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25 추천 수 0 2015.11.30 10:20:46
.........
성경본문 : 막6:12-29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6장 12절-29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왕이 듣고 가로되 이는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가로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쌔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하니라.


귀신을 쫓으니 맑은 정신이 돌아오고, 맑은 정신이 돌아온 것은 곧 더럽고 추하고 멸망 받을 정신들이 다 나갔다는 말이다.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함은 글자 그대로 보면 무슨 기름이겠느냐? 이게 지금 비유적인 표현이다.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함은 성령역사의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정신적 마음적 고통은 물러가고 온유하고 평안한 마음이 깃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 마디로 이룰구원을 말하는데, 이 이룰구원 속에는 본문의 말씀대로 선악과 먹은 지식이 생명과 먹는 지식으로 전환되고, 생명과 먹는 지식은 천국복음이니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속성이 천국에 들어갈 적합한 본질의 사람,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실상화 성품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들어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니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속했던 것, 자기 마음대로 넓은 길로 가던 게 다 고쳐지고 정화되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거룩성으로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 소원 목적으로 세상성으로 들어가 있으면 세상의 어떤 문제를 하나 놓고도 ‘이래볼까 저래볼까, 이래야 손해가 덜 나고, 이래야 더 편하고, 이래야 돈이 더 들어오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니, 이렇게 되면 사람이 꾀만 늘고 속에는 사기성이 들어서 생각 사고방식 자체가 힘이 들게 된다.


그런 식으로 아무리 생각을 품고 품고 해도 간단히 말하면 그게 전부가 하나부터 열까지 멸망 받을 생각이다. 그러니 사람이 힘이 든다. 사람을 보면 돈으로 따지게 된다. 그러니 사람이 힘들어진다. 그 생각 자체가 병이 든 것이다. 그 생각 자체가 사단의 시험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적으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오면 그만 자기 성격대로 성질대로 튀어나온다. 이러면 누가 볼 때 ‘저거 귀신이 들었구나’ 이런 형태로 보여진다.


사람이 예수 믿으면서 행동을 고치는 것은 마음의 양심에 의해 고쳐져 나가는 거다. 그러니까 메시지가 행동을 고치라고 하는 메시지는 안 된다. 그건 이방세상에서 하는 방법이다. 성경은 그 정신 마음 성질을 천국 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돌리는 것은 억압 강압이 아니라, ‘예수 잘 믿어라’ 그런 게 아니라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서 자기가 가치판단을 해서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늘의 뜻의 사람으로 살게 되는 거다. 그게 나를 만든 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예수 믿는 거다. 그렇게 사는 것이 좁은 길 생명 길이다. 좁은 길 생명 길이란 다른 말로는 내가 가졌던 세상을 향한 마음과 소원은 버리고 하나님의 의사에 단일성으로 맞춰 사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의사단일대로 생각을 갖는 그것이 훨씬 실력적이라서 모든 면에서 적응을 바로 가진다. 그러나 행동을 자기의 기준으로 세워놓으면 여기서는 이 행동을 해야 하고 저기서는 저 행동을 해야 하니 가는 곳곳마다 색깔이 달라야 된다.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느냐?


14절-19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앞에서 어떻게 하니까 예수이름이 드러나느냐? ‘회개하라.’ 이러면 사람이 바로 되고, 그 다음에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이게 지금 예수님이 이런 거냐, 제자들이 이런 거냐? 제자들이다. 이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질이 똑같이 들어가는 거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교회 인도자들이 하는 일이 질이 똑같이 들어가야 한다. 방편이 똑같아야 된다? 그건 안 되는 거다. 한 사람 자기라도 수시로 방편을 달리 써야 할 면이 있는 것인데 그 방편을 지혜롭게 쓰려면 사람이 바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방편을 지혜롭게 써나가고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 본질이 없는 상태에서 방편을 쓰면 이게 어떻게 되겠느냐? 이러면 그만 방편이 기준이 된다. 그러면 이치가 달라져 버린다. 그러면 사람이 꾀만 늘어나고 방편만 늘어나고 수단만 늘어난다.


그래서 항상 수단 방법에 목적이 들어있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자기를 거짓말쟁이도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 그런 너는 힘없다. 그런 너는 바람 불면 날아가게 돼 있다. 사건이 오면 그런 너는 그 사건에 ko 당하게 돼 있다.


우리 기독자들은 내일 모레 십 년 후에 몇 년 후에 시간을 잡는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거다. 그런 사상은 시간 속에 들어있는 것이니 시간이 변경되고 상황이 변경되면 자기도 변경이 돼야 한다. 그러니 이건 100% 속는 거다. 우리의 신앙은 오늘을 하나님 앞에서 최대로 힘을 쓰는 거다. 오늘을 주시면 오늘을 최대로, 내일을 주시면 내일을 최대로, 십 년을 주시면 십 년 동안 하루하루를 최대로. 그 사람은 참으로 능력자가 된다. 빈틈없는 능력자가 된다.


그리고 계:에 보면 흰말 운동이 나오는데, 흰말 운동은 싸워서 이기는 운동(싸움)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먼저 승리의 면류관을 받고서 싸워서 이기는 거다. 그러니까 아직 안 싸웠지만 싸우기면 하면 필연적으로 이긴다는 보장을 받고 나가는 거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본질의 것을 갖고 있으면 이긴다는 것으로 전제가 들어가서 싸우는 거다. 그러니까 이긴 싸움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에서 말씀을 깨닫는 것도 세상과 싸우면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인데 예수 믿으면서 왜 소처럼 코가 꾀여서 질질 끌려 다니느냐? 그게 내 마음대로냐? 아니다. 코가 꿰이면 노예다. 환경에 노예, 죄에 노예다. 인간은 환경을 마음대로 다스려야 되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환경에 매여서 끌려 다니면 환경의 노예가 된다. 자유자가 안 된다. 자유자는 자기가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하는 거다. 이러면 얼마나 자유로우냐?


사람들을 보면 주로 돈에 노예로 들어가 있다. 사람이 돈의 노예로 들어가 있으면 결국은 자기 몸이 망가진다. 돈을 위해서 몸에 해가 될 정도로 일을 하면 몸이 망가지고 사람이 죽는데 그런 사람에게 구원이 어디 있느냐?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애들은 어릴 때는 뛰놀면서 정서가 발달이 되고 두뇌가 발달되고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닭장 같은 그늘진 아파트 안에만 있으니, 거기에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어서 살은 찌지, 늘 앉아서 세상공부에만 열중을 하니 이건 창조의 목적에서 보면 전부는 우상이다. 계:에 보면 이건 자식을 새의 밥으로 키우고 있는 거다. 세상은 이게 실감이 안 나는 거다. 예수 믿어도 육의 개념으로 살면 이게 실감이 안 난다. 사람이 무디다.


14절: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제자들이 많은 병인을 고치고 회개케 하니 제자들의 이름이 피알이 되느냐, 예수님의 이름이 피알이 되느냐? 예수님이 피알이 된다. 이게 참 옳은 거다.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즉 ‘구원이 피알이 된지라.’ 예수는 구원. ‘사람 온전이 피알이 된지라’ 그게 들어있다.


그러니까 회개를 하고 자기가 온전케 되면 예수님의 이름이 올라간다. 그러면 나로 인해 예수님의 이름이 올라가면 자기가 죽는 거냐? 아니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도 올라간다. 그걸 알아야 한다. 교훈을 듣고 하나님의 온전의 속성으로 존귀케 되면 예수님의 이름이 올라간다. 쉽게 말하면 전도가 된다 그 말이다. ‘널 보니 예수를 믿어야겠구나. 너도 쟤가 나가는 교회로 가거라’ 하게 되는 이게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는 거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면서 마귀의 이용물이 되지 말라. 거짓 종들의 이용물이 되지 말라. 이단자들의 이용물이 되지 말라. 자기 하나를 위해서 온 우주만물 천지만물이 돌아가고, 신령계 물질계가 다 동원되고 있는데 왜 자기가 자기를 헌신짝처럼 여기느냐? 다른 사람이 자기를 헌신짝처럼 여기면 싸우려고 대들면서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자기가 귀하게 여김을 받으려고 하면 자기가 모든 면에서 지식도 올라가고 도덕성이 올라가면 누가 자기를 함부로 여기겠느냐? 이러면 사람이 비범해진다. 사람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그런 데서 모든 에티켓이 나온다. 일부러 안 배워도 사람이 적절하게 나오는 거다. ‘어른은 이렇게 공경해야 되겠구나. 아이는 이렇게 대해야겠구나. 같은 또래는 이렇게 대해야겠구나. 남자를 대할 때는 이렇게, 여자를 대할 때는 이렇게 대해야겠구나’ 이게 나오는 거다.


14절-29절: 천국복음이 있는 곳은 반드시 예수의 이름이 드러나게 돼 있다. 천국복음의 교훈이 있는 곳은 반드시 구원이 드러나게 돼 있다. 구원은 사람에게 되는 거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거다. 저질에서 높은 차원으로, 무식에서 유식으로, 미련에서 영리하게, 모든 면에서 성질이 천국의 사람으로 상승이다.


교회에서 예수 믿어갈수록 사람이 그렇게 돼야 한다. 안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보다 최고로 고상하게 돼야 한다. 누구의 자녀냐? 하나님의 자녀이니 그렇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처럼’이라는 게 들어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것은, 그런 사고방식은 발에 밟히는 거다. 땅에 있는 것을 머리 위에 올려놓으면 되겠느냐?


창조 때부터 이게 구별이 된 것이고, 물은 아래로, 땅은 솟게 돼 있고, 나무는 자라면 열매가 맺게 돼 있는데, 모든 피조물들이 각자의 질서를 잘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된 게 오늘날 기독교회는 전부가 어르러졌다.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대다. 무지몽매다.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공부는 세상에서 예수 잘 믿는데 이용 활용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리고 일터는 대화의 수단이다. 내가 옳은 것을 알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인도를 해야 한다. 선생이 알면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거다. 선생도 모르면 못 가르치는 거다. 선생도 모르면 아는 학생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예수 믿는 것은 억압과 강압과 명령이 아니라 한 마디로 말해서 깨닫는 것이다. 하늘의 것으로 깨달음이 되면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살피게 된다. ‘어떻게 하면 존귀 영광스럽게 만들어줄까’ 그게 들어있다.


예를 들면 법적으로 하면 자기가 분명히 이긴다. 세상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도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이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질에 관한 이김을 생각하면 그 때부터 자기 머리는 복잡해진다. 그 때부터 자기 머리는 질이 저하가 돼버린다. 그걸 알아라. 그렇게 해서 돈을 많이 차지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잃어버린다. 그러니까 가치판단에 있어서 ‘사람이냐, 물질이냐’ 싸울 때는 물질이 좀 손해가 나더라도 사람을 택해야 한다. 사람을 놓고 물질을 가진다면 이건 예수를 믿어도 그 사람의 사고 발상 자체가 저하다. 아래다.


일반 상식적으로도 회사나 공장을 경영한다면 직원들을 먼저 생각을 하면 그 회사는 번창한다. 그러나 ‘돈 돈’ 하면서 돈만 자꾸 벌려고 한다면 사원들을 노예처럼 부리게 되고, 돈은 적게 주고, 이러면 결국은 그 공장은 망한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할 때 회사의 사장이란다면 돈을 사원들을 위해 쓸 줄을 알아야 한다. 사장은 돈에 욕심이 없어야 옳은 거다. 그런데 욕심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천국복음이 있는 곳은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난다. 따라서 천국복음이 있는 곳은 자기의 죄행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지금 본문에 보면 천국복음 앞에서 헤롯의 마음이 드러난다. 옳은 교훈을 들으면 자기의 죄행이 드러나게 돼 있다. 옳은 것은 빛과 같아서 빛이 비추이면 자기 속의 어두운 것은 나타나게 되듯이 옳은 것이 가면 죄행은 드러나게 된다. 그걸 회개해야 한다.

소문은 모두 자기가 아는 대로 ‘누구와 같다느니, 누구와 같다느니’ 하고 소문이 나간다. 왜 그렇게 소문이 나갈까? 이것은 미리 신실한 종들을 보내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을 찾도록 하는 구원역사적인 면으로의 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 소문이 제일 진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누구냐? 누가 자기의 죄행이 제일 진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느냐? 헤롯이다. 헤롯 안디바스다. 자기가 의로운 세례요한을 죽였기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이 너무나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빛이 비춰지니 드러나는 거다.


주님이 6개월 먼저 앞서 보낸 세례요한은 헤롯 안디바스를 향해서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을 했다. 헤롯 안디바스는 이걸 하나님의 목소리로 듣지 않고 단지 하나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책망을 달게 들었는데 그런 정도를 가지고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 헤로디아는 의로운 세례요한 선지자를, 마지막 선지자를 원수로 여겼다. 결국 너에게 마지막에 온 선지자를 네가 죽여 버렸구나. 선지자를 죽이면, 자기 속에 신앙양심적으로 옳음이 오는 것을 자기 양심에 찔리면서도 죽여 버리면 네 마음 가운데 온 선지자, 하나님의 종을 죽였느니 너는 멸망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자기에게 온 선지자를 죽였으니까 그에게는 예수영접이 안 된다. 구원영접이 안 된다. 진리영접이 안 된다. 구원이 안 된다. 깨달음이 안 된다. 진리 따르는 자기 양심을 자기가 죽이면 그 사람은 절대로 예수 똑바로 못 믿는다.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스스로는 잘 모른다. 알더라도 하나의 이성적으로 일반 도덕적인 개념으로만 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본질에서 어떻게 틀어진 그걸 스스로는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존재나 사건을 갖고 와서 나에게 이치적으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에 헤롯과 헤로디아가 나오고 그의 딸이 나오지만 우리는 그들을 손가락질만 할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나보고 하는 말이다. 솔직히 진리가 자기 양심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하자고 자기 마음 문을 두드리는데 그 양심의 소리를 얼마나 많이 죽였느냐? 그건 못 속인다. 자기에게 오는 옳음을 죽이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되겠느냐? 그러면 세상에서 존귀 영광을 잘 받겠느냐?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섭리로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잡아 돌리는 건데.


그의 아내 헤로디아는 세례요한을 원수로 여겼다. 이것을 헤롯 안디바스는 안다. 그래서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는 요구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자로 알고 있는 헤롯 안디바스로서는 마음속에서 번민이 나오는 것이다. 결국은 독살스럽고 악한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고 세례요한을 옥에 가둬버렸다. 그러니 회개할 기회는 자기 눈앞에서 지나가는 거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노골적으로 지적까지 했는데 가둬버렸으니 그 다음에 오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이는 거다.


지금 믿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일이 지나가고 있다. 그 일이 진행이 되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를 원수처럼 여기는 부분은 없는가? 교인들은 말할 것 없고 가만 보면 목사 사모가 목사를 원수처럼 여기는 자가 많다. 이건 헤롯 안디바스의 아내와 똑같다. 구약으로 말하면 이게 이세벨이다. 오늘날 이세벨 사모가 얼마나 많은지? 옳음을 따르자니 아내 쪽에서 바가지를 긁고, 아내 쪽으로 따르자니 하나님의 일에 대해 문제가 나오고.


하나님의 사자를 원수처럼 여기는 부부는 없는가? 지금 여기서도 그렇지만 교회의 결정권이 아내에게 있는 물러터진 남편은 없는가? 있을 거다. 그건 고쳐라. 남편이 왜 물러터지느냐? 바꿔놓고 살아라. 이건 벌써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서 이탈이 돼버린 거다. 하나님이 괜히 남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냐?


반대로 오늘날 이 시대에 진리이치를 모르니까 아내를 무조건 억압으로 누르면서 여필종부라니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창조의 목적대로 보면 남편이 아내를 진리로 자기 몸처럼 잘 다스리지 않으면 아내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고로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를 따먹은 그 때의 장면을 생각해 보면 남편입장에서 아내를 못 지킨 책임이 남편 자기에게 있는 거다. 그런데 대부분 그걸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



지켜도 생명과 따먹는 쪽으로 지킬 줄 알아야지 이거는 아내나 남편이나 모두 선악과 따먹고 제 마음에 안 들면 휘 저어버린다. 이렇게 되니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다. 이런 게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해서 깨어진 부부를 사회는 사회대로 불쌍하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데, 성경대로 보면 그런 와중에 사람이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같이 돌아와야 되는데 그게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또 인조사랑을 하면서 그게 다인 줄 안다. 이렇게 해서는 근본이 해결이 안 된다.


마침 헤롯 안디바스가 생일잔치를 열었는데 대신들과 천부장과 갈릴리의 귀인들 앞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스스로 들어와서 이방 우상 앞에서 추는 음란한 몸짓으로 춤을 춘다. 이걸 보고 모두들 기뻐했고, 헤롯 안디바스는 친 딸이 아닌 그 딸에게 ‘너에게 무엇을 주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했다. 이건 말도 함부로 하고 기분파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게 세상정신들이다.


딸이 어미에게 가서 그 말을 전하니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달라고 하라고 시켰다. 그래서 딸이 왕에게 가서 그대로 말을 했다. 그런 엄마가 있을까?


그 요구에 헤롯왕의 마음은 어두웠지만 많은 귀빈들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해서 그의 뜻대로 들어주고 말았다. 결국 헤롯 안디바스의 식구들은 천륜과 인륜을 범하고 말았다.


참고적으로 헤롯 왕가를 생각하면 예수님 탄생 때 어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 근방의 두 살 아래의 갓난아이들 모두를 죽인 헤롯이 있고, 두 번째로 헤롯 안디바스는 세례요한을 죽인 자요, 헤롯 안디바스와 원수 되었던 빌라도가 예수님께 십자가의 고난을 주면서 이 둘은 서로가 친구가 됐다. 예수를 싫어하고 죽이는 그런 사람들과 사기꾼들과 거짓된 자들과는 다 연결이 돼 있다. 쉽게 말해서 거짓 목사들과 이단자들은 연결이 되는 거다. 세 번째는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둘 때 주님의 사자가 쳐서 죽은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있다.


믿는 자들은 절대로 헤롯 왕가의 사상과 시집 장가가면 안 된다. 이들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로서 에돔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헤롯가는 에돔족속들이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의 이 사상의 뿌리를 캐 들어가면 ‘아, 이거 사람은 한국사람이요 미국사람이지만 그 사상은 에돔사상이구나. 그 뿌리는 거기서 나오는구나’ 이게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어떤 사상이 흐르고 있는지 그 사상을 생각해야 한다. ‘아, 이 사람은 어떤 신앙의 노선을 가졌구나. 구복주의이구나. 이건 신비주의 신앙노선을 가졌구나. 이건 자유주의 신앙노선이구나.’ 한 교회를 나왔지만 어떤 길로 가야 구원이 되고 상급이 되고 멸망이 되는 건지 그 속에 든 그것을 가지고 보는 거다. 한 교회에 나간다고 다 같으냐? 아니다.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는 같은 조상 야곱의 후손들이다. 북조는 열 지파, 남조는 두 지파로 다 야곱의 후손들이다. 에돔족 헤롯이 야곱의 후손이니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왕이 돼야 할 텐데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이방 강대국과 손을 잡고 있으니 그 왕 아래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세금이 어디로 다 나가겠느냐?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야곱의 후손들의 세금이 다 어디로 가겠느냐? 반대로 다윗 왕과 같은 통치자 밑에 있으면 국민들이 내는 그 모든 세금이 어디로 가겠느냐? 백성들을 위해서 쓴다.


그런데 헌금이 좀 많이 들어오면 이곳에 숨기고 저곳에 숨기고 외국에 들락날락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 요즘 쪼들린다’ 하는 건 백화점에 못 가는 게 쪼들린다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쪼들린다는 것은 수도세 전기세를 못 내는 거지만 그런 사람들은 수준이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헤롯 밑에 살면서 세금을 내면 그 세금이 어디로 다 가겠느냐? 이 헤롯은 이방나라 로마황제를 등에 업었으니, 그 힘으로 백을 삼고 있으니 백성들의 노력과 수고는 이방나라의 부요가 되게 하는 일에 다 빠져나간다. 이건 낭비다. 이건 이치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된 교회 안에 거짓된 목회자들이 있어서 세상 넓은 길 사망 길 멸망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헤롯 안디바스를 보면 아내를 무서워하는 물러 터진 남편이다. 남편의 권위를 어디서 세우느냐? 하나님께서 ‘남자다’ 하는 권위를 자기는 어디서 세우느냐? 아내를 맨날 장작으로 두들겨 패야 하느냐? 아내들은 어떤 데서 남편의 권위를 찾아야 하느냐?


남편은 물러 터지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남자로 만들어 놓은 것은 진리에 강한 사람이 되라는 그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가정이 진리화 돼 들어가고, 진리통치가 들어간다. 남편이 진리화 돼 있지 않으면 그 가정은 진리화 되기가 힘들다.


진리로써 권위가 서는 거다. 진리에는 지혜가 나온다. 지혜롭게 들어가야 한다. 남편들도 아내가 옳은 말을 하면 들어라. 옳은 말인데도 ‘남편을 뭘로 알고’ 하면 편할 날이 있겠느냐?


아합 왕이 이세벨을 무서워하듯이 헤롯은 아내의 말만 듣고 있다가 영원히 후회할 큰 죄를 짓고 죽고 말았다. 이 헤롯은 말을 기분 내키는 대로 해놓고 수습을 못하고 있다. 여자 헤로디아는 남자를 홀려서 죄 짓게 만들어 죽게 하는 간사하고 악한 여자이다.


딸도 악한 어미를 닮았다. 아달랴는 딸로서 어미 이세벨을 닮았다. 교훈이 내려가는 정신을 보면 이세벨은 반드시 아달랴를 낳게 돼 있다. 낳는다는 말은 오늘날 계시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비진리로 들어가 있으면 비진리의 행동을 자식처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100%다.


남자가 신앙정조 면에서 물러 터지면 아닌 말로 그 아내가 죽으면 다른 아내를 맞아들일 때 자칫 잘못하면 헤로디아를 만나게 된다.


헤롯 안디바스는 사건에서 옳고 그름을 찾아야 할 텐데 그러지를 않고 자기의 지위나 자기 체면에 더 마음을 쓴 사람이구나. 헤롯 안디바스가 자기 생일잔치를 할 것 같으면 자기가 태어난 창조의 목적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그게 아닌 자기 위신 자기 허세를 부리다가 영원히 씻지 못할 하나님의 사자를 죽이고 말았다.


그 잔치에 참여한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를 죽인 목격자들이고, 모두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죽이는 그 일에 동참이 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증인들이다. 빼도 박지도 못한다. 그걸 알아라.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3847 에배소서 자녀의 도리 엡6:1∼3  박상훈 목사  2016-12-10 540
13846 시편 밤에 찬양하자 시30:1-5  강승호 목사  2016-12-10 312
13845 마태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루자 마1:1-3  전원준 목사  2016-12-10 363
13844 이사야 메시야와 재림예수 사11:1-5  이상호 목사  2016-12-09 433
13843 이사야 성육신 - 사람이 되신 하나님 사7:14  이상호 목사  2016-12-09 654
13842 마태복음 하나님사랑 . 이웃사랑 마22:34-40  이상호 목사  2016-12-09 1100
13841 히브리서 감사의 제사 히13:15-16  이상호 목사  2016-12-09 765
13840 마태복음 자기(몫)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16:24-25  이상호 목사  2016-12-09 1324
13839 에배소서 효자는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엡6:1-3  이상호 목사  2016-12-09 631
13838 마태복음 어린 아이 같이 살자 마18:1-6  이상호 목사  2016-12-09 618
13837 요한복음 십자가의 고난 요19:17-18  이상호 목사  2016-12-09 987
13836 창세기 문지방의 귀신을 조심하세요. 창4:6-7  허태수 목사  2016-12-09 415
13835 출애굽기 잠언의 방식으로 읽는 십계명 출20:8-17  허태수 목사  2016-12-09 401
13834 마태복음 뙤약볕과 소금 밭 마5:13-16  허태수 목사  2016-12-09 375
13833 요한복음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 요1:45-46  허태수 목사  2016-12-09 275
13832 갈라디아 갑오개혁(1894년)과 기독교의 [주일] 갈2;11-21  허태수 목사  2016-12-09 223
13831 누가복음 저 따위 인간’과 ‘이 사람’ 눅18:9-14  허태수 목사  2016-12-09 291
13830 고린도전 사랑 밖에 난 몰라(I only know LOVE) 고전13:1-8  허태수 목사  2016-12-09 458
13829 빌립보서 성공이 아니라 성숙입니다. 빌3:12-15  허태수 목사  2016-12-09 534
13828 출애굽기 도적질하지 말라 출20:15  한태완 목사  2016-12-08 365
13827 마태복음 온유한 자의 복(2) 마5:5  김남준 목사  2016-12-08 334
13826 마태복음 온유한 자의 복(1) 마5:5  김남준 목사  2016-12-08 397
13825 마태복음 예수의 마음을 가진 교회 마9:35-38  김남준 목사  2016-12-08 556
13824 마태복음 애통하는 자의 복(2) 마5:4  김남준 목사  2016-12-08 219
13823 마태복음 애통하는 자의 복1 마5:4  김남준 목사  2016-12-08 790
13822 마태복음 심령이 가난한 자(2) 마5:3  김남준 목사  2016-12-08 371
13821 이사야 평화로 통치하는 왕 사11:1-11  강승호 목사  2016-12-07 336
13820 창세기 바라봄의 법칙 창15:3-7  조용기 목사  2016-12-06 450
13819 히브리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히11:1-6  조용기 목사  2016-12-06 491
13818 요한복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3:6  조용기 목사  2016-12-06 549
13817 시편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103:2  조용기 목사  2016-12-06 414
13816 누가복음 사랑 없는 종교도 있나요? 눅10:25-37  조용기 목사  2016-12-06 181
13815 히브리서 피 흘림이 없는 종교 히9:19-28  조용기 목사  2016-12-06 249
13814 히브리서 나는 믿음의 사람인가? 히11:1-3  조용기 목사  2016-12-06 462
13813 마태복음 마음의 분위기 마7:1-5  조용기 목사  2016-12-06 256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