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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62 추천 수 0 2016.06.05 15: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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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30-3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1장 30절-33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절-32절: 하나님의 종은 사람을 무서워하면 안 된다. ‘하늘로서라’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알므로 몰매를 맞을 것이고, 진퇴양난이다.


진리이치의 말씀에는 변명을 못하게 돼 있다. 왜 그러냐? 이렇게 말해도 걸리고, 저렇게 말해도 걸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성이라면 인간이 이렇게 말을 해도 걸리고, 저렇게 말을 해도 걸린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의 말씀 앞에서는 ‘아멘’밖에 없다.


말문이 막힌 그들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하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 된다. ‘마지막 시대에는 거짓 종들이 많이 나온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는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하늘의 일을 하시는 걸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요한1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다’ 라고 했는데 이걸 글자 그대로 보면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되는데, 노아홍수 때 홍수에 죽은 자들을 향해서 육체로 살았다고 했는데 이건 범죄적인 의미에서의 말이고,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도성인신하신 것을 부인한다는 그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성인신하신 것, 말씀이 육신 된 것을 안 믿는 목사가 어디 있느냐? 이걸 안 믿는다면 목사도 아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했는데 마귀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라서 그 말을 한 건가, 알고도 그 말을 한 건가? 귀신들린 자들이 입을 열어서 뭐라고 했느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했다.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안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살짝 건드리는 것이다. ‘네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냐’ 할 때 ‘그렇다. 왜’ 이렇게 되면 그 말에 꼬투리가 잡히게 되는 거다. ‘네가 하나님이 아들이어든’이라고 하는 것은 표현만 달랐다 뿐이지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예수님을 믿는 진리의 성도이면’ 하는 말과 같이 들어가는 거다.


핸드폰에 전혀 모르는 전화번호에서 ‘당신은 당첨이 되었습니다. vip가 되셨습니다’ 하는 문자가 올 때 문자를 보낸 그곳으로 전화를 했다고 하면 그건 이미 코가 꿰인 것이다. 그곳에 전화해서 ‘나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면 그건 벌써 그 사람에게 정신이 넘어간 거다. 넘어갔다고 해서 넘어간 게 아니라 그런 것에 신경을 썼다 하는 자체가 벌써 넘어간 거다. 이런 사람은 다른 면에 있어서 얼마든지 속아 넘어갈 수 있는 정신적 요소가 들어가 있는 거다.


예수님 앞에서 말문이 막힌 이들은 예수님께서 6개월 앞서 보내신 세례요한으로부터 광야세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다. 할례는 받았을지 모른다.


할례는 ‘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제부터 이방인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하는 증표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세례는 씻는 거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못 받은 게 아니라 받지를 않았다.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에서 회개의 세례의 본질을 모르게 되면 회개라고 하는 게 깊이가 없고 시시하게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회개를 종교적인 하나의 제도로 되는 의식행사로만 알게 된다.


요단강가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것도 계시인데, ‘신앙사상 면에서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의 쪽으로 향해서 살겠습니다’ 하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을 만나려면 바리새교인들의 세상요소로 된, 종교적 요소로 된 그걸 다 등져야 한다. 그래야 세례요한에게 나올 수 있는 거다. 나왔다 하면 벌써 신앙사상적인 면에서 질적으로 그렇게 돌아온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해서 나오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이다.


물론 그 때는 세례를 받으려면 의식적으로는 요단강물에 푹 잠겼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단에 따라 ‘침례가 옳은 거냐, 세례가 옳은 거냐’ 하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기가 신앙 질적인 면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본질에 적중성으로 들어갔느냐’ 하는 게 문제다. 예수 믿는 사람치고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었는데도 세례를 안 받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문제는 신앙사상이 큰 문제다.


회개의 세례의 본질을 모르면 무엇이 크게 보이는가 하니 종교적인 세상만 크게 보이게 돼 있다. 자기 신앙의 질이 그렇게 된다. 안 그렇다가 아니다. 우리는 입으로 나오는 그 말만 듣는 게 아니다. 자기 속을 자기가 말로 하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의 중심을 보는 것이다. 주님도 그렇게 보신다.


우리가 교인을 몇 명 소개받을 때 ‘저 분은 집사고, 권찰이고, 장로고, 예수 잘 믿습니다’ 할 때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을 분석해야 한다. 뭘 보고 잘 믿는다고 할까? 보통은 물질적 시간적 활동적 충성봉사를 염두에 두고 그 기준에서 잘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 중심의 정신이 있다. 그걸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는 영의 눈으로 보는 신앙의 성격 성질 성분을 봐야 한다. 이거는 육덩이 신앙가지고는 못 보는 거다. 종교적 신앙지식을 가지고는 못 보는 거다. 안 보이는 거다.


예수님께서 안약을 사서 보라고 하셨는데 보는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안약을 사서 바르라는 것이냐? 예수님께서 보시는 눈이 그 때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보는 눈과 똑같으냐?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의 눈은 누구 눈을 닮았느냐? 마귀 눈이냐, 바리새교인들의 눈이냐? 다 예수님의 눈을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한다. 예수님께서 언행심사의 활동을 하면서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못 보겠느냐? 못 보면 어떻게 남의 마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다.


대표적으로 믿음 좋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니까 아브라함이 그 명령을 듣고 표면적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명령 속에는 언약이 들어있다.


이게 다 비유다. 성경은 비유요 비사요, 그 속에는 상징도 들어있고 형식도 들어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니까 살다가 남방으로 내려갔는데 남방으로 내려가는 이것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말씀을 잡고 계속 떠나는 것이다. 날마다 떠나고 있는 것이다. 계시는 말씀을 듣고 그 날만 떠나는 게 아니라 날마다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떠나다 보니 남방으로 쓱 내려갔는데 남방으로 내려가는 그걸 아브라함 스스로가 알았을까, 몰랐을까? 자기가 어리석은 길을 가면서 ‘나는 어리석은 길을 간다’ 하고 가느냐? 자기는 진짜고 옳다고 하고 갔는데 결과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자기는 똑똑하다고 했는데 그만 속는 경우가 많다.


아브라함이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내려가게 되니 표현상 아내를 팔아먹었다. 제일 사랑하는 아내를 팔아먹었다. 그 때는 이삭을 안 낳았을 때다. 제일 사랑하는 아내를 판다는 것은 신앙정조를 팔아먹는 걸 말하는 거다.


남방에 내려갔다가 올라올 때 누가 따라왔느냐? 하갈이 따라왔다. 하갈이 따라오는 것이 문자로는 기록은 안 돼 있으나 뒤의 사건을 볼 때 따라온 것을 알 수 있다. 영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누가 숨어서 따라오는 게 안 보인다. 그 때야 왕이 미안하니까 ‘종 하나 데리고 가라’ 한 것이다.


세상으로 내려간 신앙 속에는 올라올 때 반드시 뭐가 따라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약속의 땅으로 올라올 때 바로의 군대가 따라붙었다. 예수를 안 믿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세상성 풍습 습관이 막 따라온다. 바로 믿으려면 그걸 다 죽이고 끊어야 한다. 안 끊고 있으면 교회 다녀도 교회로 시험에 들게 한다. 이건 저주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속에 하나님의 것을 공감할 수 있거나 좋아하는 성질이나 요소는 없었다. 안 믿는 사람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속에서 ‘그 말이 맞다’고 그래도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타락성에서 하는 말이지 하나님의 질로서 맞다고 하는 게 아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구별 분별시키지 않으면 진리를 모르는 거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 하나님의 온전자로 되는 이 이치를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물리치고 있다면 그가 받았다고 하는 건 성령이 아닌 악령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영원히 가는 영적 이치를 바리새교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판단하고 앉아있으니 그게 육이냐, 영이냐? 육이다. 그러면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언행심사가 그들의 율법에 문자적으로 걸리는 게 많이 있느냐, 없느냐? 많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걸고 넘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표면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은 인간의 중심,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거, 거듭나는 거, 성품을 입히는 거다. 원리상 율법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인데 그들은 이건 없이 율법의 표면만 잡고 율법주의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자꾸 판단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의 진노에 사라진다.


오늘날 자기 속에 종교적인 세상만 크게 보인다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건 신앙이 아니다. 이치적으로 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되신 예수 그리스의 사람, 성령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입는 거다. 그런데 그건 버리고 바벨탑을 쳐다보고 그거 지으려고 야단법석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 이름은 안 밝혔는데 성전건물을 보고 ‘이 돌들이 어떠하며’ 한 것은 웅장한 그 성전을 보고 감격에 겨워서 예수님께 소개를 한 것이다. 예수님은 ‘네가 이것들을 보느냐?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고 다 무너뜨리겠다’ 라고 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자는 집인데,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마저도 허물어 버렸다. 그러나 부활 때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진리이치대로 척도대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만들어진 것은 다 가지고 올라간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질적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세례요, 예수님을 인격적 결합적으로 만나게 하는 세례다. 질이 그렇다. 이 권세는 하늘로부터 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되는 세례라야 만이 그 다음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거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세례요 불세례다. 역사적으로는 시공간이지만 신앙의 질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가서 성령을 보내겠다’ 그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화 된 그 신앙 속에 때를 봐서 성령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이다. 질이 그렇다.


성경은 계시인데 이 성경을 자꾸 시간적 개념으로만 보면 안 된다. 시간적인 개념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질적인 면에서 아직 멀었구나. 아, 이제는 됐다’ 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질적으로 보고 말씀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시간 속에 들어있는 신앙은 안 된다.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초월하는 신앙이라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창:이던 계:이던 왔다 갔다 한 눈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미 역사계시 표면계시로 완성돼 있다. 이 성경을 보는 사람은 시간을 초월해서 봐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에게 성경이 기록된 의미가 아무 것도 없다. 성경의 역사를 안다고 믿음이 있는 거냐? 아니다. 그건 지식밖에 없는 거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세례요 불세례인데 이런 세례를 못 받으면, 또 바리새교인들처럼 물리치면 예수님과 의사적으로 정면 대결로 믿게 된다. 당시 유대 종교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다. 역시 예수님도 그 하나님을 믿고 계시는 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거다. 이 예수님은 사람의 속 중심을 하나님의 성질로 바꾸는 역사를 하신다. 그러나 바리새교인들은 표면과 행동 강조다.


성경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부르면서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듯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 믿으면서, 설교를 하면서 성경 액면 표면만 말을 하면 이건 예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이 믿는 것이다. 기도를 해도 인격이 아닌 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없는 기도를 하는 거다.


어떤 사람이 자꾸 다른 사람을 까내린다고 하면 그 까내리는 걸 반대적으로 보면 누가 누구를 올리고 있는 셈이냐?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자꾸 올리는 거다. 또한 이치에도 맞지 않게 무조건 나쁘다고 하고, 보기 싫다고 하고, 주는 것 없이 밉다고 하는 것은 자기 기준이 돼서 그러는 거다.


성전을 정결케 하는 권세는 어느 교단, 어느 교파, 어느 종교단체, 어느 권력기관이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근원 되신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다른 교권이나 교세로는 안 되는 거다. 이치가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의 언행심사 모두는 성역이다. 즉 거룩한 일이고 거룩한 역사다.


어느 교단이나 어느 교파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을 거룩하고 정결하고 성결케 만들 수 있느냐? 어느 교단 교파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 속의 무형적인 악한 습성이나 악한 영에 붙들린 걸 정결케 할 수 있느냐? 없다. 분명한 이치를 알아야 한다.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되는 거다. 그건 곧 구원이다.


구원은 신령성이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으로 되어 있는 거고, 성령의 사람이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그게 구원의 사람이다. 기독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는 그런 사람으로 돼야 한다. 안 그러면 고통스럽고 얻어맞는다. 예수 믿으면서 왜 얻어맞느냐?


화목 화평이 어디서 되는 것이냐? 주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에서 되는 거다. 자기 가정이 왜 싸우는 거냐? 의사단일이 안 돼서 싸우고 집 나가고 죽이고 돈 타령하는 거다.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과 듣는 것이 주님과의 의사단일,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이 아니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교회가 세상과 단일성이냐? 그러면 교회가 통째로 못쓴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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