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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드리는 신앙 그리고 공동체

로마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02 추천 수 0 2018.11.26 23:5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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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2: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03-12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몸으로 드리는 신앙 그리고 공동체

성암교회 창립 59주년 메시지

로마서 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성암교회가 출발한지 59주년이 되었습니다. 59년 전에 성암교회 첫 예배를 드렸던 분들은 이곳에 계시지 않습니다만, 그 당시 교우들은 예배를 드리면서 59년이 지나면 어떤 교회 모습일까 하고 상상을 했을까요? 이는 아마도 오늘 우리가 앞으로 60년 뒤에 성암교회가 어떨까 하고 상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지난주 내내 우리는 교회창립 59주년 신앙 강좌로 욥기서를 탄탄하게 읽고 은혜를 나눴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왜 창립기념 신앙 강좌에 욥기서지?”하는 의문을 품으신 분은 없습니까? 저는 성암 59년을 회고하면서 앞으로의 성암교회 59년 또는 59년 이내의 기독교 신앙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방향성으로 욥기서의 욥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욥기서가 강좌의 주제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럼 욥기서, 욥은 우리에게 어떤 신앙으로 미래를 맞으라고 하는가요? 표어처럼 간추려 보면 이렇습니다. “몸으로 드리는 신앙 그리고 공동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듣기에 따라서는 위험하고 불순한 발언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간의 몸은 신학적 성찰과 신앙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기원은 플라톤으로 올라갑니다. 플라톤은 세상을 이데아와 코라(Chora)로 나누고 이데아는 하늘, 정신, 형상, 남성, 이성, 코스모스로, 코라는 땅, 육체, 질료, 여성, 감성, 카오스로 분류합니다. 우주의 법칙과 질서는 이데아가 코라에 이식될 때, 코라가 이데아속으로 들어갈 때, 혹은 이데아가 코라를 품을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몸이 죄악시 된 이유는 이원론에 기초한 그리스 철학이 신학의 패러다임이 된 이후의 일입니다. 그중에서도 여성의 육체성에 대한 경멸은 모든 것들 중 끝판 왕, 깔데기의 끝에 위치합니다. 특별히 중세이후 전개된 금욕주의 전통은 육체적 욕망의 억압을 정당화했고, 육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의식을 분열시켰습니다.

 

육체성을 죄악시한 것은 중세 이후 신학만이 아닙니다. 근대 철학도 탈육체화 되었습니다. 근대 철학의 탈육체화는 코기토(cogito)를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주의, 경험을 초월하는 의식의 선험성을 주장했던 칸트의 인식론, 세계사를 의식의 자기전개과정이라 주장했던 헤겔의 관념론에서 절정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몸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여성신학, 생태신학, 퀴어(Queer)신학 등이 등장하기 전까지 신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성경본문,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과 논쟁거리를 선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성서구절의 배후에는 죽은 어린 양과 송아지의 피로 물든 제단 밑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살아 있는 제물로서의 우리 몸이 드리는 예배를 의식적으로 대립시키려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피 흘려 죽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제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성전이데올로기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성전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권력의 카르텔에 대해 바울이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오신 신을 조롱하는 것이고, 참된 예배는 마음과 뜻과 행위로서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지금 강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사도바울만큼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문제가 되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제자가 아닙니다. 바울은 살아있는 예수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틴에 머물렀던 유대교 갱신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을 그리스도교라는 세계종교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세운 공로는 혁혁합니다.

 

헤겔이나 니체, 톨스토이, 슈바이처, 막스베버, 하이데거, 현대 가장 핫한 철학자인 지젝, 아감벤, 바디우, 테리 이글턴, 테드 제닝스 같은 수많은 사상가들이 예수에서 바울로 전환되는 그 변곡점에 주목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혁명을 위한 모티브로 차용하고, 어떤 이들은 그 변곡점을 수구적인 것을 위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스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Zizek)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배반했다”고 말하면서 바울을 맑스에 대한 레닌으로 비유합니다. 즉 레닌이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를 자신의 혁명을 위한 이론으로 삼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바울 역시 예수를 그렇게 차용했다는 것입니다. 지젝은 바울과 레닌의 상동성에 주목하면서 바울로부터 레닌이 지녔던 혁명의 기운을 상상하고 소환합니다.

 

또한 해체주의적인 시각에서 보면 바울은 원전(元典), 즉 예수에 대한 해체의 아주 훌륭한 사례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데리다(Derrida)의‘차연(差延, defferacnce)’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者가 바울이 아닐까 합니다. 데리다의 차연이란 원전과 기원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가치에 대한 딴지죠. 텍스트의 기원과 가치란 텅 비어있는 것이고 지연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 공백을 유지하는 힘, 의미의 결정을 유보시키고 지연시키는 힘이 진리이고 자유이고 그것이 진정한 텍스트의 면모입니다. 이러한 해체주의의 차연의 전략이 적절하게 작동되는 지점이 바로 바울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요즘 바울읽기의 새로운 트랜드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복음은 그 자체가 예수에 대한 다른 해석 즉, 예수운동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성서는 바울, 즉 예수에 대한 다른 판본을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끔 허용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서의 텍스트성입니다. 단일하고 수미일관된 방식으로 엮이는 것이 성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쑥 개입하고 일탈하고 변주되고 왜곡되는 가운데 성서는 텍스트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갑니다. 보편적 진리란 어쩌면 하나의 우연하고 주관(주체)적인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닐 런지요?

알랭 바디우(Badiou)는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진리는 다마스쿠스에서 그가 겪었던 사건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그 사건은 환상일수 있고, 계시일 수 있고, 우연일 수 있고, 꿈 일 수도 있고, 도착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어떤 보편적(Universal) 교리와 선포와 강론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singularity) 어떤 환상, 믿음, 체험에 의해 고백되고 만들어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입니다. 그것이 사건이고 그 사건을 감행하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바디우는 주장합니다. 그런 주체에 의해 혁명은 다시 상상되고 감행됩니다.

 

바울이 말하는 몸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는 통로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재산을 다 처분하고 산속으로 올라가 휴거가 올 때까지 세상과 등진 채 황홀경 속으로 빠져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금욕주의적 삶을 살라는 말도 아닙니다. 금욕적 삶은 인간의 욕망이 지닌 물신성을 경계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겠지만, 금욕주의적 삶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몸을 파괴하고, 특별히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타자에 대한 혐오의 매커니즘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파괴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혐오,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발동이 근본주의적인 금욕주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금욕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우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과 종교적 영이 각각 분리된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몸으로 드리는 예배는 종교적인 삶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특정한 공간에,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종교적 행위로써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과 더불어, 세상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진리를 얻으려고, 구원을 얻으려고, 해탈을 하고자 여러분의 일상을 떠나 어디론가 훌쩍 점프하여 고행하고 좌선하고 기도하면서 그것들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보내신 이곳, 바로 이 지저분하고 찌질하고 허접한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칠 곳은 없습니다. 이 세상 밖 어디에도 우리가 바라는 구원과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는 무엇일까요? 이 시대의 풍조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것은 맘몬에 대한, 자본에 대한 숭배일 수도 있고, 생명에 대한 경시일 수도 있고, 소수자에 대한 집단적 폭력의 정당화일 수도 있고, 전쟁을 조장하는 군대귀신 일수도 있고, 세상 부정의와 불합리에 대한 냉소적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자는 이러한 이 시대의 풍조와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가로지르면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고 공동체입니다. 저는 성암교회가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던 공동체이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제도와 시스템을 흠모했고 그 길을 따라 걸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법 밖의 정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제도와 시스템 밖에 묻혀 있는 진리를 향해 뛰쳐나갈 때 교회의 교회다움이 선포되는 것 아닐까요? 그게 욥이었습니다. 그는 정통에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한계를 초월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성암性은 그런 가시적인 것보다는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성암을 언제든지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자유함이 아닐까 합니다. 저는 성암의 신앙을 굳이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의 질문을 받고 성령을 설명하면서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그것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라고 한 선문답과도 같은 발언과 연결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암은 겉으로 보기에는 쿨하고 시크한 것 같지만, 한 꺼풀 벗기면 솜털같이 섬세해서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도드라지는 성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암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지만, 불어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대지의 촉촉함과 대기의 훈훈함을 다 느끼는 바람입니다. 성암의 지난 59년은 남들처럼 급하게 어딘가를 향해 마구 불어갔던 바람이 아니라, 마지막 날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예수처럼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우리를 감싸는 허세와 권위와 위엄과 폭력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모아갔던 바람이었고, 그런 공동체였기에 지금까지 성암이라는 고유명사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지난 59년 동안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면 성암은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앞으로 그러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면서 앞으로의 590년을 새롭게 시작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59년이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의 59년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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