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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이상호 목사............... 조회 수 474 추천 수 0 2019.02.19 23:5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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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49:14-21 
설교자 : 이상호 목사 
참고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사야 49:14-21                                                                                 

2018. 5. 23(수)


본문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힘들게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당시 유다 백성들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적국에서 포로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습니다. 또 수십 년 동안의 포로 생활로 인해 회복에 대한 기대나 소망은 이미 바닥이 난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회복의 약속을 미리 예언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언제나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유다 백성들처럼 때때로 몸과 마음이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몸이 계속 아프다든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 때 또는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등 그럴 때 우리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그런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생각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못됩니다. 우리가 그런 부정적인 생각 속에 빠져 있다 보면 하나님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불평이나 원망의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기서 시온은 유다 백성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이 너무 힘들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잊으셨다고 탄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유다 백성들이 탄식했던 것은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지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까 마음도 지치고, 믿음도 바닥이 나고, 그 결과 구원의 소망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힘들어집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1, 2년도 아니고 수십 년 동안이나 포로로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들의 마음이 힘들만도 했을 것입니다. 잠언 13: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소원이 더디어진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마음이 상하게 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나를 잊으셨나보다 라는 마음도 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시편 77:9절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도 마음이 너무 힘들다 보니까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것을 잊으셨나보다, 또는 노하셔서 이제는 긍휼을 안 베푸시나보다 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이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고 어렵다 보면, 또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다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잊어버리신 것처럼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이 노하셔서 그러는가 등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잊거나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아무도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미국의 인구조사국에서 이혼한 부부들을 대상으로 남편과 아내 중에 누가 자녀의 양육을 맡는지에 대해 조사해본 결과 엄마 쪽에서 자녀 양육을 맡는 비율이 86%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부성애도 크지만 모성애가 그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아기를 임신하고 열 달 동안이나 힘든 시간들을 인내하면서 견디는 것도 보면 그만큼 자식에 대한 모성애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아기를 임신하게 하셨다면 아마 남자들은 한 달은 고사하고 단 한 주도 못 견디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훨씬 더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15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잊어버리는 어머니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 자식을 잊어버리는 어미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잊지 않고 계시는가? 본문 16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손바닥에 뭔가를 쓴다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우리들을 잊으시지 않기 위해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통 손바닥에 뭔가를 쓸 때는 주로 볼펜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볼펜으로 손바닥에 쓰다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쓴 내용들이 다 지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예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항상 지켜보고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눈길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로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계시며, 또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그 사실이 잘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고 생각하면 절망스러운 마음 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고, 지켜보고 계시다고 생각하면 우리 안에 소망이 생깁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고 계시고 지금도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소망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회복시켜주십니다.


17~21절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모든 고난으로부터 회복시켜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라는 표현은 유다 백성들이 포로 신분에서 해방 되어서 빠른 걸음으로 다시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연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또 그들을 괴롭혔던 바벨론 사람들은 다 떠나갈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어서 18절에 보면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문장의 시제를 보면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막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21절까지 보시면 황폐했던 예루살렘 성읍이 다시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7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들을 보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쩌면 유다 백성들이 이 말씀을 못 믿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비현실적인 얘기처럼 들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시고 페르시아 제국을 통해 유다 백성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신 사실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BC 538년부터 시작해서 BC 445년까지 3차에 걸쳐서 유다 백성들은 다시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을 세우고 성읍들을 건축하고 그 땅에서 살게 됩니다.


시편 126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을 때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너무나 기뻐했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26: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포로에서 해방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시편 기자는 마치 자신이 꿈꾸는 것 같았다, 입안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불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무 기쁘니까 저절로 찬양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도 반드시 모든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고 언제나 마음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유월절 때마다 부르는 ‘아니마민’ 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니마민’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들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기다리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의 소식이 없자, 언제부터인가 이 노래의 가사는 절망적인 내용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고, 절망 앞에 부딪칩니다.”


이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신경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청년이 있었는데, 프랭클은 절대로 아니마민의 부정적인 노래 가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아니마민’의 노래 가사를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약속하신대로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늦게 오신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너무 조급해 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프랭클은 노래 가사를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꾼 것입니다. 또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견디기 힘든 중노동을 하면서도 깨진 유리조각을 날카롭게 갈아서 매일 깨끗하게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코 낙담하거나 절망적인 말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그는 다른 유태인들보다 더 깨끗하고 건강해 보여서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서 아우슈비츠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프랭클이 감옥에서 몰래 기록한 일기장이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일기 내용 중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깊이 깨달았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절대 자살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가장 나태한 방법이다. 죽음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못된다. 죽음 앞에서 살아보려고 하는 부활의 의지, 그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다는 생각도 절대로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사실도 아닐뿐더러,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기억하고 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모든 고난으로부터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사실도 믿고 마음에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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