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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창세기 궁극이............... 조회 수 326 추천 수 0 2019.08.01 15:4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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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6:-7: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토요 성경공부 

(창세기 槪觀)

 

성경의 역사는 뜻을 말하고자 함인데 설교를 할 때 성경의 표면만 말을 하고 뜻을, 계시를 말하지 않으면 외식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을 닮게 하려는 것이고, 그래서 성경에 있는 표면적인 사건 환경 일 등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가 비유요 비사인데, 성경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온전과 관계없는 일 사건 등 표면만 말을 하게 되면 이는 외모를 취하는 거다.

 

신앙이 이런 식이 되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그 지식은 선악과 따먹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중심 사상은 죄 아래 그대로 있는 거다. 이러면 얻어맞는다. 이런 신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생활의 형편이 나아지면 걱정 근심이 없는 것 같으나 형편이 어려워지면 걱정 근심이 엄습하는 거다. 이렇게 되면 걱정 근심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할 거고, 또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게 새벽기도니 금식기도니 하겠지만 진리본질을 모르는 상태로 맨날 빙빙 돌 뿐이지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 없는 거다.

 

그리고 이런 신앙은 자기에게 고통이 왔을 때 미래적으로 잘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고통을 참겠지만 현재 자기가 지혜로써 그 고통을 이기고 나가는 게 없다. 싸우고 승리하는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기고 찬송하는 것도 없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

 

세상살이는 쉼 없이 사건 환경이 겹겹이 치고 들어오고 있고, 나이 들어갈수록 육체의 힘은 점점 퇴색되는 건데, 이런 식의 신앙을 가지고 살면 점점 크게 다가오는 자기 몸의 고통을 어떻게 이길 거냐? 안 아프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며 이 목적으로 살다가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뿐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믿어나가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어야 하겠는데, 이 평안은 이기고 다스리고 하는 데서 되는 건데 진리본질의 신앙이치를 모르면 못 이기는 거다. 그러니 참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거다.

 

본문.

 

6-7.

 

6.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글자 그대로 보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전에는 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거냐? 사람이 번성하기 전에는 땅 위에 남자들만 번성이 되었고 여자들은 없었다는 거냐? 그렇다면 당시에 어린 남자들도 있었을 텐데 이들이 어디에서 난 거냐? 하늘에서 떨어진 거냐, 땅에서 솟은 거냐?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할 때 딸들이 났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면 이런 식으로 나가기 쉽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을 하니 타락적 인간중심에서 여러 가지 모양이나 형태가 많이 나오는데, 건축물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각자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편리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어서 사는데, 믿는 사람들도 그 목적과 사상으로 살았다는 거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의 사상으로 말하면 이마에, 즉 정신과 사상에 세상정신의 도장을 받고, 손에, 즉 세상적인 사역을 한다 그 말이다. 그리고 그 면의 사역을 열심히 하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거다. 그러나 이것에 살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대로 성장이 되는 것은 없다.

 

지금도 자기는 옳게 신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는 그 때의 믿는 사람들처럼 표면, 껍데기가 잘 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이면적인 것에 목적을 두다보니 껍데기가 자동적으로 커지는 게 아니라 자기의 삶의 목적을 표면, 껍데기에 둔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그 말이다. 성경은 사람의 정신과 사상을 보게 하고 가르쳐 주는데 껍데기를 추구하는 정신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사람의 마음은 못 보고 외모 외형만 보고 판단을 하기 때문에 마음의 고통으로 지옥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거다. 한 마디로 죄악 가운데 그대로 사는 거다. 참 딱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때는 영능의 실력대로 신령천국을 상속받을 자라는 것이 전제가 된 말이다. 그리고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그러니까 물질세계의 발전 발달을 목적으로 살면서 이런 눈에 보이는 것이 몇 가지이던 다 자기의 아내로 삼는, 즉 자기의 기쁨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의 남편이 몇 명이었느냐? 여섯 명이다. 여섯 명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은 다 가졌다는 의미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자기는 소원 목적성이 몇 가지냐? ‘세상 것이 뭣도 잘 됐으면 좋겠다. 뭣도 잘 됐으면 좋겠다하는 게 있지 않느냐? 이게 다 자기의 남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이룰구원을 위해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금방 있는 것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나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신다. 우리의 주위가 전부 그렇다. 자기가 사는 지역, 동네, 직장, 교회 등 전부가 변화되고 변질되고 변모되는 거다. 불신세계를 보면 이런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 껍데기를 따라가다가 자기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냐? 그런데 세상을 따라가는 성도들도 이런 일들을 눈으로 보면서도 세상 것을 자꾸 하나님처럼 따라간다. 이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만든 목적관에서 볼 때 헛 사는 거다.

 

영적 사상, 마음의 움직임, 소원 목적은 눈에 안 보인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어떤 존재와 사건 환경이라도 알고 보면 네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 너는 어느 이해타산을 따지느냐?’ 하는 것을 나에게 묻는 거다. 성경을 보면서 세상에 빠진 자기의 정신과 사상을 발견한다면 깜작 놀라게 된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육체가 된 그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떠난다. 그러면서 그들의 날은 120년 되리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현재 사람들이 120년을 살지 못하니까 예수 믿는 나 역시도 육체로 살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120년을 살지 못할 것이니 육체로 살아도 괜찮은 게 아니냐?

 

육체가 되었다고 했는데, ‘육체가 되었다고 하는 것과, ‘육체는 다른 거다. ‘육체란 신체, 몸을 말하는 거고, ‘육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영육 결합체인 인간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땅에 속한 소원 목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요한1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육체가 오늘의 본문 3절에서 나오는 육체와 같은 거냐? 글자가 같고 말도 같기 때문에 똑같은 거냐?

 

요한1서의 육체는 몸, 신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중심이 이방 불신자들처럼 육체를 소원 목적하며 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하신 눈에 보이는 모든 사역들은 성도들에게 정신 사상적으로 하늘에 속한 정신과 사상을 가르쳐 주는 구원목적의 사역들인데 이것은 모른 채 예수님께서 하신 눈에 보이는 일들을 따라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주장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하는 거다.

 

오늘날 세상에 속한 교회는 신앙심을 자꾸 세상물질에 붙인다. 그래서 세상축복, 물질축복을 부르짖는다. 만일 예수님께서도 이 사상을 가지고 살았다면 육체로 산 거다. 이건 죄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의 소원 목적이 아닌 세상소원 목적으로 사셨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이것을 따라가는 자들은 전부가 거짓 것들이요, 적그리스도 사상이 농후한 거다. 한 마디로 세상축복운운하는 자들은 이단자들이고, 거짓 것들이고, 적그리스도라는 거다. 이렇게 되니 이런 사람들에게서 뭐가 떠나더라? 하나님의 신이, 즉 성령이 떠나더라.

 

그러면 성경에 세상 마지막 때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한다는 거냐, 떠났다는 거냐? 떠났다는 거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성령님께서 떠나고, 어떤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면 안 떠나는 것인지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자기에게 하나님의 신이 계신다면 자기가 어떤 식으로 살겠느냐? 눈알 뒤집고, 예언 방언하고 그러는 거냐? 하나님의 소원 목적관을 바로 가지게 되면 사람이 규모가 반듯하고 정결해진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라고 했는데, 우리의 수명이 120년이 아닌 12년이 될 수도 있는 거냐? 이건 하나님의 내정수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언제까지 산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거다. 베드로가 요한을 두고 예수님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남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라라고 하셨다. 자기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남 간섭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거다. 그런데 네가 할 일이나 바로 하라는 예수님의 말을 이상하게 들어서 저 사람은 영원히 안 죽는다라고 말씀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5장에서 보면 개인마다 자기의 자연수명을 다하고 죽었는데, 7장에서 보면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홍수심판으로 한 날에 다 죽어버렸느냐? 뭐가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람들이. 이걸 보면서 우리가 죽을 때 각 개인이 내가 먼저 간다. 나중에 천국에 오너라라고 하면서 따로 죽는 게 좋겠느냐, 아니면 한 날에 무더기로 죽는 게 좋겠느냐? 한 날에 함께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은 건데, 이 안에는 아이고 어른이고 남녀노소가 다 들어있다.

 

4: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아무리 영웅호걸 열사라고 해도 그들의 날은 120년이다. 그러면 이들이 한 날 한 날을 지내면서 하루하루 줄어지는 이 땅에서의 날을 생각하면 죽을 날이 정해져 있으니 마음대로 살자라고 했을까, 아니면 노아가 있는 쪽으로 가서 방주 짓는 것을 거들었을까? 지금의 여러분들이 노아 때 살았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전도를 하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전도하는 내용은 나와 같이 방주를 짓자라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믿음의 방주를 짓자는 거다 그런데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이 안 들어먹었다. 그러면 노아의 식구들은 어떠했느냐? 식구들이 노아의 마음과 같을까? 같이 방주를 짓더라도 마음과 정신이 노아와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그러면 믿음의 방주는 어디서 짓는 거냐? 목공소에서 짓는 거냐? 조선소에서 짓는 거냐?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항상 악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너는 생각을 해도 왜 맨날 그런 식으로만 생각을 하느냐?’ 이런 게 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 악하지 않은 날이 없는 사람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 편에서는 좋은 생각, 아름다운 생각을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항상 악하다는 거다.

 

뭘 두고 하는 말이냐? 믿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좋다. 나쁘다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항상 악하다는 건데, 쉽게 말하면 이방인들이 볼 때 생명과가 좋으냐, 선악과가 좋으냐? 항상 선악과가 보기 좋다. 그러니 항상 악한 거다. 그리고 예수를 믿을지라도 기본구원은 전제를 하고 이룰구원 면에서 예수 믿는 기준적 사상이 항상 일반개념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항상 악한 거다. 이건 맨날 살 궁리를 한다는 게 맨날 죽을 짓만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매 맞을 짓만 계속 하고 있는 거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만 현재 이방인들이 들을 때는 어떤 말로 들리느냐? ‘사람이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사느냐?’ 라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자가 지금까지 안 믿는 세상정신으로 살면서 마음이 편하냐? 그렇지도 않다. 그럼 이게 뭘 증명하는 거냐? 자기가 악하게 살았다는 증거다.

 

6-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모든 인생이 항상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시는 거다. 특수은총이 없는 판에 자연은총이 어디 있겠느냐? 그래서 다 쓸어버리는 거다.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기에 방주를 이렇게 지어라. 저렇게 지어라라고 가르쳐 주셨을까? 평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제 마음에 좋은 대로 취해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노아의 마음이 상당히 상했다. 이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방주를 짓는 것을, 즉 구원의 법을 가르쳐 주신 거다.

 

여러분들도 전에 다른 교회에 다닐 때 교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저건 아닌데하면서 마음이 상한 일이 있을 거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다 아신다. 이런 마음이 어떤 사람은 약하고 어떤 사람은 강한데, 약할수록 잘못된 교회에 더 오래 붙어있게 되는 거다. 목욕탕의 물이 뜨거우면 슬슬 기어 나와야 하느냐, 펄쩍 뛰어서 나와야 하느냐? 빨리 튀어나오지 않으면 자기만 고통이다. 믿음의 도수에도 이런 게 있는 것이니, 다른 사람이 볼 때 분명히 그곳에 붙어있으면 안 되는데 여전히 그곳에 붙어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곳에서 재빨리 나오는 사람이 있다. 자기의 느낌에 따라 이렇게 된다.

 

그런데 아예 잘못된 쪽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이 웬만하면 그걸 알지만 진리와 비슷하면 구별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잘 모른다. 이렇게 되면 칼이 무디면 무를 자를 때 짝 잘라지는 게 아니라 뭉그러져 버리듯이 여기도 옳겠거니하며 그곳에 그냥 뭉개고 있게 된다. 이스라엘이 있는 곳과 애굽이 있는 곳이 밤과 낮이 분명히 갈라졌듯이 우리는 진리 면에 흑백이 명확해야 한다.

 

또 이런 면도 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갈 때 사건적으로 애굽의 군대들이 이스라엘을 잡아서 애굽 쪽으로 데리고 가려고 쫓아오고 있는 건데, 이것을 단순하게 보면 이스라엘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걸 호응적인 면으로 보면 죽이려고만 쫓아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고 잘 되게 해 주겠다는 식으로 따라오는 경우도 있는 거다.

 

이렇게 따라오면 어떻게 되느냐? 애굽의 군대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우리가 따라가면서 보호해 줄께라고 할 때 이걸 받아들이면 어떻게 되느냐? 쫓아와서 막 죽이는 게 아니라 호응적으로 이스라엘을 보호해 주겠다고 하는 것에 이스라엘이 마음을 빼앗기면 광야로 나왔어도 그 마음이 어디로 자꾸 가게 되느냐? 애굽으로 사상이 자꾸 물들어져 가는 거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믿음성의 성질은 다 죽는 거다. 이걸 잘 봐라. 이스라엘의 보호는 하나님의 이적과 기사 속에 있는 거지 애굽군대의 손에 있는 게 아니다.

 

12-14: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땅이 패괴하였으니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이제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즉 너의 구원을 위한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구원을 위한 믿음의 방주를 물샐틈없이 한 이치 한 이치 잘 지으라는 거다.

 

15-16: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방주의 규격을 다 알려줬다.

 

17: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니까 노아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믿음의 방주 안에 들어있는 거다. 우리로 말하면 내가 세상 안에 살고 있지만 예수 안에서 산다 그 말이다. 이렇게 되면 홍수가 노아를 해치지 못한 것처럼 세상이 나를 해치지 못한다. 왜냐? 예수 안에 있으니까. 이 사상은 신양사상과 통하는 거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어떤 바람에 상처를 입고 있다면 그 부분만큼은 예수 안에 있지 않다는 걸 말하는 거다. 예수 안에 있으면 감옥이 자기를 해치겠느냐? 예수 안에 있으면 미사일이 자기를 해치겠느냐? 이건 보호가 안 될 것 같으냐?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어디에 들어가서도 살아나왔느냐? 풀무불은 불이고 미사일은 불이 아니냐? 미사일도 역시 불이다. 핵폭탄은 불이 아니냐? 역시 불이다. 이름만 달랐다 뿐이지 풀무불이나 미사일 불이나 열기는 똑같은 거다. 그러면 이 불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이 만드셨다.

 

번갯불이 더 강하냐, 핵폭탄이 더 강하냐? 어느 게 더 강하건 다 하나님이 만드신 건데, 당신이 만들어 놓은 불에 하나님이 타서 죽겠느냐? 이치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있다면 내가 핵폭탄에 타서 죽겠느냐, 안 죽겠느냐? 그럼에도 믿는 사람이 왜 하나님의 주권을 안 믿느냐? 안 믿는 이게 불신이다.

 

한 나라의 사람들이 누구의 명령에 움직이느냐? 표면적으로 보면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움직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지도자를 죽여 버리든지, 역병이 돌게 한다든지, 아니면 이웃끼리 우리 잘 해 보자하고서 같이 무슨 일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게 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까 사람은 큰 소리 치면 안 된다.

 

:의 일곱 대접재앙을 보면 그 안에 전쟁도 들어있다. 유브라데 강이 나오는데 이 유브라데 강은 경계의 강인데 이게 말라버렸으니 경계가 없어진 거다. 그러니 각 왕들이 다 넘어온다. 이걸 계시적으로 보면 지금 교회들이 영적인 면에서 경계가 없다. 진리생명의 경계가 없다. 그러니 각 교회마다 온갖 잡된 귀신들이 판을 치고 있다.

 

개구리 영들이 어디서 나오느냐? 용의 입에서 나온다. 용은 마귀고 뱀이고 다 들어있다. 이건 목사님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상을 말한다. 그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재앙 받을 소리만 나온다.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한 이 말씀 속에 이게 다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 이방 불신세상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에 짐승이 나오는데, 이 짐승의 대가리가 일곱 개이고 뿔이 열 개다. 일곱 머리에 뿔이 하나씩 났다면 뿔이 세 개가 남는다. 이 세 개는 누가 둘러쓰고 앉아있는 거냐? 머리란 각 교회의 왕들을 말하는데, 이는 곧 주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이 목사는 이걸 잘 하고, 저 목사는 저걸 잘 하니 각자 잘 하는 그 면을 가지고 구원도 아닌 세상에 속한, 짐승에 속한, 거듭나지도 못하는 일을 서로가 막 하는 거다.

 

그 다음에 면류관이 열 개다. 면류관이란 일곱 왕들, 즉 머리들이 세상이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세상성질의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이걸 면류관이라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뿔이 열 개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어떤 권세로 인해서 존귀 영광을 얻는 정신 사상이 면류관이다.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의 성질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거다. 모르면 모르는 거다.

 

18-22: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 노력 것 해서 아름다운 것, 강한 것, 최고의 세상 것을 다 가졌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것이 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노아의 것이 돼버렸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자에게 다 맡겨버렸다. ‘네가 주인이 되어라이게 들어있는 거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순종하며 사는 자가 주인이 된다.

 

노아 때의 인류 제 1차적 종말은 마지막 시대의 종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다. 현재에 살면서 이걸 볼 줄 모르면 대접재앙에 그냥 쏠리는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첫째 대접이 사람에게 쏟아졌는데, 영적으로 보면 지금의 우리에게도 이 재앙이 쏟아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게 겉으로 확 튀어나오는 걸 말한다. 이게 종기다. 재앙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자기를 살펴야 한다. 자기를 살피지 못하면 사건 환경에서, 인인관계에서 치고 받고 충돌 마찰을 일으킨다. 이게 다 저주다.

 

7.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보실까? 하나님께서 너는 바닷가 섬으로 가거라하면 그곳으로 가겠느냐, 아니면 거기에 가서 내가 어떻게 먹고 삽니까?’ 라고 하겠느냐? 우리가 믿음으로 이런 명령을 눈치를 못 차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겠느냐? 그 자리에서 사건을 일으켜서 타작을 하신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쫓겨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나를 살리려고 이렇게 하실 수도 있다.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을 찾고 의롭게 사는 노아의 마음을 보신 거다. 여러분들도 이런 마음이 있지 않느냐?

 

2-3: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각 짐승들이 노아에게 와야 보호가 되는 거다. 즉 모든 짐승이 의인에게로 와야 의인으로 인해서 보호가 되는구나.

 

4-6: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의인 노아에게 심판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셨고, 노아는 그대로 행했다. 그리고 노아가 600세 때 홍수가 나는데, 왜 하필이면 600세 때냐? 하기야 ‘500세 되던 때라고 하면 사람들은 왜 하필이면 500세냐?’ 라고 하며 궁금해 할 거다. 600세 때 홍수가 났을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한 세상이 악으로 가득 찬 게 노아가 600세가 된 때다. 그러니까 노아의 나이로 볼 때 인생 끝머리에 심판이 왔듯이 마지막 세상을 심판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신앙준비를 할 수 있는 기간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내가 죽을 때 나의 자녀들에게 준비된 게 뭐냐? 내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기고 나올 수 있는 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7-9: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하나님께서 명한 대로 다 준행을 했고,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 정신 사상이 방주의 정신 안으로 들어갔다는 거다.

 

10-12: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 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방주로 다 들어간 지 7일 후에 홍수가 났다. 이때가 노아가 600세에 된 그 해 이월 십칠일로서, 하늘의 창들이 열리고 땅에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 그러니까 40일 동안을 하늘에서는 빗물을 퍼부었고 땅에서는 수도관이 터진 것처럼 물들이 솟아올랐다.

 

하늘에 있는 많은 구름이 다 빗물인데 이 빗물을 한꺼번에 땅에 쏟아 붓는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있겠느냐? 집도 다 부서질 거다. 그리고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난다면 눈으로 되어서 퍼부을 것이니 어떻게 되겠느냐?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 보기 좋은 세상이 되지만 이 눈이 우박으로 되어서 덩어리로 내려오면 어떻게 되겠느냐?

 

13-16: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 곧 각양의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모든 게 방주로 들어간 후에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노아가 문을 안에서 닫았다고 한다면 어떤 뜻이 되느냐?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뜻이 되고, 또 한 편으로는 안에서 닫았으니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뜻도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문을 닫았고 했는데, 하나님이 밖에서 닫았을까, 안에서 닫았을까? 밖에서 닫을 때는 밖으로 나오지 말아라. 나오면 너는 죽는다이런 뜻이다.

 

17-24: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일백 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우리가 지금 이 성경을 읽으면서 제 삼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건데,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이 방주가 물 위에 떠야 하느냐, 산에 그대로 있어야 하느냐? 떠야 한다. 방주는 떠야지 산에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 원리가 그렇다. 방주는 물 위로 높이 뜰수록 좋은 거다. 무슨 말이냐? 자랑스럽다 그 말이다. 높이 뜰수록 자랑스럽다. 이왕이면 파도 꼭대기에 배가 올려지면 얼마나 더 자랑스러울까? 이게 다 신앙정신을 말하는 거다.

 

땅 위의 모든 생물들이 죽을 때 방주 밖에 있던 악한 자들이 물을 먹으면서 노아의 방주가 뜨는 것을 보고 부러웠을까, 괘씸했을까, 후회 막급했을까? 물이 계속 차오르면서 방주가 계속 물 위로 떠 올라갈 때 방주 밖에 있던 악한 자들이 방주로 다가와서 얼마나 문을 두드렸을까? 두드리다 두드리다 안 열어주면 어떤 악담이 나올까?

 

그리고 방주 밖에 있는 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믿는 자들도 있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노아가 120년 동안 전도를 할 때 진작 그 말을 들었으면 좋을 걸하면서 후회를 했을까, 아니면 숨을 거두면서 하나님께 욕을 하며 죽었을까? 회개를 했을 것 같으냐? 아니다. 그들은 회개가 안 된다. 엄밀히 말해서 회개를 해 봐야 이미 늦었다. ‘회개를 하고 죽는다이게 아니라 이미 늦었다.

 

그런데 노아 며느리의 부모들은 왜 안 왔을까? 며느리가 고아였나? 부모와 형제가 있었을 텐데 이들도 노아의 말을 안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일가친척이라고 해서 복음을 잘 받는 게 아니다. 이 홍수심판이 끝난 후에 이 세상은 누구의 것이 되었느냐? 노아가 세상의 주인이 되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해가 뜨고 지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장난하느라고 하시는 거냐?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원하시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걸 우습게 여긴다. 엄마가 아이들만 집에 두고 나왔다가 렌지의 가스 불을 끄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해서 렌지의 밸브를 잠그라고 하니까 노아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처럼 전화를 받는 아이가 농담하네하고서 밸브를 잠그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가 농담으로 여길 게 있고, 안 여길 게 있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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