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