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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더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29 추천 수 0 2015.04.16 09:4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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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11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설교 

1장 1절-11절.


1절-8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약대 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세례요한은 요단강가에서 소리노릇을 잘 했다. 누구의 소리노릇? 세례요한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소리.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가르쳐 주는 소리다.


그 소리는 요단강 동편에서, 이편에서 즉, 이 세상에서, 죽음의 선을 건너가기 전에 이편에서, 이 현 세상에서 ‘너희들은 예수님을 바로 만나라. 그 분을 만나야 너를 인간으로 만드신 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알 수 있다’ 하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가 아니다. 착각하기를 예수는 서양귀신으로 알지만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다. 그러니까 인간아, 너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다.


그 구원은 어떻게 이뤄지는 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하늘로부터 오신 주님의 말씀대로 네가 만들어지는 게 구원이다.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정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소원 목적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이런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성경기록 자체가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됐는데,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기록케 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너라는 인간이 예수님처럼 닮는 거. 예수님을 닮는 게 하나님을 닮는 거다. 닮으라. 닮는 게 구원이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모두 온전한 사람이 돼야 한다. 하나님의 속 성품을 입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지라고 세상의 모든 역사를 자기 몸 안팎으로 진행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심지어 마귀까지 동원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긴 것처럼 우리도 영능의 실력적으로 이기게 만들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영능의 실력자가 돼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처럼 영원히 누리는 것이 구원이다.


7절, 8절: 세례요한의 말인즉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신다.’ 시간적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왔다. 이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하는 말이 ‘나는 허리를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주님을 높이 올림이고 자기 자신은 낮춘다. 이 말은 주님과 자기와 동격인데 자기를 일부러 낮춰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 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고, 나는 땅에서 난 자다’ 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위치적으로 신분적으로 존귀 가치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가 있듯이 자기를 땅으로 낮춘다는 말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자기는 낮다는 말이다. 일부러 낮춘다가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낮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이 분은 주님이신데, 이 말은 세례요한 자기를 보지 말고 주님께로 마음을 소원 목적을 두라는 말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주님이 세례요한을 주님 앞서 6개월 먼저 출생케 한 것이고, 그리고 세례요한 자신도 주님이 자신을 보내셨다고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교회의 인도자들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종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자기 자랑을 하는 인도자들이 많다. 너무 많다. ‘무슨 대학 나오고, 무슨 신학대학교 나오고, 무슨 대학원 나오고, 외국 가서 어떻게 공부를 하고, 무슨 박사증을 따고, 수십 만 명이 모이는 데서 목회를 한다. 세계적인 부흥강사다’ 하는 이게 다 자기 자랑이요 인간자랑이요 세상자랑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에게도 자랑을 하라고 했다. ‘자랑을 해야 네가 광고가 된다’고 했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거짓 종들이 자기 자랑을 참 많이 한다. 예배당 자랑, 사람숫자 자랑, 유명한 학교 나온 거 자랑, 세계적인 연맹회 회장 자랑, 청소년 부장 자랑.


사실 알고 보면 우리는 세례요한보다 못하다. 세례요한이 보통 신앙사상이 아니다. 주님이 직접 보내신 그 분의 사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를 들면 양복 입고 세단 차 모는 목사님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머리는 대머리이고 약대털옷을 입고 신발은 샌달을 신고 있는 세례요한을 그 목사님 옆에 세워놓는다면 어느 쪽이 주님이 보낸 종이라고 생각을 할까?


세단 차만 타고 다니는 목사님은 얼굴이 검게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으리번쩍하게 하고 다닐 것이고, 반면에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고 있으니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곳이니 피부도 검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과 세례요한을 같이 세워놓고 보면 어느 쪽이 주님이 보낸 종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할까? 누가 주님의 종처럼 보일까?


세상 많은 사람들은 외모 모양을 보고 말을 한다. 세례요한은 모양새로는 볼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음성, 그의 소리, 그 외치는 내용이 주님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주님을 그대로 소개하는 이게 주님의 종이다. 세상을 자랑하면 세상이 보낸 종이다.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세례요한은 오실 분을 소개하기 위해서 지음 받은 존재이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을 보낸 그 분은 창조주요, 세례요한은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분은 구원설계에 의해서 오신 분이신데 즉, 그냥 괜히 마음대로 온 게 아니고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설계한 그 분이 그 설계대로 당신이 오시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설계에 의해서 오시는 분이신데 어느 누가 감히 그 분의 구원설계를 풀겠느냐? 그 분은 신분적으로나 존귀적으로나 가치적으로나 영광적으로나 하늘이다. 그러니 감히 그 분의 신발 끈이라도 어떻게 풀겠느냐?


그 분의 발걸음은 ‘그냥 신발 끈을 푼다’ 그게 아니고 당신의 구원의 설계에 의해서 오셔서 33년을 사시는데, 33년의 그 사심이 하늘의 뜻이 들어있는 수수께끼 같은 당신의 구원의 발걸음인데 누가 그 구원설계를 풀겠느냐? 그래서 그 분의 그 삶을 감당치 못한다는 것이다. 괜히 그 분을 높이려고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리라: 성령세례를 주신다 함은 성도를 지극히 거룩한 구별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지식적으로나 도덕성적으로나 능력성적으로나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과 똑같은 사람으로 너를 만들어 주신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신을 가지고 만들어 주신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의 효력성이다. 우리교회에서는 모두 다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 아무 교회나 가서 유치원 무용하듯이 그게 아니다.


항상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속에 너의 걸음걸이가, 너의 일생이 놓여져 있다. 성경 속에 온 천하 만물 존재가 들어있고, 천지 창조로부터 마지막 시대 끝의 사람까지 사람의 걸음걸이가 이 성경 안에 다 들어있다. 따라서 이 성경을 가까이 할수록, 그 안에서 자기의 걸음걸이를 찾으려 할수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신다.


또한 성경에는 너를 위한 이적기사가 다 들어있다. 이적기사라 하니까 병 낫고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뭔가가 번쩍하는 그게 아니다. 제일 큰 이적기사와 표적은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거, 그 다음에 큰 거는 천하 못된 값어치 없는 저질적이고 지질이도 못한 인간 자기가 하나님을 닮아나간다는 이것이 큰 이적기사다. 이걸 값지게 알아라.


온전한 사람이 되기만 하면 되느니 만큼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동원시키신다. 그러나 아닌 말로 네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악한 자라면 성경에도 있지만 이만만의 군대 즉, 이억의 군대가 너를 잡으려고 사람을 풀어서 토끼몰이 하듯이 너를 에워쌀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못 느낀다. 항상 먹고 마시는 이게 진하게 들어서 그 쪽으로 마음의 저울추가 기울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다.


하나님 다음에 인간 자기인데, 그럼에도 갖는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들어있으니 돼지나 다름이 없다. 짐승과 같다. 한 마디로 에덴동산에서 생명과는 안 먹고 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다 빼앗겼다. 죽음이 왔고 병이 왔고 고통이 왔고 전쟁이 왔고 살인이 왔다. 그런 것처럼 너도 그런 일을 당한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을 때에 소원과 목적성 지향성 추구성 간구성이 바꿔졌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지극히 거룩한 사람으로 인격화 성품화 실상화 자체화 된다. 그게 성령의 사람이다. 성령의 사람이란 맨날 예언 방언하는 게 아니라 그 인격의 질적 수준이 성령의 사람이라. 하나님의 사람이라. 진리지식으로 자기 인격화 되는 것이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쓸모가 있는 거지 이 땅에서 예언 방언해봐야 천국에 가면 자기 안수 받을 사람도 없고 천국에는 병자도 없다.


주님이 이 세상에서 귀신 내어 쫓고 병자 고치는 것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 가지고 내어 쫓더라. 그런데 오늘날 거짓된 사람들은 손만 닿으면 어떻게 된다고 한다.


성령 달라고 금식기도 안 해도, 성령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세례만 바로 받았다면 성령의 세례를 주고 싶은 것이 주님의 소원이시다. 성령의 세례가 뭐냐? 성령으로 왜 씻느냐? 거룩한 존귀적인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다.



9절-11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세례의 뜻을 잘 알고 또 그 정신으로 세례를 받았다면 오늘날 자기 신앙이 이렇게 되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안 가르쳐 주고 모르니 자기의 신앙이 그 정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을 때 누가 오셨다고 하느냐?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셨다. 나사렛은 시골 조그마한 동리다. 이곳에 몇 사람이나 살까? 면 단위면 몇 명이 사느냐? 3천 명? 그 다음에 시 단위는? 5만 명? 그러면 직할시는? 100만 명 이상? 특별시는? 그러니 조그마한 나사렛 고을에 몇 명이나 살까?


예루살렘에는 성전도 있고 제사장도 있고 이름 있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많다. 그들이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 라고 한다. 말하자면 하도 작은 동리이니까 ‘그런 곳에서 선지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 할 정도로 무시 받고 천대 받고 알아주지 않는 아주 작은 동네에서 사셨다. 하지만 성령으로 나신 분이 그 곳에서 자랐고,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 그 곳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몇 집이 안 돼도 질적으로 보면 무시 못할 동리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 즉, 말씀의 떡집에서 태어났다. 말씀의 떡집에서 홀이 난다. 이곳에서 왕통계통이 나는 거다. 이곳에서 지도자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옳은 말씀에는 약속이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교회나 못 들어가는 것이다. 잘못 들어갔으면 나오는 거다.


그러면 자라기는 어디서 자랐느냐? 나사렛에서 자랐는데, 이 나사렛은 번화가가 아니다. 아주 조용한 곳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릴 때 그곳에서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정서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옛말에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하는 그런 사상하고는 정 반대다.


예수님도 사람인지라 어릴 때부터 정서적 면에서 다른 것이 물들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이 물 저 물 별스런 물을 어린아이들 머릿속에 집어 넣어준다.


예루살렘에서 사는 성경을 안다고 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몇이나 있을까? 어떤 분이 하늘로부터 오셨고, 어느 동네로 오시고, 어느 동네로 나시고, 길리움을 받을 때는 어디로 가고 하는 이걸 아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 나사렛의 뜻은 거룩이다. 그곳에서 자라셨다는 것은 거룩하게 교육을 시켜서 자라게 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가 있다.


요한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는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요한이다. 계시적으로 보면 뼈는 뼈대로 골라내고, 창자는 창자대로 골라내고, 살은 살대로 골라내듯이 성경에도 말하자면 구석구석마다 보화가 박혀있는 걸 끄집어낸다.


세례요한은 그 신앙정신이 예루살렘에서 살지 않고 광야에서 사는데, 성령으로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도 없으신 이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 멀리서 오셔서 인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까? 그건 순전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깨닫게 해 주시려고 그 멀리서 오신 것이다. 가까이 있어도 세례를 안 받으려고 다른 교회로 도망을 가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멀리서 세례를 받으러 왔다.


세례는 첫째,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와서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아라. 죄를 자복하라는 것은 천주교의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 앞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 받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서 사느냐?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광야에서 산다고 하는 건 비록 도시에 살지라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은 광야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전하느냐? 자기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전파한다. 그게 소리노릇이다. 인간자랑은 없다.

광야의 신앙사상을 가진 자가 누구의 일을 한다? 세례요한의 일을 한다. 그에게서 세례를 받아라. 그런데 소원 목적이 세상으로 들어가 있는 목사가 많은데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런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러니 질이 정신이 근본적으로 틀려져 나간다.


광야사상을 가진 그에게 세례를 받아야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다. 그러면 만난 그 예수는 반드시 나를 위해서 사신다. 내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사신다. 내 구원을 위해서 사신 주님의 그 삶 속에서 자기의 구원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자기가 예수처럼 행세하려는 건 마귀 짓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살아야 함을 당신의 삶으로 그 증거를 보여주셨다.


많은 교인들이 세례의 참 뜻을 몰라서 이상한 교회에서 이상한 목사한테 의식세례 물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걸 나쁘게 말하면 자기 패거리 만들려고 세례를 주는 것이다. ‘나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너는 도망가면 안 된다’ 이런 거.


의식적으로 받는 세례라 할지라도 세례를 받을 때는 그 안에 정신이 들어있는 것인데 오늘날 그걸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곳에서 물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성령세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원 같은데 가서 밥이나 굶고 신체적으로 이상한 체험을 하는 걸 성령세례요 성령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성령을 달라고 떠들고 있는 그 자체가 성령세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이 15년 이상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알고 진리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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