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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7:4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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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79052562 |
2013년 2월 17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7장 45절~46절
설교제목 : 역설의 진리
<영성시>
기도
*정채봉
쫓기는 듯이 살고 있는
한심한 나를 살피소서
늘 바쁜 걸음을 천천히 걷게 하시며
추녀 끝의 풍경 소리를 알아듣게 하시고
거미의 그물 짜는 마무리도 지켜보게 하소서
꾹 다문 입술 위에
어린 날에 불렀던 동요를 얹어 주시고
굳어 있는 얼굴에는
소슬바람에도 어우러지는 풀밭같은 부드러움을 허락하소서
책 한 구절이 좋아
한참을 하늘을 우러르게 하시고
차 한 잔에도 혀의 오랜 사색을 허락하소서
돌틈에서 피어난
민들레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가게 하시고
기왓장의 이끼 한낱에서도 배움을 얻게 하소서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시기를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 하셨다.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마태 27:45~46)】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여기 한 사람의 청년이 있습니다. 그는 순수했고, 정의로웠고, 진실했습니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갖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올곧음 때문에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반듯한 청년이 이제 비참하게 인생을 마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순간 그의 입에서 하느님에 대한 깊은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옳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이, 억울한 사람들이 그 원통함을 풀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인생의 서글픈 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뭐라 설명해야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오늘의 주제는 너무 슬프고 무겁고 어렵습니다.
<이야기들을 상상하다>
저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몇 가지 영성적 상상을 통해서 위로의 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위로의 메시지는, “죽음은 끝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예수만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억지로 죄목을 같다 붙여서 예수를 공개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러면 시끄럽게 골치를 썩이는 무리들이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의 메시아 운동은 ‘예수의 비참한 죽음’으로 말이암아 더욱더 확산되어 버린 것입니다. 비록 예수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는지는 몰라도, 예수가 일구었던 ‘메시아 운동’은 더욱더 활기를 얻어서 온 세상으로 뻗어나갔던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위로의 메시지로 시 한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작품 ‘흔들리면서 피는 꽃’입니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사랑도 그렇고 삶도 그렇듯이, 신앙 혹은 영성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삶’에도 왔다갔다하는 진폭(振幅)이 있습니다. 있어야 합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고, 환희가 있으면 좌절도 있는 것입니다. 봉우리가 있으면 골짜기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 진폭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과 더욱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예수 역시 그 마지막 비통함의 절규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더 가깝게 닮아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앓으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앓음알이입니다. 앓음이 없다면 제대로 된 알음은 불가능합니다. 예수의 마지막 절규 역시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크게 앓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의 나라는 한 마디로 대동(大同)의 나라입니다. 즉 모두 같아지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귀한 사람도 없고, 천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구분과 장벽, 분리와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하나 “높은 산들을 낮게 깎고, 낮은 골짜기를 높게 메우는 방식”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높은 산들은 낮게 깎는 방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하느님의 사람들이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요? 높은 산에서 스스로 내려와서 낮은 골짜기로 가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 많은 사람, 귀한 사람들이 그 높고 많고 귀한 것들을 다 내려놓고 낮고 적고 천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불가피하게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사랑하는 아들딸들에게 권면하시고 있습니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가라. 성공에서 실패로 가라. 생명에서 죽임으로 가라.” 예수의 비참한 죽음은 바로 그런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의 결론>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역설의 진리가 빛을 뿜어냅니다. 즉 흔들려야만 바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면 바로 갈 수 없습니다. 진폭을 갖는 곡선을 그려야만 제대로 된 직선을 찾아낼 수 있는 이치입니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가야만 제대로 된 인생의 중심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에서 실패로 가야만 제대로 된 성공의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죽임으로 가야만 진정한 생명의 삶이 가능해 집니다. 즉 부활의 영광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역설의 진리’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하늘의 하느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댓글 '2'
사랑니
"깊은 신뢰와 믿음"? - 과연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나요?
자신이 하나님인데 누가 누구한테 믿음을 준다는 것인가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 이런 거라면 그래도 넘어갈 수 있겠는데 ...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만큼 반듯한 청년이"? - 불릴만큼? - 누가요? 예수님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만큼? -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 아닌가요?
"로마의 권력자들은 예수만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 -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로마의 권력자인가요? 제가 알기로는 유대의 지도자들이며, 권력자들인데요
"아마도 분명히 예수 역시 그 마지막 비통함의 절규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욱더 가깝게 닮아갔을 것입니다." ? 예수가 하나님을 닮아갔다? ㅎㅎㅎ 하나님이 하나님을 닮아간다 - 참 개가 웃을 일이네요
셋째 문단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인간들이 모두 같아 지려면 자기 것 다 버려야 한다는 말 같습니다. 맞나요?
제가 알기로 우리가 같아 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서 그 분이 보내신 성령과 함께만 가능합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 부분을 보면 인간이 똑바로 가려면 실패도 있어야 하고 고난도 있어야 한다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안 보이네요
우리가 똑 바로 가는 길은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나는 그분 안에서 언제나 주님 나라 향해 가는 것입니다.
너무 인본적인 설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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