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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로마서 이한규 목사............... 조회 수 1726 추천 수 0 2014.06.15 23:05:13
.........
성경본문 : 롬14:13-18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로마서 14장 13-18절

< 판단을 싫어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판단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면 안됩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고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의 얘기입니다. 어느 날 밤, 한 젊은 성도가 기도회가 끝난 후에 교회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잔뜩 화가 나 있었습니다. 이미 몇 사람들에게는 왜 자신이 그토록 화를 내는지 말한 상태였습니다. 다른 성도들은 그의 말을 듣고도 그냥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그도 떠나기를 바라면서 본당의 불을 전부 껐습니다. 목사님은 왜 그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에 관해서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문으로 갔습니다. 문 옆에서 그가 기다리는 것을 보고 목사님은 옆으로 살짝 비켜섰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목사님을 덮칠 듯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교회 성도 중 몇 사람이 얼마나 좋지 못한 행동을 했는지 목사님에게 막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기도할 때 네 사람이 눈을 뜨고 여기 저기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그 사람 중의 한 사람은 교회 운영위원회의 위원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기 저기 훔쳐보니까 성령의 역사가 방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저는 눈을 뜨고 기도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목사님은 왜 그가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자신에게 화를 내며 달려들었는지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목회자와의 관계를 떠나서 대화 상대에 대한 결례가 너무 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눈을 뜨고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네 명이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훔쳐보는 것은 아주 나쁜 행동입니다." 그러면서 발까지 굴렀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목사님을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시는 이 교회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 운영위원이 눈을 뜨고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쏟아 붓고 가려고 하는데 목사님은 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말했습니다. "정말 기도할 때 눈을 뜨고 본 사람은 4명이었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예. 분명히 네 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4명의 이름을 다 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영적인 염탐자는 5명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추가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눈뜨고 기도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눈뜨고 기도한다고 분노한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목사님은 그가 3가지 중요한 점을 놓쳤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그는 자기가 비난한 사람들만큼 죄가 있다는 점을 놓쳤고, 둘째,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추궁하려고 달려드는 것이 무책임한 태도라는 점을 놓쳤고, 셋째, 기도할 때 눈뜨고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놓쳤다고 생각했습니다.

<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판단하는 것의 대부분이 이런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눈을 뜨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운전할 때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잘 판단하면 반드시 판단을 주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뻐할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을 잘하면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바르게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의 일차적인 대상을 자신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혹은 '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나를 잘 가꾸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이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도 사랑하지만 내가 판단하는 형제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눈감고 기도하는 사람도 사랑하고, 눈뜨고 기도하며 남의 기도를 염탐하는 사람도 사랑하시고, 눈뜨고 염탐한다고 극도로 화를 내는 사랑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셨지만 그 형제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형제를 살리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집념을 우리가 비본질적인 일로 방해해서 그를 망하게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여기에서 식물이란 '먹는 음식(food)'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이런 말입니다. "만일 술담배로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술담배 하는 문제로 망하게 하지 말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사형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남을 향해 손가락질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판단을 아주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 때문에 도리에 나 자신이 남에게 비방을 받지 않게 할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판단이 낳는 4가지 나쁜 태도 >

로마서 2장 3절을 보면 "남을 판단하면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판단을 싫어하실까요? 판단이 낳는 몇 가지 나쁜 태도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첫째, 판단이 나쁜 이유는 판단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기준에 놓고 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느 누구도 남이 처한 상황과 남이 가진 부담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위가 약해 고기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 식성이 사회생활에 지장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고 고기를 먹기로 작정했는데, 그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분은 그것이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둘째, 판단이 나쁜 이유는 판단은 자신을 높은 위치에 올려놓고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게 말해도 우리는 모두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우리들은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보다 더 좋은 사람이 아니고, 배우지 못한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생이 아니라 모두 더 배워야 하고 더 자라가야 하는 학생일 뿐입니다.

3) 셋째, 판단이 나쁜 이유는 판단은 다른 사람들을 하류로 취급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의로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그들을 이류 인간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큰 나'도 없고, '작은 너'도 없습니다.

4) 넷째, 판단이 나쁜 이유는 판단은 사람을 배타적으로 만들고 파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파벌은 기본적으로 조작을 좋아합니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지 않고 나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은근한 암시를 주며 파벌을 만듭니다. 그래서 판단이 나쁜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분을 봅니다. 그분은 훌륭한 성도이고, 교회 일을 좋아하고, 남을 방문하는 것도 매우 좋아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그분 말만 들으면 그분 및 그분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만 천국에 갈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다 무서운 죄인 같습니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배타적인 교회로 만들지 말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품는 교회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불일치를 일치로 만들어내십시오 >

그리스도인은 어떤 색깔의 옷을 입어야 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검은 판사복을 주시지 않고 거룩한 흰옷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나와 스타일이 틀리다고 분노하고 선한 일을 포기하고 공동체로부터 자기를 분리시키면 안됩니다. 그것처럼 불행한 결정은 없습니다. 우리는 불일치에 대해 분노하지 말고 불일치를 통해서 일치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사실 완전한 교단, 완전한 교회, 완전한 교인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불일치를 일치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일치와 연합 안에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본문 17-18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행동으로 판단하기보다 화평을 추구하며,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은 계속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의 칭찬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총회에 참석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김 전도사님 목사 안수 건 때문이었습니다. 김 전도사님은 경력으로 봐서 내년 말에는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순복음 신학교를 나와 한국 장로교에서는 목사 안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저의 모교단에 목사 안수를 위한 여러 절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서 거의 대부분 찬성하는데 몇 분이 반대해서 또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참 불편했습니다. 그 몇 분을 생각하니까 교단에 대한 애정이 식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실망이 있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번에 교단에 선교비로 2천불을 보냈습니다.

가끔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나를 실망시키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선한 일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자비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옷에 얼룩이 많은 사람과 어울리면 자기 옷도 더러워질 수 있지만 그래도 같이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저런 분도 사랑하실까?"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도 사랑하시는데 그분을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왜 저런 분을 왜 그냥 놔두실까?" 하고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지 마십시오. 사실상 더 이해하지 못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을 당장에 죽여 지옥에 보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가 판단하는 그 사람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 예수님처럼 다른 형제를 살펴주십시오 >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아마 그 생각처럼 우리에게 유익한 생각을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 자녀나 배우자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가 있고, 심지어는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같은 비천한 존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사랑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도 같이 사랑해주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살리신 형제를 우리도 살려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쉽게 판단해서 그를 망하게 하는 길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형수의 사형 받는 장면을 지켜본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18년 동안 사형수로 있다가 사형 받게 된 사형수 및 그 가족들과 마지막 5일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 5일 동안 그분에게 그 사형수는 더 이상 사형수가 아니었고 그저 가장 소중한 주님의 친구이자 자기의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에는 마치 자신이 사형수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자정에 커튼이 올려졌습니다. 사형집행인 12명이 목사님을 쳐다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그들 바로 정면에 있었습니다. 사형수 발 부분에는 식구들이 앉아있었고, 목사님도 약 18인치(60센티) 거리가 떨어진 상태에서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자신이 사형수의 입장에서 사형집행인들의 비난을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꿈꾸는 듯한 암울한 느낌이었습니다.

조금 정신을 차리고 사형수를 바라보니까 그가 목사님에게 미소를 지은 후에, 그는 목사님의 손에 있는 금 십자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는 영원한 잠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가 떠난 후, 목사님은 가족들을 쳐다보고 연민의 정을 느끼며 그들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 목사님은 예수님이 그 사형수와 함께 계셨고, 거기에서 사형수와 동일시된 느낌을 받았던 자신과도 함께 하셨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하면 자신은 생명을 드리는 것조차 작은 헌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중한 소리를 내는 전동장치의 안내인이 목사님을 차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주었을 때, 목사님은 바깥의 새로운 공기를 느끼며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얼마나 크게 주어졌으며, 내 쉬는 숨 한 모금과 눈에 보이는 장면 하나도 그 가운데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돌 두 개를 던져서 목사님 차의 앞 유리를 깼습니다. 목사님이 사형수와 함께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들의 심정도 이해했습니다. 그때 미조리 주 경찰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만든 사람은 잡아들일까요?"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자유롭습니다. 그들을 그냥 놔두세요. 그들도 언젠가는 저를 용서하겠지요. 저는 이 조각난 앞 유리를 트로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위해 가시관을 쓰셨는데 이쯤을 참지 못하겠습니까?"

그날 목사님은 마태복음 11장 19절에 나오는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다는 말씀이 너무 실감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감격이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나 소중한 분을 모시고 있구나!" 너무 너무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네(찬 23장)."하고 찬송하고 싶었지만 가족들을 생각해서 꾹 참았습니다.

바로 그때 목사님의 깨진 앞 유리창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사형수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마 그분은 목사님이 자기 아들과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그 어머니도 죄인의 친구가 되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날 밤 모텔 방으로 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성도님! 당신의 아들은 마침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는 그의 가족과 사람들에게는 실패한 존재였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가 내 손의 금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었을 때, 그는 자기 옆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는 용서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

사형수가 사형 당하는 장면을 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그러나 언젠가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사랑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저도 저의 소중한 것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먼 훗날 우리가 그런 말을 하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그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입니까?

그때 우리는 주님의 이런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잘했다! 나는 네가 더러운 사람과 구덩이에 함께 들어갔음을 안다. 너는 그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이제 나와 함께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자!" 하나님은 자비를 준 사람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실 것이고, 더러운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여겨주고 받아주는 사람을 깨끗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자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비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제가 가진 의는 가장 사악한 죄인의 죄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습니다. 저의 의는 감추어주시고 예수님만 졸졸 따라다니며 죄인의 친구로서 살게 해주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저는 예언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시간에 진짜 예언 한 마디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분들의 미래는 찬란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저 사람과 함께 예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어떻게 저런 죄인과 함께 지냅니까? 그들이 저의 흰옷을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저는 여기서 당신의 일을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누군가 더러운 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기도를 훔쳐보았습니다. 정말 분노가 일어납니다. 차라리 떠나 이런 모습을 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진짜 예언 한 마디 더 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분들의 미래는 암담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예수님의 피 아래에서 우리의 손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손에 엄청난 먼지들이 묻어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작고 연약한 사람들 옆에 서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저의 도움이 실제적으로 필요한 교회로 저를 보내주시고, 저에게 더러운 이들에게도 손을 내밀게 하시고,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반영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며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는 분들이 진정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한규 목사(분당 샛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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