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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의 신앙은 교회가 아니다.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64 추천 수 0 2015.10.15 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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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39-4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8.3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이제 우리의 신앙은 교회가 아니다.
요4:39-42

유대주의 속에 내장된 반사마리아주의는 아마도 우리에게 내장되어 있는 ‘반일감정’과 같을 겁니다. 그런데 그 ‘반일 감정’이라는 게 과거 역사 속에서 일본이라는 국가로부터 국민 각자가 얻은 내면의 상처를 공격적 증오심으로 대체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앗시리아나 페르시아로부터 받은 상처를 자국민과 같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있는 겁니다. 동에서 뺨맞고 서에서 분풀이 하는 못난 짓이지요. 그러면서 유대인들은 그와 같은 내면적 감정을 은폐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미워하는 행위를 뭐라고 변명하는가 하면 ‘정의의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배제와 격리의 사회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상 사마리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항상 사마리아를 대체하는 대상과 사건들을 찾았습니다. 사마리아를 대상하기는 버거우니까 자기들 내부에서 ‘사마리아’라고 빗대서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는 겁니다. 누가 될까요? 이방인들이 그 대상입니다. 또 신성을 모독한자들을 마치 사마리아 사람들을 숙청하듯이 그렇게 대했습니다. 이런 대상들에게 내면에 감추어진 증오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던 겁니다. 요8:48에 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모두 이런 죄목으로 숙청을 당했습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모두 이런 병증을 가지고 살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에게 묻는 겁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사마리아 인으로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말 속에 들어있지요?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범상치 않은 랍비를 향한 여인의 가치의 혼란이 엿 보입니다. 여인은 사마리아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존재의 근거입니다. 그걸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뭔가 지혜를 듣고 싶어 하는 겁니다. 4:11-12을 보세요. “어디서 생수를 구하며, 야곱의 우물보다 더 위대하시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전을 통해서만, 사마리아나 예루살렘이나 오직 성전을 통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고 사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인 신앙 습관에 머물러 있는데, 그런데 이런 신앙에서는 행복은커녕 고통의 삶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사마리아 여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예배에 목매고 살아가지만 결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삶의 문제에 답 없음을 경험하는 이스라엘 전체, 모든 사람들의 문제였습니다.

이때 신앙과 인생의 깊은 회의에 빠진 여인의 물음에 대한 대답, 즉 인생살이의 모든 문제를 성전예배로 풀리지 않는다는 한탄에 대한 대답이 뭔지 아시지요?  

“너희 아버지께서,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다른 곳’과 ‘다른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곧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로 지금’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두 성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데 예수는 다른 시간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이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그러니까 여러분은 금 새 이 낱말을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두 ‘지금’은 이런 겁니다. 여인의 ‘지금’은 전통이 되어 내려온 모든 것, 질서 잡힌 ‘지금’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어느 때 부턴가 ‘이렇게 해야야 한다’는 꼬리표가 붙어서 시작 된 질서에 포섭되고 지배당해서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이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지금’입니다. ‘앙시앙 레짐’ 즉 구체제 전반이 바로 여인의 ‘지금’입니다. 여인의 방황이고 고민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이 ‘지금’은 그의 생애에 아무것도 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세겜과 예루살렘에서는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지금’이라는 말은 뭘까요? 예수의 ‘지금’은 바로 그와 같은 질서를 교란하는 ‘지금’입니다. 그 질서를 부정하면서 그 장벽을 월장(越牆)하게 하는 ‘지금’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항상, 예배할 때마다 늘 어제를 부수는 일입니다. 익숙한 어제를 쓰다듬는 게 아니고, 어제의 경험과 성취를 재차 구하는 게 아니고 ‘어제’를 부정하고 월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지금’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말하는 예배라는 겁니다. 조금 더 진전을 시켜야 되는 말이지만 다음 구절로 넘어가 봅시다.

그러면 그 ‘지금’을 어디서 해야 하느냐? 장소가 어디냐 말입니다. 본문 어디에도 그곳은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컨대 ‘어느 곳도’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동시에 ‘모든 곳’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전통의 질서에 구금당한 어떤 곳에서도 야훼를 향한 진리 수행(예배)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탈출을 꾀하는 ‘모든 곳’에서 야훼를 향한 진정한 수행, 진정한 예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뭡니까? 진정한 예배란 어떤 방식, 어떤 장소가 아니라 ‘어제’ 라는 ‘그물’에서 월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생활, 신앙, 의식, 경험의 질서를 깨부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시간상으로 그건 항상 ‘지금’이 되죠. 장소로는 ‘어디서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본문 밑으로 가면 그곳이 바로 ‘동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동네’에서 ‘지금’월장하는 것이 신앙 즉,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이렇게 야훼를 향해 자신을 거듭 부수며 살아야 행복이 가능해집니다. 이게 인간들에게 있어 야훼를 향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익숙한 어제에 있습니다. 익숙한 장소인 성전이나 교회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에게서처럼 교회는 더 이상 인간 개개인과 세상의 변화와 지극한 생존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주의, 인간의,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적인 지복을 위해 우리 각자의 질문은 어디에서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 걸까요? 요한복음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권력의 질서에 의해 창조되고 억압된 공간에서 탈출하려는 모든 곳에서, 그러한 실천 속에서 너희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사의 내외적인 문제들이 오로지 예배당에서 전통적인 종교적 의례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설교는 이제 무용해졌습니다. 그런데도 현재의 교회와 신앙인들은 마치 사마리아 여인처럼 습관적으로 거기 매달려 있으면서 절망하고 회의하고 있는 겁니다. 이 절망의 관성적인 종교현장에 예수님이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눈여겨보세요. 예수에게는 낯선 사마리아고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낯선 동네의 사람들이 오래된 편견을 깨고 파격적인 예수의 낯선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수를 신뢰하게 됩니다. 세겜 ‘성전’이 아니라 그냥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특별한 장소에서 진리를 만난 게 아니라 일상의 시간, 일상의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이건 뭘 말하는 겁니까? 구태 즉 과거의 관습, 인습, 의식, 가치, 경험들을 모두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신앙과 의식과 경험의 월장이 일어난 겁니다. 삶의 자리 어디서건 월장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43-45절을 보세요. 사마리아에 대응되는 예수님의 고향 갈릴리가 등장합니다. ‘고향’은 전통과 추억, 관습이 저장된 곳이지요.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 월장하지 않습니다. 46절 이하는 더욱 부정적입니다. 기적이 없으면 이 종자들은 믿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엄청나게 변모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답이냐? 아닙니다. 교회는 더 이상 답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뭐가 답이냐? 예수님의 말씀이 답입니다. 그 말씀이 뭐냐? ‘권력의 질서에 의해 창조되고 억압된 공간에서 탈출하려는 모든 곳에서, 그러한 실천 속에서 너희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이것만 외우면 다 되는 거냐? 그럴 리가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총체적으로 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의 현재를 재해석하고 적용되어 매 순간 새사람의 의식, 가치, 행동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 행복한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처럼 ‘지금’ ‘여기’에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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