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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내의 머리(?)

에배소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69 추천 수 0 2019.05.05 08: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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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5:22-3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8.20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남편은 아내의 머리(?)
엡5:22-33


예수와 바울, 그리고 초대 교회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간 복음의 전통은 로마 제국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앞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이런 고난의 현장에서 그들이 세운 그들의 자의식은 [나그네]였습니다. 그리고 나그네 접대를 기독교인의 근본 태도로 실천한 것이 그들이 이룩한 복음의 진수였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복잡한 상황에 대응하면서 평등한 공동체와 우정과 환대의 전통은 훼손되기 시작했죠. 오늘은 그러한 변질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복음의 진수에 대해서 생각을 일깨워 보려고 합니다. 


1세기 초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갈릴리 땅에서 청년 예수가 비범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공동체와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이 전망은 초대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산 위의 등불처럼 빛났습니다. 신약 성서의 여러 문서, 특히 바울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편지는 예수가 제시한 이상을 각 도시의 공동체들이 어떻게 실천해 가려고 노력했는지 보여줍니다. 여러 편지를 보면 로마 제국의 각 도시들에서 초기 교회의 형태는 ‘가정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세기 말에 쓰인 사도행전에도 잘 나타납니다(행1:13, 2:46, 5:42, 12:12). 가장이 믿으면 온 집안이 함께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면 온 식구가 저절로 교회에 나가는 풍토가 있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지요.


그런데 교회의 기본 단위가 가정이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예배장소나 모이는 인원의 의미를 지나서, ‘가정교회’였다는 말은 교회의 조직이 ‘가정 조직’즉, 아버지를 위시해서, 어머니, 자녀, 이렇게 고구마 줄기처럼 위계로 엮어지는 가정의 위계가 그대로 교회조직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부장제, 남성중심, 권위주의가 된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입니다. 교회와 가정이 양방향으로 서로 영행을 주고받은 것입니다. 가정생활에는 교회의 윤리적 지침이 적용되고, 교회의 조직은 가부장주의 현상이 생겨난 거죠. 이는 교회가 예수의 복음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본질적 문제와 함께  제도, 조직, 위계와 같은 비본질적인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초기 교회의 형태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가정은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과 같은 가정은 아닙니다. 당시의 가정은 혈연은 물론, 노예, 사업적 동업자나 후원자인 친구(amicia)까지 모두 가족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영어로 ‘패밀리 family’라고 하잖아요? 이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는 ‘파무루스 famulus’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가내 노예’입니다. 그만큼 가정 혹은 가족의 범주가 지금과는 달리 아주 광범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가장, 여주인, 자녀, 노예, 소작인을 두루 망라한 집단이 가정이고, 계급적으로도 다양했습니다.


처음에 생긴 교회는 가정의 이런 위계질서를 교회가 금방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해체된 가정을 복원하는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전통적인 위계의 가족이 아닌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선언했습니다(마8:21-22, 10:37, 19:12, 눅9:59-60, 12:49-53, 14:26). 바울의 갈라디아 3:29에서도(세례 고백문)위계질서는 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망하고 난 1세기 말 이후에 생겨난 교회들에서는 바울의 이런 교회이해가 사회와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베드로 전서 등에는 여성과 노예의 자유를 다시 제약하는 선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바울의 기독교정신이 후퇴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근본을 잃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유분방한 것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고전 11:2-16절, 바울의 친서에도 유일하게 남성중심의 위계질서가 등장합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 남자의 머리를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위계질서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게 진짜 바울이 썼느냐 누가 슬쩍 기워 넣었느냐를 말하지만, 어떻든 교회가 교회 안에 남.녀 평등문제에 대해서 불편해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걸 무질서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2:13절에서도 바울은 남자나 여자가 하나라는 복음의 자유정신이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친서에서 이 문제를 거론할 때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위계의 복음을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이런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복음이 지닌 진실’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상황들을 끄집어들이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바울이 나서서 애초 기독교 정신이 된 평등과 자유를 훼손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과 상황의 상호 도전과 응전 속에서 결코 가부장적 상황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고전11:11을 보면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없다”고 말합니다. 평등하다는 것이죠.


이러다가 바울의 후기 편지(바울이 직접 쓰지 않은)인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등에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자주 바울의 친서와 친서가 아닌 성경을 동일하게 읽고 해석하기 때문에 성서의 모순과 충돌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이 후서에 가면 복음의 해방 선포에 근거하여 교회 내 남.여의 문제에 응답하지 않고, 일반적인 가정의 규율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로 치면 유교의 전통적인 남녀, 상하 관계의 규정을 교회의 지침으로 세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가정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국가, 나아가서는 우주의 기본 단위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윤리적인 지침을 내립니다. 이런 전통은 기본적으로 가정 내의 위계질서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가정 내 규율이라는 문제는 1세기 사회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그때의 유명한 철학자치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이는 없습니다. 따라서 골로새서나 에베소서, 목회서신(딤전.후, 디도서)에 나타나는 기독교적인 가정 규율은 이런 사회상황을 반영한 까닭입니다. 이런 후기 서신들에서는 바울이 그토록 치열하게 유지하려고 했던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지켜내려는 치열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결혼주례사를 들을 때 가장 많이 듣는 성경본문이 오늘 우리가 읽은 곳입니다. 이는 가정 내의 세 가지 문제 즉, 부부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다룹니다. 그 중에 가장 비중을 크게 둔 관계가 부부관계죠. 여기서는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견줍니다.


5:23-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듯 남편은 여자의 머리다.
5:22-그러므로 여자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
5:25-28-남편들은 대신 여자를 어여삐 봐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겁니다. 이는 아내 즉 여자는 마치 남편의 몸과도 같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제 몸인 것이죠. 남편은 그리스도의 위치에 아내는 교회의 위치에 두고, 그때 요구되는 윤리적인 덕목은 남자는 ‘사랑과 돌봄’을 여자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역할이 남편과 아내에게로 이전이 된 것이죠.


그러나 정말로 남편이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게 평등하려면 남자에게도 동일하게 ‘순종’이 규정되어야 하고, 아내에게도 동일하게 ‘사랑과 돌봄’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미 그 윤리규정 자체가 불평등한 것입니다. 세상의 불평등한 관계를 기독교근본정신에 대 보지도 않고 그대로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 온 것이지요.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쓰는 것이고요.  

   

주보에 실린 그림 한 점을 보아주세요. 제목이 <예수와 함께하는 남자, 시중 드는 여자>입니다. 남자들은 예수님과 만찬을 하고, 여성은 식탁 밑에서 음식을 시중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요? 남녀 차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 하면서, 초기 기독교의 근본정신과 건강성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여성은 변두리로 쫓겨나게 되고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인간 남녀 사이의 관계와 어색하게 비교한 이 시도는 복음의 해방 전통을 주도면밀하게 변경한 것입니다. 사실 일반 교우들이 이런 통합적인 이해를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잘 구분하여 그 연원과 발전과정을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편리한대로 붙이고 떼면서 성서를 제 유익에 쓰는 사적인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지요.


에베소의 기록자는 그가 직면한 사회적인 상황에서 신앙의 전통과 근본정신보다는 두려움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구원을 곧 완성하고, 인간 사회의 구조를 심판하시라는 바울의 종말론적 기대는 포기되고, 대신 교회를 사회 안에 한 기관이나 단체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서, 그리스도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에베소서의 저자에게서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관심이, 로마 제국의 존경 받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관심 뒷전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종말론적인 구원 선포가 남녀 차별적이고 계급 차별적인 상황에 먹혀 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먹히기 시작한 것이지요,  


복음과 상황의 긴장관계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여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 신앙을 갖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성서를 탐독한다는 것은 바로 기독교의 근본정신의 실천이었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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