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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8: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004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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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9-15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8: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2010년 6월 26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6:9-15

  오늘은 주기도문의 네 번째 청원으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부분이다. 주기도문은 일곱 개의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처음 세 개는 그 앞에 ‘당신의’라는 말이 있기에 ‘당신 청원’ 혹은 ‘하나님 청원’이라고 하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네 개의 청원에는 앞에 ‘우리’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우리 청원’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러한 주기도문의 구조와 내용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기도와는 참 다르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가? 우리 청원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청원으로 시작해서 우리 청원으로 끝날 때가 참 많다. 전에 소개한 유대교의 대표적인 기도문인 쉬모네 에스레 18개의 축복기도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고 그것들이 먼저 나온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는 우리 청원으로 시작하질 않는다. 당신 청원, 하나님 청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내용인데, 세 가지 청원을 하고나서야 우리 청원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별로 마음에 안든다. 무엇을 구하는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게 다다.

  양이 안찬다. 마음에 안든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없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어디 하나 둘인가? 뭐 그런 것 좀 구하라고 하시지 한 참 후에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하시더니 그 내용을 보니 영 시원찮다. 양이 안찬다.

  오늘 보는 네 번째 청원만 봐도 그렇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음에 안든다. ‘오늘 우리에게 복에 복을 주소서.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이 땅의 모든 복을 주시되, 누르고 흔들어 넘치기까지 복을 주소서.’라고 하면 양이 찰 것 같은데, 겨우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로 끝난다.

  누가 잘못된 걸까? 주님께서 우리의 형편을 모르고 너무 간단하게 기도를 주신건가, 아니면 우리가 무언가 잘못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기도문의 중심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가 주기도문의 핵심이자 중심이라 했다. 이 네 번째 청원 역시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그래야 이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뿐더러, 이 기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지도 알 수 있다.

  먼저 이 기도의 일차적인 의미를 보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일차적으로 해당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울리히 루쯔(Ulrich Luz)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해석했다.

이 기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특별히 하루 일이 끝난 후 임금을 받아서 다음날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용노동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았다. 만일 그들이 고용되지 않아 임금을 받지 못하면 가족은 굶게 된다.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오늘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이다.

  나는 루쯔의 지적이 매우 옳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실제로 하루하루 먹을 양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그들에게는 이 기도는 당장 오늘 먹을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이런 기도를 해 본 적이 있는가? 해당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는 이 기도가 절실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실제로 와 닿지 않는 기도일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당장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청원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우리 집 이야기를 하자. 우리 집은 음식 투정하는 것이 용납이 안 된다. 모든 음식은 감사히 먹어야 하고 골고루 먹어야 한다. 그리고 밥을 남겨서 버려서는 안 된다.

  난 보릿고개 세대는 아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봉지쌀 사 오시는 것은 봤지만 보릿고개 세대는 아니다. 굶었던 기억도 없다. 그런 내가 그리 하는 이유가 있다. 원래 잘 먹는 탓도 있지만 신학대학원 다닐 때 기숙사 생활을 했었는데, 그때 새벽기도 때 경험 탓이다.

  나는 주기도문에 따라 기도하기를 즐겨한다. 그냥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청원에 담겨진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한 시간 기도는 쉽게 할 수 있다. 여러분들도 한 번 해보시라. 기도의 양뿐만 아니라 내용과 깊이에 있어서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그때도 주기도문에 따라 기도를 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온 우주를 지으신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면서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를 자녀 삼으시고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창조주를 아버지로 모신 자답게 살게 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녀로서 당신을 닮아가는 아들로 살아가게 하소서...’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부분을 기도하는데, 눈앞에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이른바 제 3세계라고 하는 지역의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 특별히 너무 굶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이들이 보였다.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면서 넘어가는데, 그들에게는 실제로 오늘 일용할 양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굶고 그래서 죽어간다는 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 중 6명 중 1명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단다. 유엔식량농업기구 FAO의 발표에 의하면 전 세계 10억 2천만 명이 기아에 놓여있다. 우리나라의 인구수의 20배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전쯤에 기아를 줄이자는 세계 정상회의까지 있었는데 실제로는 기아인구는 줄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년 4백만 명씩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이제는 먹고 살만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만 해도 결식아동 수가 2008년 말 통계에 의하면 45만 명이 넘는다.

  그렇다면 식량이 모자른가? 아니다. 남아돈다. 남아도는 식량으로 가축을 더 기르고, 바이오 석유를 만들고 때로는 폐기처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매년 쌀 수확량이 남아서 고민이란다. 한쪽에서는 쌀이 남아돈다 하고, 날마다 남아서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하루에 404억 원, 1년에 15조원이라고 하는데 정작 45만 명이 넘는 우리의 아이들은 굶고 있다는 것이다. 식량은 모자라지 않다. 남아돈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가 하는 것이다.

  장 지글러가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 보면,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득을 위해 어려운 나라에게 보조를 하지 않고 창고에 식량을 썩힌다는 것이다. 그 많은 식량들이 소수의 권력자들과 다국적 기업 등에 의해 휘둘린다는 것이다. 어쩌다 도움을 주더라도 가난한 나라의 부패한 권력자들이 중간에서 거의 가로챈다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기아는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이 청원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적어도 우리의 대다수는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지는 않다. 그런 우리에게 이 청원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루쯔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리는 단 하나의 참된 방법은 최소한의 생계가 매일 매일의 관심사인 가난한 사람들, 특히 제 3세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이 너무나 옳다고 생각한다. 루쯔가 말한 것처럼 오늘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이 말은 그렇게 굶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우리도 굶자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맛난 음식 먹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우선 기억하자는 것이다. 나는 지금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지만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내 아이만한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매년 천만 명 이상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식탁에서도 기억하자는 것이다. 우선 음식투정하지 말라. 남아서 버리는 일 없도록 하자. 부모도 그렇게 하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라. 밥은 생명이고 하늘이다. 음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다. 그러기에 음식 투정하고 밥을 버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라고 주신 하나님께 대한 죄다. 무조건 감사함으로 먹으라. 남기지 말고 버리는 일을 최소화하라.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이 있음을 식탁에서도 기억하라.

  나누어 주라. 쌓아두지 말고 나누어 주라. 가지고 있다가 버리는 것은 죄다.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것들은 일을 안해서 그래. 일할 생각을 안해. 게을러서 그래. 먹을 것을 주면 더 일을 안해.’ 이런 말 하지 말라. 그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오늘 먹을 빵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가난한 자들에게 너의 손을 펴라는 것이다. 신명기 15:11이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전에 구제에 대해 말씀을 전하면서 나누었던 말씀이다. 예전에 어느 청년이 내게 이렇게 원망어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왜 가난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요?’그에 대한 답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공평하시기에 그렇다’이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인간의 범죄 이후에 인간의 탐욕으로 가득차고 왜곡된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구제다. 나누어주는 것이다.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대신 가난한 자들을 도움으로써 공평하게 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15:11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구제를 쩨데카(צדקה)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쩨데카의 본뜻은 구제가 아니다. '의로움, 공의'가 본뜻이다. 그런데 구제를 쩨데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명기 15:11 말씀처럼 구제와 나눔을 통해 이 땅을 공평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돕고 필요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공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의를 뜻하는 쩨데카를 구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제금을 모아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티쿤 올람이란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제를 통해 불공평한 세상을 고치길 원하시는데,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구제이고 나눔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은 나눔이다. 나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강도만난 자를 돌보고 살리는 것이다. 우리 역시 쩨데카를 행해야 한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것이 바로 쩨데카, 공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서 세상을 올바르게 고쳐나가는 티쿤 올람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에 참여하라.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고 특별히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을 하라.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는 일을 하라. 구제 성금도 하고 월드비전 같은 단체에 매달 성금해서 굶주리는 이들을 먹게 하라. 월드비전은 전 세계 100여개 나라 1억 명 이상을 돕고 있는 세계 최대의 기독교 NGO 단체다. 한 달에 3만원이면 된다. 3만원, 100세켈도 안 되는 돈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북한 등에 있는 어린이 한 명과 그의 가족을 먹일 수 있다. 그 아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날 뿐만 아니라 교육까지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런 일에 참여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넉넉히 가졌음에도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나누어주지 않는 나라와 기업들, 나누어주기는커녕 남아도는 곡물들을 가격을 올리기 위해 폐기처분하는 죄악이 더 이상 행해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곡물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들의 권력자들과 곡물을 판매하는 기업 들이 이익보다 생명이 중요함을 깨닫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힘을 모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월드비전과 같은 단체들이 더욱 많아져서 투명하고 정확하게 돈과 식량들이 전달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그런 정책들을 세우거나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꼭 그렇게 하자.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쩨데카, 공의이고, 티쿤 올람, 세상을 고치는 일에 참여하는 일이고, 주기도문의 네 번째 청원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내용이다.

  일차적인 의미에 대해서 보았는데, 이제부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바탕에 깔려있는 실제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사건을 봐야 한다. 출애굽기 16:4을 보자.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무슨 내용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양식, 만나에 대한 것이다. 만나가 무엇인지 아는가? 무엇인지 몰랐다. 히브리어로 מן 또는 מנך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서로에게 물었다. 'מה הוא' 'What is it?' '이게 뭐냐?'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다. 생전 보지 못한 희안한 음식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을 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구해내어서 이 광야에서 굶어죽게 만드냐고 말이다. 그에 대한 응답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다.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만나가 내리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로 진을 덮으셔서 고기를 먹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음식을 먹고 광야 40년을 지낸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삶의 자세이다. 광야는 척박한 곳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따라서 먹을 것이 매우 귀하다.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곡식도 있었고 양과 염소도 있었지만 이미 바닥난 지 오래다. 한 두 가정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없다. 그런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처음 보는 음식으로 먹이시고 메추라기 떼를 몰아 먹이셨다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생존여부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광야는 인간의 노력으로 생존이 보장되는 곳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이 광야다. 그러한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너희의 생존은 너희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너희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인데, 그 땅은 농사가 가능하고 유목도 넉넉하게 할 수 있는 땅이다. 그 땅에서 너희들은 착각할 수 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그 결실을 얻고 그 결실을 통해 우리의 생존을 지탱할 수 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광야를 기억하라. 너희가 열심히 일하는 그 수고와 그 열매로 너희의 삶이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야웨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배우라.'

  잘 생각해보라. 여러분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다. 땀 흘리고 있다. 그래서 일한 대가를 얻고 있다. 돈이 주어지고 집이 주어지고 여유도 생긴다. 그래서 삶을 영위해간다. 그런데 정말 그것으로 내 삶이 지탱된다고 생각하는가? 내 노력으로 열심히 일하면 그것으로 내 삶이 정말 튼튼하게 지탱된다고 믿는가? 돈 좀 많이 모아놓고 집도 장만하고 노후대책도 세우고 하면 정말 내 삶이 튼튼하게 지탱된다고 믿는가? 정말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열심히들 산다. 특히 한국의 4, 50대를 보면 더 그렇다. 죽어라 일한다. 그러다 정말 죽는 경우가 많다. 40대 남성 사망률이 높은 것이 그 탓 아닌가?

  잘 생각해보라. 내 삶을 지탱해주고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노력인가? 열심히 일하고 죽어라 일해서 얻은 돈과 자리인가? 정말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해준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돈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돈 버는 일이라면 하나님도 주일성수도 신앙양심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잘 기억해야 한다. 내 삶을 지탱해주고 붙잡아 주는 것은 나의 노력도 나의 피나는 수고가 아니다. 그래서 얻어지는 돈과 힘이 아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내가 어떤 힘을 가졌다고 해서, 어떤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부자가 있었다. 우리식으로 하면 만석꾼이었다. 논밭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 수확량이 아주 풍성했다. 그 풍성하게 거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한다.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아,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에게 말한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런데 어찌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이다. 바보 부자의 비유이다. 이 바보 부자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그토록 목을 매고 죽어라 하고 가지려고 하는 재물이 결코 우리의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서 모아둔 돈이 많다. 재산도 많다. 돈을 쌓아두고 산다. 그래서 뭐? 그것이 내 삶을 보장하는가? 아니다. 바보 부자처럼 하나님이 그 생명 거두어 가시면 끝이다. 생명까지는 아니어도 그 재물 거두어 가시면 끝이다. 건강을 거두어 가시는 경우도 있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가? 아니다. 여유는 있겠지.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 할 수는 있겠지. 그것이 정말 행복일까? 순간적인 만족일 뿐이다. 요즘 청년들을 보면 폼생폼사를 원하는 이들이 참 많다. 돈 좀 많아서 폼 나게 살다가 폼 나게 죽겠다는 것이다. 폼 나게는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폼 나게 죽을 수 있나? 폼 나게 죽는 게 뭔데? 바보 부자가 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참 많다.

  내 삶을 지탱해주고 보장해주는 것은 돈이 아니다. 창고에 쌓아둔 재물이 아니다. 은행에 쌓아둔 돈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 내가 있는 어떤 자리가 내 삶을 지탱해주고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다.

광야 40년의 만나와 메추라기가 바로 그것이다. 처음에는 신기했다가 나중에는 지겹도록 먹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깨닫고 기억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너희가 가진 그 무엇도 아니고 너희의 힘으로 얻은 그 무엇도 아니라 너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먹이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의 인생은 광야다. 공감하는가? 이 광야에서 절대적인 것은 내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내 힘과 노력으로 얻은 그 무엇이 아니라 내 삶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되라. 소득이 많아지고 자리가 높아지고 무언가 가진 것이 많아지고 얻어지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욱 기억하라.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만나로 가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만나를 통해 하나의 시험, test를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만나의 양이 있다. 아침에 만나를 거두는데 정하신 양이 있다. 얼마인가? 한 사람에 한 오멜씩이다. 한 오멜은 약 2리터에 해당한다. 딱 하루치, 세끼 먹을 분량이다. 그만큼만 거두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다. 즉 아껴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명하시고는 이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셨다는 것이다.

  왤까? 왜 한 사람당 한 오멜, 딱 하루치 분량만 거두라고 하셨을까? 좀 더 거두면 안 되나? 좀 많이 거두어서 통에 재어두고 먹으면 안 되나? 좀 아껴서 모아두면 안되나?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나?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 하지 않았는가? 욕심 많은 이 사람들이 더 거두었다. 그런데 남음이 없었다. 분명히 한 오멜보다 더 많이 거두었는데 거두고 보니 똑같다.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뭘 했나? 아껴두었다. 왜? 모아두려고. 역시 더 가지려는 욕심 탓이다. 어찌되었나?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하루가 지나자 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달랐다. 다음 날이 안식일인데 두 오멜, 그러니까 이틀 치를 거두었는데, 이때는 하루가 지나도 벌레가 생기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이다. 이미 몇 주에 걸쳐 범죄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 자기주장이라 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 것,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 내가 하나님 되겠다는 생각, 하나님 대신 내가 주인 되는 삶,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 삼아 사는 것이 바로 자기주장이다. 죄의 본질은 자기주장이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자기부인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왕의 자리,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부인이다.

  이 자기부인이 일어나는 현장이 어디인가? 우선은 내 안일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서?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디? 물질에서까지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그 현장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범죄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결핍과 자기주장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결핍이 생기고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자기주장이다. 하나님이 없기에 이 결핍을 인간은 무엇인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물질이다. 이 물질을 갖기 위해서 일을 한다.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지만 그 차원을 넘어선다. 물질이 목표가 된다. 더 많은 돈,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힘, 더 높은 자리가 목표가 된다. 열심히 일하는데 나중에는 일이 목적이 된다. 일이 우상이 되고 물질이 우상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자기의존이고 맘모니즘이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내가 열심히 일해서 얻으면 그만이다. 내 힘으로 돈 벌 수 있고 내 힘으로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존이다.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 돈이 힘이다, 돈이 삶을 결정한다,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돈이다, 돈이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맘모니즘이다.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이 같은 일의 우상화는 자기의존이고 자기주장이다. 살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하지만 물질에 대한 탐욕은 우상숭배다. 자기주장이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살 수 있다는데 무슨 하나님을 의지하겠는가? 돈보다 하나님인데 무슨 하나님을 의지하겠는가? 일을 우상화하는 자기의존과 물질에 대한 맘모니즘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삶의 태도는 없다. 설사 교회를 다녀도 하나님을 진실 되게 의지하고 진정으로 섬기는 믿음과 삶의 태도는 희박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웃과의 관계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일을 우상화하고 자기의존을 하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없다. 언제나 일이 우선이다. 일 중심이다. 관계가 없다. 맘모니즘에는 이웃은 없다. 내 욕심을 위해, 내 이익을 위해 상대방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 내가 더 갖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것을 내가 가져야 한다. 거기에는 정직도 없고 양심도 개의치 않는다.

  자기주장은 이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이웃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 왜 만나를 한 사람이 한 오멜씩, 딱 하루치만 거두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 하셨는가? 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를 거두라고 하셨는가? 물질에 대한 자기 부인, 일에 대한 자기부인이다.

  물질에 대한 자기주장은 탐욕이다. 인간의 탐욕은 더 가지려는 것이다. 더 모아두려는 것이다. 만일 만나가 다음날에도 상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한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넉넉하게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더 가지려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남의 것까지 탐했을 것이다. 뻔하다. 그러한 물질에 대한 탐욕인 자기주장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왜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고 그 전날에 이틀 치를 거두라 하셨는가?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과 마찬가지 뜻인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 주일을 지키는 것 역시 물질에 대한 자기주장과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자기의존에 대해 거부하라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자기주장과 내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살 수 있다는 자기의존에는 안식일은 없다. 쉴 틈이 어디 있는가? 더 일해야지. 더 돈 벌어야지. 내 삶을 지탱해주고 지켜주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물질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게 된다. 주일 성수하게 된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다. 물질에 대한 자기주장으로는 십일조 못한다.

  물질에 대한 자기주장이 탐욕이라면,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은 자족이며 청빈이며 나눔이다. 하루치만의 만나만을 거두고 남겨두지 말라는 것은 자족하라는 것이다. 내가 그날 하루 먹고 살 수 있으면 감사한 것이다. 더 갖겠다고 욕심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게 된다. 정직도 없고 신앙양심도 없게 된다. 그러니 자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청빈이다. 청빈은 자발적 가난이다. 아주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고 삶의 태도이다. 실제로 가난하지 않지만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삶이다.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는 자발적인 불편을 택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소득이 3백만 원이라 하자.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3백만 원 가지고 다 나를 위해 살던가, 얼마만큼은 포기함으로써 그만큼 불편해지는 것이다. 십일조를 하면 10분의 1만큼 불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10분의 1이든, 얼마든 이웃 사랑에 쓰게 되면 그만큼 불편해지는 것이다. 그게 청빈이다.

물론 검소하게 사는 것도 청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청빈은 단순한 검소가 아니다. 물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물질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서 오는 물질적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청빈이다. 특별히 청빈은 자기의 것을 나누어주는 나눔, 이웃사랑과 관련이 있다. 더 가지려는 탐욕을 거부하고 이러한 자족과 청빈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이다.

  삭개오를 보자.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물질과 일에 대한 자기주장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오직 돈이었고,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죽어라 일했다. 세리라는 자신의 자리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들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아 재물을 모았다. 그러나 예수님 만난 후에 그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자기가 남을 속여 뺏은 것은 몇 배를 더해 갚는다. 엄청난 불편을 감수하는 일이다. 더 가지려고 했던 사람이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무엇을 보여주는가?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이다.

  우리는 물질이 절대화되는 맘모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더 가지려고 하고 더 가지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재물이 나의 삶의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 것 같다. 똑같이 욕심에 이끌려 살고 자기 힘을 믿고 살려고 한다. 자족과 청빈과 나눔으로 대변되는 자기부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기부인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그저 내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자기부인이 아니라 하나님만큼 힘이 있는 맘몬, 물질에 대해서도 자기부인은 이루어져야 한다.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러기에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러기에 탐욕에 이끌려 살아가는 맘모니즘을 거부하고 자족과 청빈과 나눔을 특징으로 하는 물질에 대한 자기부인이 있어야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에 담겨 있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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