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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빌립보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513 추천 수 0 2017.12.20 22: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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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1:21-3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45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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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

1:21-30, 창조절 넷째 주일, 2017924

 

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는 오늘 설교 제목은 빌 1:27절에서 직접 따온 겁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바울의 모든 신앙 경험과 가르침이 이 제목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제목을 더 줄이면 복음과 삶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를 알려면 우선 바울이 생각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복음의 깊이, 능력

헬라어 유앙겔리온의 번역인 복음은 복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던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복된 소식으로 여기는 것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이나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여깁니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다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역시 복음입니다. 다 좋은 일들입니다. 그런 좋은 일들이 여러분들에게도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즉 영혼 구원이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영혼 구원이야말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무엇일까요? 너무 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대답하려면 어려움을 느낍니다. 현대인들은 영혼에 대한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뇌 과학 전공자들 중에서는 인간의 영혼도 뇌의 작용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뇌의 일정 부분이 손상되었을 때 인간의 생각이 파괴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심지어 인간의 종교심마저 뇌의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악마저 뇌 현상이라고 말하게 될 겁니다. 이런 방향으로 나가게 되면 결국 태아의 뇌를 과학적으로 완전무결하게 만들려고 할 겁니다. 미래의 인간은 약 한 알만 먹으면 완전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주장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인간을 유물론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인간의 심리적 작용을 영혼이라고 여깁니다. 이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영혼 구원에 대한 복음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혼은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성입니다. 인간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이기에 영혼이 흔들리면 그 외의 모든 것이 흔들리며, 영혼이 안정되면 비록 다른 것들이 흔들리더라도 견딜 수 있습니다. 영혼은 오뚝이의 중심을 잡아주는 납덩이와 같습니다. 영혼의 평화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복음으로 여기는 삶의 조건이 좋아진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바울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영혼의 평화를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신이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절망감만 더 커졌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의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복음 경험은 실존적인 차원에서 죽음과 삶의 문제였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신앙을 교양의 차원에서 대합니다. 절실함이 없습니다. 겉모양만 절실하지 내면은 경직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심층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갈급함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영혼의 심층에 공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도 다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사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옳게 살려고 치열하게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는데, 어떤 사람은 이웃과 국가와 인류 전체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반도의 통일을 남의 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일로 여깁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사람과 사회 공동체를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에 따라서 감당할 만큼 감당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영혼의 구원 문제는 아무도 피해갈 수 없고 피해가서도 안 됩니다. 그런 문제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혼의 눈이 어두워졌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 21절에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사상은 영육이원론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사약을 받으면서도 여유가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울의 말은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둔 게 아닙니다. 현재의 삶을 사뿐히 벗어나려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이 이미 극복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기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 경험입니다. 고전 15:54절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 철학자들처럼 현실의 삶을 부정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현실의 삶이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에 휩싸였다는 사실을, 즉 죽음마저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다.’라고,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다.’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신앙이 부럽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들을 때마다 너무 엄청나서 친근감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귀를 아예 닫습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여러분들도 바울의 이런 고백을 말로 설명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영혼으로는 느낄 때는 종종 있습니다. 그런 순간이 점점 늘어나는 이들은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신앙이 깊어지고, 그런 순간을 붙들지 못하는 이들은 기독교 신앙의 껍데기에 집착하든지 아예 기독교 신앙을 포기합니다. 저의 경험을 말씀드릴 테니 여러분과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보십시오.


저는 어떤 순간에 저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 단절되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가족과 교우들과 대구성서아카데미 회원들, 그리고 지금까지 집필한 서른 권에 가까운 저서, 많지는 않으나 지금 내 통장에 들어 있는 돈 등등입니다. 여기서 단절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다 귀찮아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순간은 죽는 순간일 겁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 무슨 가족을 생각할 것이며, 돈을 생각할 것이며,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생각하겠습니까. 그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저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죽는 순간의 느낌이 살아있을 때도 종종 찾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 순간에는 다른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없어도 됩니다. 아니 없어야만 그런 느낌이 강해집니다. 이런 느낌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울의 고백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이런 느낌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느낌이 전혀 없었거나 지금도 없다면 영혼의 구원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토대

이런 경험은 삶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을 의미 충만하게 합니다. 일상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햇살 한 조각, 하늘과 풀과 곤충 소리와 달그림자가 신비한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건강하게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이해타산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에서 관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과의 영적 사귐 자체를 실제로 행복하게 받아들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기를 내 세우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편지도 이런 마음에서 쓴 겁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26)고 말한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권면했습니다. 자신이 맛본 복음이 삶의 토대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나가야 할 방향을 그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1) 바울은 27b절에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어떤 나쁜 일을 위해서 모의하고 작당하는 건 오히려 쉽습니다. 특히 복음을 위해서 협력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중심에 모여야 합니다. 복음의 동지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도 협력하는 건 어렵습니다. 사람은 시기심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협력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대접받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한 마음으로 협력하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서나 나타날 수 있는 삶의 태도입니다.


2) 바울은 28절에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본문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복음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서 본다면 율법주의자들이 바로 대적하는 자들로 추정됩니다. 당시 율법주의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유대 기독교인들이고, 좀더 멀리 보면 유대교인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도 대적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 변질, 훼손시켰습니다.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이들의 주장이 솔깃해서 복음의 토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들을 머리에 뿔 달린 이상한 집단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바꿔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대화시키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되는 혼합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컨대 기복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3) 복음에 합당한 삶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바울은 29절에서 말했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믿음에 충실하다는 것이며, 믿음에 충실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고난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이 많은 이들에게 불편하게 들렸을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바울이 고난을 미화하려는 게 아닙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기에 만날 수밖에 없는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고난은 믿음과 함께 나타납니다. 믿음과 고난은 마차의 두 바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신자들은 크고 작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고난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고난은 추상적인 것에 떨어져 있습니다. 기껏해야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섬겨도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거나 정부가 추진하는 종교세 부과 같은 것들을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막연하게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에 대한 불안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은 30절에서 이런 일련의 문제를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싸움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기독교인의 실존은 싸움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발언을 종종 했습니다. 딤전 6:12절에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싸움이라고 말했다 해서 세상을 무조건 악하다고 보는 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세상과 상관없이 기독교인의 삶 자체가 싸움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는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나태해지니까 자신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을 다른 말로 한다면 자기 성찰이며 구도이며 수행입니다. 바울은 빌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달려간다는 말은 곧 싸움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달음질의 영성, 선한 싸움의 영성을 잃었습니다. ‘내게는 생명이 그리스도이니 지금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바울의 고백은 어떤 열광주의자에 헛소리로 들립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대신 일상에 대한 뒤치다꺼리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목회도 비슷하게 작동됩니다. 일상의 과잉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삶의 재미를 순간순간 얻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이 의미 충만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초반에서 말씀드렸듯이 영혼의 깊이에서 울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깊이에 울림이 없는 상태를 사람은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립니다. 그래도 안 되면 인생은 다 그런 거야 하는 식으로 자포자기에 빠집니다.


설교를 끝내야 할 시점에 되었는데도 여전히 질문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질문에 제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에 여러분이 답을 찾아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 실제로 우리가 행복하고 의미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건 종교적인 허풍, 관념, 수다, 공허한 미사여구는 아닐까요? 그것이 아무리 진리라고 하더라도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비현실적인 것일까요? 먹고 사는 문제가 발등의 불이고 복음에 합당한 삶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먹고사는 생존 문제가 급박한 분들은 일단 그걸 해결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예술이나 학문 활동 자체 때문에 시간이 없는 분들도 우선 자기 일에 시간을 쏟으십시오. 언젠가는 생존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예술 활동이나 학문 연구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될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순간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거나 세상을 정말 새롭게 하는 일을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감수성이 무뎌져서 복음에 대해서, 그리고 거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합(않습)니다. 그런 식의 삶이 반복되다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언저리에 머물다가 인생을 다 보내게 될 것입니다.


* 설교듣기 https://youtu.be/YfrFU-8ZDdI

*  설교보기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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