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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03 추천 수 0 2015.10.19 11: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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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5:21-34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5장 21절-34절: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사람이 일단 태어나면 육신은 자꾸 늙어간다. 어린아이는 갓 낳으면 그 때부터 점점 늙어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출생하면서부터 공동묘지를 향해서 가는 거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렇게 늙어가면서 사회적으로 뚜렷하게 좋은 일을 하고 가는 것을 희망하고 생각한다.


인간이 보통 7, 80년을 산다고 할 때 공동묘지로 가는 이 기간 동안에 어린아이가 100년 앞을 생각하면 까마득하지만 거의 100년을 산 사람에게 물으면 어린아이 때가 엊그제 같다고 한다.


인간은 ‘육신은 날로 부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했듯이 속사람은 성장할수록 육신처럼 늙어지는 게 아니라 팔팔하게 더 젊어진다. 힘 있고 능력 있고 생생하다.


자기의 현재의 연령대를 보고 이룰구원 차원에서 예수님을 믿는 그날로부터 하나님의 속성을 즉, 지혜지식적으로나 도덕성적으로나 능력성적으로 얼마나 입었는지, 혹은 성장이 됐는지, 혹은 장성이 됐는지 스스로에게 자문자답을 해 봐라. 이건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그걸 따질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어도 안 믿는 사람과 같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나는 죽기 전에 무엇을 잘 이루고 가야 될 런지 생각을 하라. 안 믿는 사람은 자기가 죽기 전에 세상의 부요성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이뤄질 런지, 아니면 이루려다 이뤄보지도 못하고 죽을 런지, 아니면 이뤄놓고서는 그것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죽을 런지? 여러 가지 형태다. 그러나 예수님을 적중성으로만 믿고 바르게 들어갔다면 그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 안 믿는 사람은 이걸 모른다. 같은 사람인데도 모른다. 기독교인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도 세상 판으로 믿으면 그건 모른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판으로 믿는다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그거는 귀머거리고 소경이고 벙어리고, 또한 이건 무슨 신이 들렸느냐 하면 더러운 귀신이 들린 것이다.


하나님 앞에 더러운 귀신이 뭐냐? 더러운 정신이 뭐냐? 더러운 정신을 가지면 더러운 귀신이 들린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하고 성결한 것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거룩한 성령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신이 들어간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정신, 더러운 성격이 뭐냐? 하나님 앞에는 세상 것, 물질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말아라. 얻어맞는다. 이건 더러운 정신이다.


하나님은 신령한 분인데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가졌다고 자랑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정신없는 놈아’ 하신다. 신령한 만능의 능력자 그 분 앞에서 세상의 물질의 것을 가지고 자랑했다가는 그 사람은 그것도 빼앗기고 제 목숨도 못 살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신앙이 뭐다’ 하는 걸 바로 생각을 하라 그 말이다.


오전에 한 분문에 ‘어린아이가 죽어간다’ 하는 걸 자연생명, 밥 먹는 생명이 죽어간다로만 생각하지 말고 육신의 목숨 육신의 생명이 죽어 가는데 따라서 귀중한 것도 죽어가는구나. 이건 눈에 안 보인다. 살면서 예수님만 만나면 예수님의 것으로 성장되고 장성이 될 텐데 그 예수님을 못 만나고 그대로 죽어간다. 사망계로 빠진다. 그러면 그것을 살릴 수 있는 분이 누구냐? 예수님 당신이라야 살릴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빨리 가셨으면 좋겠는데 천천히 가지, 무리들이 자꾸 에워싸지, 무리들끼리도 ‘왜 내 발을 밟냐’ 하고 있지. 그러니 어찌 빨리 갈 수가 있겠느냐? 딸 야이로가 죽어가는 회당장의 입장에서 보면 딸을 살려야 할 텐데 그 무리들이 큰 방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속도로에 차들이 많이 간다. 고속도로 옆에 급한 차가 가게 해 놓은 거 생각 잘 한 거다. 급하다 급하다 해도 사람 죽는 것 이상 없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야이로의 아버지 회당장의 마음을 아신다. 그러면 우리들 역시도 예수님께서는 다 아시는데 그럼에도 막상 자기에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왜 그렇게 마음이 닳느냐? 그게 믿음이 없는 거다. 또한 사람이 아프면 빨리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는데, 병원에 데려다 놨는데도 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예수님은 다 아신다고 하면서 왜 그러는 거냐? 그럴 때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또 어떤 일이 생겼느냐 하면 25절에 보니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붙었다. 그러니 이걸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실 일이 설상가상으로 어렵게 된 것이냐, 회당장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의 일이 어렵게 된 것이냐? 회당장. 예수님 앞에는 열 사람 백 사람이라도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입장에서 보면 기절초풍을 할 일이다.


여자는 예수님께로 오기 전에 12년 동안이라고 하는 세월 동안 자기의 병을 낫게 하려고 수많은 의원을 찾아가서 많은 돈을 지불했다. 그러니까 12년 동안 안 가 본 곳이 없다. 인간의 수단방법을 해 볼 것은 다 해 봤다. 그러니 이제 남은 재산은 없다. 지쳤다. 그러니 여자 입장에서는 자기 인생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으니 먹는 것도 헛것이다. 먹어서 피로 가고 뼈로 가고 살로 가고 해야 하겠는데 계속 피로 흘러나오고 있으니 먹는 것도 헛것이다. 죽는 날만 기다린다. 이런 와중에 이 여자가 때마침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이다.


예수님의 소문은 그냥 사람이름 예수의 소문으로만 보지 말고 구원의 소문이다. ‘너를 구원하실 이’ 이게 예수님의 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소문은 살아나는 소문이다. 죽어가는 자기가 살아나는 자기로 된다는 소문이다. 죽어가는 자기가 구원을 만나면 살아나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차마 예수님 앞에 갈 수가 없다. 부끄럽다. 4장에서 보면 ‘씨 뿌리는 비유도 들려주었고, 등불의 비유도 겨자씨의 비유도 들려주었는데 그 때 왜 안 들었던고!’ 이건 우리의 생각을 그 여자 속에 넣어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집회에 왜 못 가봤을꼬. 그러면서도 왜 지금에야 예수님께로 가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집회를 다니시면서 그렇게 했고 병자도 고쳐주고 했으니 분명히 네가 그 소문을 들었지 않았느냐? 그 때 그곳이 아무리 멀어도 네가 살려면 찾아갔어야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이다.


어쨌든 본문을 보면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그래서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 접근하여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이라도 대자. 그러면 나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게 여자의 마음이다.


부자가 불속에 떨어져서 얼마나 목이 타고 고통스러웠던지 나사로를 통해서 물 한 방울만 달라고 한다. 물 한 방울을 먹으면 시원할까? 오죽하면 물 한 방울만 달라고 했을까?


이 여자가 무리 속으로 들어가려면 헤집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 여자는 발이 밟히고 밀쳐지고 멀어졌다 가까워졌다가 땀을 흘리면서도 있는 힘을 다한다. 여자로서 남자들 틈으로 헤집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힘이 들겠느냐? 그럼에도 있는 힘을 다 해서 마침내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었더니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여자는 자기 병이 나은 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환희의 기쁨도 잠깐.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이 나간 줄을 아셨다. 옷 가에만 손을 대었는데 능력이 나간 걸 어떻게 알았을까?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뒤로 쳐다보시며 ‘누가 내 옷 가에 손을 대었느냐’ 라고 하셨다. 이에 제자들이 말하기를 ‘무리들이 워낙 많아서 에워싸 밀고 있습니다’ 했다. 사실 앞서거니 뒷서거니 밀치락 뒤치락 하니까 예수님의 몸을 잡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더 잘 아신다.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다. 어림잡고 물으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소원을 정확히 아신다. 다 아시는 주님께서 그 여자로 스스로 나오게 해서 무리들 앞에 제자들 앞에 칭찬을 하시려는 것이다. 핀잔을 주려는 게 아니라 불러내서 칭찬을 하려고, 높이 올리려고 하는 거다.


제자들과 무리들은 여자에게 이뤄진 사실을 전혀 모른다. 여자만 알고 있다. 그렇지만 여자는 예수님으로 통해서 자기 속에 이뤄진 그 사실을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느냐? 우리 모두는 자기 속에 이뤄진 사실을 숨기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이 나가서 여자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을 막은 것을 아신다. 왜냐하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아니면 사망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 것이라야 만이 사망으로 사망계로 빠져나가는 이걸 막을 수 있다.


이제는 사망중단이 됐다. 죽음으로 흐르는 것이 중단이 됐다. 구약시대의 요단강 물은 헐몬산에서 흘러서 사해바다로 들어간다. 사해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다 죽는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흐르는 요단강 물에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들어서니 사망계로 흐르던 이 강물이 스톱이 된다. 생명이 들어서니, 말씀이 들어서니 사망권으로 흐르던 게 딱 스톱이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생명은 현재적으로 우리에게 그 역사를 하신다. 그래서 목사님들 메시지도 그것으로 적중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을 먹고 성도가 살아야 한다. 메시지에서 죽지 않을 것에 삼킨바 되는 게 나와야 하고 그걸 가르쳐 줘야 한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되고 일반적인 병 낫고’ 이런 가르침은 복음이 아니다. 이건 원칙상 성경해석이 아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니다.


생명이 연속된 진실을 숨기면 안 된다. 그러니까 그 신앙사상은 무리들 틈에 숨으면 안 된다. 무리는 소원 목적이 제각기 다르다. 취미도 소원 목적도 죄다 다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진리생명 길로, 좁은 길 생명 길로 가야 한다. 무리화로 가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간질 하는 아이를 고쳐주는데 무리들이 막 모여온다. 이걸 보시고 아이를 얼른 낫게 해 주었다. 왜 그러냐? 무리 속에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목사님들 메시지가 교인들로 하여금 무리들이 갖는 세상화 된, 구별 분별이 없는 혼합 혼탁 혼잡 혼성의 사상 속에 두면 안 된다. 귀신들린다. 귀신이 들되 간질병이 든 귀신이 들린다. 이러면 물과 불을 못 알아본다. 구별 분별이 없으니 그렇다. 이런 사람은 신앙사상의 물불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재산 재물 돈을 보면, 부자 된다고 하면 거기에 팍 엎어진다. ‘성령의 불 받으라’ 하면 거기에 팍 없어진다.


예수를 바로 믿으려면 그런 교회에 가지 말아라. 그런데 지금 그런 교회에 더 잘 가지. 그런 목사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건 주님이 보낸 것이 아니다.


자기가 현재 개체적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늘 듣고 적중성으로 신앙을 가지면 오늘날 교회의 무리화 된 그 사상이 다 분별이 되지만 모르면 거기에 휩쓸리고 묻힌다. 묻히면 너는 귀신들린 거다.


무리들이 무슨 말을 똑바로 하겠느냐? 복음의 말을 똑바로 하겠느냐? 못한다. 안 된다. 그런 데 가면 정신 혼을 빼놓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고함을 지르며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벙어리다. 한참 해놓으면 입에 거품을 문다. 이건 간질 들린 것이다. 그 상태 그 장면이 얼마나 추하냐?


여자를 찾는 것은 무리와 같이 되지 말라는 뜻으로 찾는 거다. 나았으니까 이제 무리와 같은 사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자랑을 하고 싶어서 찾는 거다.


33절로 보면 여자는 자기에게 이뤄진 사실을 예수님 앞에 엎드려 낱낱이 말씀을 드렸다. 여자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능력을 살짝 훔친 셈이니 예수님으로부터 도둑소리를 듣고 저주를 받아 죽을 줄 알았는데 하시는 말씀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한다.


여자는 혈루가 새는 구멍이 막아지니, 생명이 빠져나가는 구멍이 막아지니 육체적으로 건강이 오고, 생명적 연장이 되고, 재산이 빠져나가지 않게 되고, 부끄러움도 없어지고, 구원을 얻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된다. 이게 구원 얻은 자이다.


이건 비유로써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려고 이 여자를 등용시킨 것이니까 이제 여자의 혈루증을 영적 상태로 재조명해 본다면 혈루증은 피가 몸 안에서 돌지 않고 계속 밖으로 빠져나가는 거다. 이렇게 되면 얼굴은 핏기가 없고 결국은 죽는다. 이처럼 몸에서 피가 빠지면 생명이 단축이 되듯이 영적 면에서 자기의 언행심사 모든 활동이, 모든 삶이, 재산 투자 노력 활동 시간투자 한 것이 생명적으로 살아나지 않고 세상이라는 옛사람 육 쪽으로, 부패성으로 슬슬 빠져나가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면 이 사망성을 인간이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느냐? 병원에서 막을 수 있겠느냐? 못 막느냐? 병원에서는 이걸 막을 길도 없고 막을 줄도 모르고, 사망성이 빠져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모르니까 못 막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병원의 의사들이 못 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아시는 것은 병원 의사들이 아는 걸 아는 거냐?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만들어 내놓는 사람 만드는 전문가이다.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는 전문가이다.


많은 의원들을 찾아다녔지만 고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영적 사망성을 인간들이 못 막는다는 말이다. 사해바다로 흐르는 요단강 물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범궤를 어깨에 메고 들어서니 사해로 흐르던 강물이 멈추듯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 가에라도 만지니 사망으로 흐르던 것이 멈췄다.


옷 가에라도 만진다는 것의 그 마음은 교제성을 말한다. 표현이 옷 가이지만 신앙으로 들여다보면 예수님과의 영적 신앙적 인격적 교제성이다. 여자의 간절성은 예수님과의 교제성을 말한다. 예수님과의 교제성의 소원성.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의 옷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여자가 나은 것인가? 사도바울의 땀 닦는 손수건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그 손수건을 얹으면 병이 낫는 것이냐? 입었던 옷이나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생각이 나듯이 교제성의 성질을 띠게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쓰던 손수건을 얹으면 병이 나은 것은 손수건 자체가 능력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쓰던 그 사람의 성질,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하신 분이 이 수건을 어떻게 쓰셨구나’ 하는 이게 나오는 거다. 즉 감화를 받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참고로 알 것은 행여나 자기 남편이나 자기 부모나 자기 자식이 죽으면 그들이 살았을 때 입었던 옷이나 신었던 신을 남기지 말라. 시험에 걸린다. 다 태워라.


아버지가 노동을 하며 늘 쓰시던 수건은 땀 냄새가 난다. 그 땀 한 방울 한 방울 속에는 아내를 사랑하는 생각,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며 그 땀을 흘린 게 들어있는 거다. 값진 땀이다.


이 여자는 세상 사람들의 행적을 보고 감화를 받는 게 아니라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의 맛이라도 살짝 보고 싶은 것이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살짝 접촉만 되어도 사망으로 흐르는 쪽은 막히고 생명 쪽으로 흐르는 것인데 무리들은 그런 영적 상태를 모른다. 생명 쪽으로 흐르는 건지 사망 쪽으로 흐르는 건지 모른다. 무리들 신앙은 그걸 모른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교회에 가도 무리화 된 신앙은 그걸 전혀 모른다.


오늘날 나는 충성봉사는 열심히 하고 투자는 열심히 하는데 어느 면에 신앙에 허점이 있어서 신앙생명이 자라지 않을까를 생각해 봐라. 하나님의 지식 면에서 허점이 생긴 건지,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을 몰라서 허점이 생긴 건지?


주 하나님과 의사단일이 되지 못한 지식이나 의사단일이 되지 못한 지혜나 의사단일이 되지 못한 선이나 사랑이나 거룩이나 진실이 하나님과 단일 되지 못한 게 있다면 자기의 이해타산 가치평가 판단 모든 것은 사망으로 다 빠진 거다. 이건 성장도 없고 능력화 되지도 않는다. 이건 다 빠져버렸구나. 일생 전폭, 생활 전폭은 사망성이 다 돼버렸구나. 생명이요 영생이요 살아나는 것으로 옮겨진 것은 기본구원 외에는 아무 것도 없구나. 이룰구원 면에서는 허탕이로구나.


하나님의 종 목사가 된 사람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목사가 되었느냐? 밥을 굶을 각오를 하고 목사가 되였느냐? 목사 자기와 결혼하는 여자도 자기와 똑같은 신앙정신이었기 때문에 결혼을 했느냐? 부부가 이게 다르다면 아무리 목사라 해도 두고 두고 물과 기름이다.


의사단일이 아니면 안 된다. 특히 목회 길은 부부 간에 의사단일이어야 한다. 안 그러면 혼자 살아라. 한 길로 가는 나그네가 어떻게 싸우면서 가겠느냐? 세상적으로 사는 부부라라도 둘 다 세상적으로 단일이 되면 싸우지 않고 간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세상을 자꾸 처리를 하고 정리를 하며 하나님의 의사단일로 가는 것인데 부부가 의사단일이 아니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느냐? 오리와 닭이 같이 살면 오리는 물로 가자고 하고, 닭은 자꾸 동산으로 가지고 하니 어떻게 되겠느냐?


목사와 결혼을 했으면 믿음의 방주를 짓기로 하고 시집을 왔느냐, 아니면 남편이 목사가 되면 대우 잘 받고, 노후대책이 잘 되고, 자식들 외국유학도 보내고, 외국에 이민 가서 잘 살 목적으로 시집 왔느냐? 만일 그런 목회자 부부라면 예수를 아무리 열심히 믿었어도 전부는 사망성공이다. 그러니까 저주에 속하는 신앙이요, 심판에 속하는 신앙이다. 이거는 부지런을 떨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더 크다. 모르면 가만있어라.


예배당을 짓는데 대출을 받아서 지으면 그 이자를 갚는 세월이 20, 30년이 되면 돈의 가치가 떨어져서 부담되지 않게 갚을 수 있다고? 그러면 자기가 누구에게 돈을 빌려준 게 있다면 20년, 30년 후에 자기가 받을 돈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 거냐? 이게 말이 되는 거냐? 네가 미래의 일을 자꾸 생각을 하는데 네가 내일도 있을 런지, 아니면 오늘 밤에 죽을 런지도 모르면서 왜 자꾸 20년 30년 후를 생각을 하느냐?


오늘 하루를 자기 분수대로 최대한으로 살아라. 누가 미래에 대한 약속을 할 때 그런 거 믿지 말아라. 오늘 내가 있는 동안에 최대한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 이상 없다. 오늘 밤에 자고 내일 아침에 하나님께서 깨워주시면 일어나는 거지만 안 깨워주면 그냥 가는 게 인간 자기다.


신앙의 세계에서 항상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하라. 그리고 세상은 나를 위한 훈련의 장소요, 세상만사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잡아 돌리는 것인데 내가 세상을 잡아 돌리려는 건 될 말이 아니다.


자식들 교육보험 넣고, 자기의 암보험 넣느라고 현재 먹을 것도 못 먹고 있다면 그게 뭐냐? 나중에 행복하게 살려고? 자기가 말로는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면서도 인간 자기의 계획이 이뤄질 때까지?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 자기 계획을 이뤄주려고 손 놓고 가만있느냐?


지금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광야생활을 하며 가는 자기는 모든 보험은 하나님께 들어놓고 사는 게 옳은 건데 모든 보험을 애굽 왕에게 들어놓고서 하나님이 징계를 하시면 얼른 애굽 왕에게 뛰어 들어가면 되는 거냐? 하나님께서 두들겨 패면 얼른 마귀에게 가서 나 좀 살려달라고 하면 되는 거냐?


교인도 암이 드니까 교회마다 암보험 들라고 하는 암 예방 전도자가 있다. 이러면 나의 건강을 지키는 건강 상식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러다가 ‘주인이 내 직책을 빼앗았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하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할 거냐? 비참 그 자체다.


이 말씀이 오늘날 누구를 겨냥한 말씀 같으냐? 현재 우리 각자 모두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의 상식이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신앙상식을 갖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예수 안 믿는 이방인들이 좋아하는 상식을 갖고 있는 건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게 예수님의 선언인데, 그러면 예수님의 이 선언이 아니면 이 여자의 병이 안 낫는 것이냐, 아니면 이 여자는 낫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낮는 것이고, 다만 무리들과 제자들이 들으라고 선언을 해주는 것이냐? 후자다. 예수님이 선언하기 전에 ‘옷 가에라도’ 했다. 예수님은 그걸 아셨다. 그러니까 선언을 안 했어도 이미 낫고 들어갔다. 다만 그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라고 했듯이 우리도 나를 구원하는 믿음을 네가 가져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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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2 시편 강하고 위대한 사람 시136:10-26  이한규 목사  2016-10-18 420
13701 시편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십시오 시136:1-9  이한규 목사  2016-10-18 445
13700 시편 찬송의 5대 핵심내용 시135:1-21  이한규 목사  2016-10-18 397
13699 시편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 시134:1-3  이한규 목사  2016-10-18 545
13698 마태복음 바다 위를 걷는 믿음 마14:22-27  이한규 목사  2016-10-18 769
13697 시편 형제가 연합하는 삶의 축복 시133:1-3  이한규 목사  2016-10-18 717
13696 누가복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길(2) 눅3:1-6  이한규 목사  2016-10-18 306
13695 시편 복된 가문을 만드는 길 시132:1-18  이한규 목사  2016-10-18 437
13694 누가복음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길 눅3:1-6  이한규 목사  2016-10-18 311
13693 민수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민9:15-23  이한규 목사  2016-10-18 563
13692 시편 하나님을 바라는 삶 시131:1-3  이한규 목사  2016-10-18 571
13691 시편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길 시130:1-8  이한규 목사  2016-10-18 409
13690 느헤미야 리더로서 감화력을 갖추라 느5:10-13  이한규 목사  2016-10-18 213
13689 느헤미야 참된 정의감을 가지라 느5:1-7  이한규 목사  2016-10-18 189
13688 잠언 리더의 축복을 얻는 길 잠12:23-28  이한규 목사  2016-10-18 253
13687 느헤미야 자기변화에 관심을 가지라 느2:1-10  이한규 목사  2016-10-18 487
13686 로마서 의롭다 하신 은혜 롬8:30  강종수 목사  2016-10-16 407
13685 마태복음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서언(2) 마1:1-16  김경형 목사  2016-10-16 177
13684 마태복음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서언(1) 마1:1-16  김경형 목사  2016-10-16 235
13683 이사야 무엇이 보배인가? 사33:1-6  강승호 목사  2016-10-14 583
13682 시편 말씀을 읽읍시다 시119:97-105  강승호 목사  2016-10-13 496
13681 요한복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한태완 목사  2016-10-12 947
13680 욥기 분수에 맞게살자 욥13:1-28  최장환 목사  2016-10-11 712
13679 열왕기하 아픔이 자신을 깨운다 왕하1-28  최장환 목사  2016-10-11 487
13678 마태복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1] 마15:21-28  한태완 목사  2016-10-09 907
13677 갈라디아 아디아포라의 한계 갈5:13  강종수 목사  2016-10-09 526
13676 마가복음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막14:10-16  김경형 목사  2016-10-09 384
13675 마가복음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막14:6-10  김경형 목사  2016-10-09 317
13674 예레미야 진정한 내 모습 렘29:1,4-7  강승호 목사  2016-10-09 408
13673 디모데후 자신을 드린 사람들 딤후2:8-15  강승호 목사  2016-10-08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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