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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다보니까

빌립보서 윤여성 형제............... 조회 수 407 추천 수 0 2015.10.16 12: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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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1:6-14 
설교자 : 윤여성 형제 
참고 : http://www.saegilchurch.or.kr/266518 

세상 살다보니까 (빌립보서 1장 6-14절)

2014년 1월 19일 주일예배

윤여성 형제 (새길교회 교우)

 

세상을 살다보니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재미있는 현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자신을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정작 욕심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욕심쟁이는 스스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고, 진정 욕심이 없는 분은 스스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 참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잣대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욕심쟁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욕심의 수준이 한없이 높기 때문에, 자신의 욕심은 욕심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뻔뻔하게 자신은 욕심이 없다고 합니다. 뻔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주변 사람들만 황당할 뿐이지요. 그러나 정작 욕심이 없는 분은 자신이 생각하는 욕심의 수준이 낮기 때문에 그 잣대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할 때 전혀 욕심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자기 자신은 약간의 욕심만 있어도 욕심이 많음을 한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떤가요? 욕심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까? 어렵지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또 한 예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교통법규를 어기게 되면 벌금을 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금액의 벌금을 내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북유럽의 어느 국가에서처럼 돈을 버는 능력에 따라 차등으로 벌금을 내는 것이 맞을까요? 어느 것이 평등한 것인가요? 어렵죠. 세상을 살다보니까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만 그럴까요. 믿음은 어떤가요? 처음 믿음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 세상과 다른 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도 가고 예배도 시간 맞추어 드리며 가끔 새벽기도도 합니다. 성경도 읽기 시작하고 성경구절도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합니다. 제법 성경의 말씀도 이해하게 되고 교리도 알게 됩니다. 이때 쯤 되면,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믿는 자’가 된 것이지요. 진정 ‘잘 믿는 자’가 된 것으로 착각하여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주장을 강요합니다. 덜 믿는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설을 설파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어설픈 이야기인지도 모르면서, 무식이 용감하다고 떠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열심히 믿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적이 있으시지요. 저를 포함하여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계시던가, 지금 이 상태일겁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상태가 어떤 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바쁘기만 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지요. ‘열심히 하지 마시고, 잘 하세요.’

 

진정 믿는 분은 어떨까요? 자신은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려고 열심히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배려하며 세상을 섬기면서도,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표현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여기며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합니다. 이런 분은, 오늘 본문 6절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라는 말씀처럼 계속 자신을 변혁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부족을 계속 안타깝게 생각하며 계속 주님을 부르짖고 기도합니다. 주변을 섬기며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생색내는 법이 없이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자신은 남을 정죄할 위치에 있지도, 정죄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여 결코 다른 이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습니다. 이 분에게서 말이 아니라 삶의 모습으로, 주변 분들은 예수의 향기를 느끼게 되지요. 그러면 본문 9절에서 11절까지 바울이 말씀한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더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한 것처럼, 이런 믿는 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울이 ‘매일 매일 자신은 죽노라’고 이야기하는 그 뜻을 아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이 ‘자신은 죄수 중에 괴수(즉,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말한 뜻을 이해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진정한 믿는 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할 능력이 주어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해 봅니다.

 

작년 KBS에서 ‘대왕의 꿈’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지요. 기억이 없으시지요. 시청률이 별로였습니다. 전에 같은 내용으로 한동안 대부분의 사람을 TV 폐인으로 만든 드라마가 있습니다.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지요. 기억하시나요? 배우 고현정이 ‘미실’이라는 인물로 나와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지요. 이 드라마를 보면, 사람들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이 나오는데요. ‘유신’이라는 진심을 가진 인물이 나옵니다. 요즘 세상에서 찾기 쉽지 않은 인물입니다. 자신의 이득이나 세상 여론에 끌려 다니지 않고 오직 믿는 바대로, 자신에게 불리해도 그 믿는 바를 끝까지 실천한다는 면에서 믿는 자의 일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이 참 귀하게 여겨지는데, 그 진정성을 가진 인물로 ‘유신’은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비담’은 세상 조류를 잘 이용하며 세상을 잘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서 출세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는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비담도 초기에는 진실한 면이 있었지만, 세상에 휩쓸리면서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오직 자신의 이득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 되어버렸지요. 반기독교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울타리 내에서도 ‘유신’과 같은 인물을 찾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비담’과 같은 인물이 득실 되는 곳이 기독교 울타리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독교를 이끈다는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도 ‘비담’과 같은 인물은 흔합니다. 목사들만 욕할 것이 못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대로 믿으려고 한다는 우리들은 또 어떤지요? ‘유신’과 ‘비담’, 둘 중 누구를 롤 모델로 삼고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머리로는 다 알지만, 우리의 손과 발이 과연 그렇게 움직일 수 있을 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이미 세상에 너무 익숙해져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말로는 ‘유신’을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삶은 ‘비담’을 닮아가고 있지 않은지 걱정이 됩니다. 스스로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유신’처럼 살려면, ‘유신’이 겪는 어처구니없는 모함들을 당해야하고 괴로운 일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구별하고 산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며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왕따 당하기 일쑤이며 세상에 의해 무수히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뿐 아니라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험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길을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까? 사도행전을 통하여 우리는 분명히 알지요. 예수님도 골고다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하나님께 이 잔을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겠습니까? 오늘 본문 12절부터 14절까지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믿는 길로 가려면 고난이 따른다고 알려줍니다. 즉 “형제자매 여러분,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알려주면서, 그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믿음이 전파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골고다의 길로 가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우리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는 다릅니다. 내가 진정 믿기로 했다면,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로 한 예수따르미라면, 나는 그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그 기쁨의 길로 갈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유신’과 ‘비담’ 사이에서 계속 방황하게 됩니다. 아니 둘 중 하나만을 결정해야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내일도 마찬가지로 계속 결정해야 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정을 잘 하기를 바라시면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곁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부분은 그 삶이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할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사실 대부분 고난입니다. 이미 바울선생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지요. 물론 가끔 승리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이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이고, 거짓으로 뭉쳐진 세상은 언제나 승리를 합니다. 언젠가 이일영선생님이 아침 성경공부시간에 어찌하여 세조나 권력자들이 죽어서도 큰 무덤을 차지하고 있는지, 악이 계속 득세하는 세상에 대하여 개탄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세상에 대하여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공정하며 공평하게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상여론에서 밀려나는 소수자로 전락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늘 하나님께 불평불만의 소리를 내뱉습니다. “하나님 ! 아시잖아요.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열심히 공정하게 일했지만, 결국 저를 불공정하고 잘못 행동하는 사람으로 세상은 평가하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왜 하나님은 공평하고 공정한, 공의의 삶을 살라고 하시면서,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칭찬은 고사하고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가십니까? 제가 잘못 살아가는 것입니까? 분명하게 알려주세요. 하나님!” 이런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십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잠들기 십상입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아마도 하나님을 모를 때보다,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나서 훨씬 더 이런 경험이 많으실 겁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저에게 그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문제의 대부분은 저에게 있었다는 것이지요. 제가 공정하게 행한 것은 맞지만, 그것을 행하는 저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민수기 20장에서 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출애굽상황에서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를 비방하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잡고 바위에게 명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실어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이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엄청난 충격적인 발언을 모세에게 합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서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총회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즉 모세처럼, 제 마음 속에 자신의 의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하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뜻이기에,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의로 가득해야하는데 하나님의 의는 온데간데없고 제 자신의 의만 가득 차 있었다는 지적이셨습니다. 물론 모세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측면도 있지요. 믿음이 없는 백성들의 온갖 불평불만을 언제까지 들어주어야 하는 지 짜증도 났겠지요. 또 자신을 비방하는 것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도 났겠지요. 그러나 그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의 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저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아팠고 죄송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자기 자신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있어야하는데 아직도 자기 자신의 겉옷만을 자랑하고 있었던 제 모습이 한심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시장에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거룩한 모습으로 산다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인 것을, 그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진정 죄인의 심정이 되어 기도해야 하는데, 우리가 벌써 그 마음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세상으로 인해 실망했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실망했던 생각과는 달리 처음과 다르게 진행되는 일들의 결말을 보게 됩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훨씬 공의로운 결말을 보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간혹 그 결말이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일어나지 않고 세대를 지나 일어나기도 하기에, 종종 우리들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게 되면 씩 웃으려고 합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바로 잡으시겠지! 아니, 바로 잡으시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인데, 도구가 금도끼면 어떻고 은도끼면 어떻고 쇠도끼면 어떻습니까? 올바르게 사용되기만 하면 되지! ‘왜 저는 금도끼가 아니고 쇠도끼입니까?’ 하는 질문은 우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존경받는 겉옷을 입었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허름한 겉옷을 입었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겉옷을 하나님께서 입게 하셨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올바로 사용되었는가? 아니면 사용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다가 왕따를 당해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을 자신은 ~ ~ 아직 없구요. 약간 불평을 적게 할 자신은 생겼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일인지는 분명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확실하게 배운 것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섭다기보다는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이렇게 되니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고 싫고’를 분명히 표시할 수 있게 되었고, 불필요하게 주변을 신경 쓰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일조차 없어진 것이지요. 이것이 자유함이라고 할까요? 왕따를 당해도 걱정이 없는 이유인 것이지요.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것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자의 태도가 아닐까요?

 

이제 이것을 알게 되었다면,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도 이해되지요. 십자가를 진다는 뜻은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결국 기쁨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다르게 말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예수따르미로 산다면 이 세상에서 당연히 왕따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 아닐까요. 호숫가에 떠있는 백조를 보면 상당히 우아하게 보이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같이 평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새로운 눈을 뜨면 백조가 우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서는 정신없이 갈퀴짓을 하고 있고, 더 눈이 뜨이면 가끔씩 부리를 꼬리깃쪽으로 파묻었다가 온 몸에 바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꼬리깃쪽에 있는 기름샘에서 부리에 기름을 묻혀, 온 몸에 발라서 방수처리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새로운 눈으로 물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볼 수 있다면, 즉 표면적으로는 볼 수 없었던 일들을 보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마치 열왕기하 6장에서, 시리아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을 때 엘리사의 시종은 놀라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를 하여 시종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불 말과 불 수레가 온 언덕에 가득한 것을 보게 합니다. 영의 눈을 뜨기만 하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십자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새롭게 눈을 뜬다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합니다.


한동안 집사람이 복지관에서 할머니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일을 자원봉사 하였는데요, 가끔 가르치고 와서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습니다. 한글과 수학을 배운 할머니가 평생하고 싶었던 일이, 은행에 본인 혼자 가서 돈을 입금하고 찾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신답니다.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배우고, 산수교실에서 숫자의 개념에 눈을 뜬 할머니들이 이제 새로운 세상 속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할머니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할머니들이 은행가는 재미가 솔솔 하다는 이야기를 집사람이 들으면서 기뻤다는 이야기를 해서, 전해 듣는 저도 기뻤습니다.

 

완전하게 눈을 뜨지는 못하여, 아직은 하나님의 뜻을 다 깨닫지는 못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니까 체험하며 얻어지는 생각과 새롭게 알아가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에 참 감사하였습니다.

 

말씀을 끝내면서 퀴즈 하나 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대접받는 복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접할 수 있는 복을 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복을 원하십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의 본 뜻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저에게 손녀가 생기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손녀가 저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나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제가 손녀를 위해 여러 일들을 해주어야하는 관계이지만, 손녀가 있다는 그 존재만으로도 저에게 기쁨이 넘치는 것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된 그 사실, 그 존재만으로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자녀관계를 스스로 끊는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또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영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을 느끼시는 새길공동체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새로운 영의 눈으로

  늘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래서 오직 주님의 자녀임을 기뻐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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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44 마가복음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어라. 막13:28-37  김경형 목사  2016-09-18 382
13643 마가복음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막13:28-33  김경형 목사  2016-09-18 301
13642 전도서 청년의 때에 전12:1-2  강승호 목사  2016-09-17 1077
13641 사무엘상 참 사람을 실천한 요나단 [1] 삼상18:1-4  전원준 목사  2016-09-17 481
13640 누가복음 결산할 때 일어난 일 눅16:1-13  강승호 목사  2016-09-16 582
13639 디모데후 하나님께서 귀히 쓰는 그릇 딤후2:20-23  한태완 목사  2016-09-16 1732
13638 히브리서 죽음을 준비하기 히9:27  한태완 목사  2016-09-14 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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