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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변해야 나라가 산다

누가복음 권진관 형제............... 조회 수 3652 추천 수 0 2003.08.04 00:11:27
.........
성경본문 : 눅4:18-19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지난 3월 1일에는 두 가지 종류의 3·1절 행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3·1절 민족대회"와 "3·1 민족자주 반전평화 촛불집회"가 있었습니다. 이 두 집회는 민족의 화해와 반전을 부각시킨 행사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3·1절 구국 금식기도회"와 "3·1절 국민대회"였습니다. 이 중 "3·1절 국민대회"에는 반공과 친미를 내세우며, 각종 보수적 단체와 종교인, 정치인이 시청 앞 광장에 10만 명을 동원한 모임입니다. 개신교 대형교회들이 이 "3·1절 국민대회"를 강력히 후원했습니다. 행사장 상공에 띄워진 대형 애드벌룬과 대형 국기는 감리교의 금란교회가 제작 지원하였고, 감리교의 광림교회는 음향시설 등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개신교 대형교회들은 자기 교인들에게 참여를 호소하고, 새벽기도회나 부흥회를 통하여 성공적인 대회를 기원하는 기도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한국의 대형 개신교회들이 대거 참여한 이 "국민대회"에는 보수적인 목사들과 보수적인 정치인들이 함께 나란히 앉은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개신교 지배층과 보수적 정객들이 손을 잡았던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이러한 야합은 군사정권 하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져서, 보수 목사들이 독재자들을 위해 드러내 놓고는 하지 않았더라도 암암리에 독재자를 지원했던 것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이전의 모습과 전연 달라졌습니다. 소위 민주화 세력에 의해서 국정의 상당부분이 장악되면서, 지금까지의 보수 기득권 세력이 점점 더 초조해 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이러한 대형 집회를 개최하고 노골적으로 보수정치인들과 보수 종교인들이 손을 잡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수언론인〈조선〉,〈동아〉가 적극적으로 가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평화와 반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있으며, 한국교회를 이러한 운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해 있는 순진한 교인들에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정신적, 신앙적, 지적인 왜곡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가장 큰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공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종교들, 이른바 우상숭배요 미신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어쩌다 보니 공산주의 국가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즉 공산주의와 평화롭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데올로기보다는 생명이 더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잘 살아야 우리들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 살아서 우리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이 우리와 대등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경제협력과 대화와 친선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뭐라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더욱이나 그들을 없앨 권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반공이데올로기가 위험한 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전쟁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공과 멸공을 내세우면서 폭력과 전쟁을 조장하는 집회를 연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폭탄을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반도에 조장되고 있는 전쟁위기의 먹구름은 다분히 만들어지고 조장된 것입니다. 저는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오는 것은 미국의 부시 행정부의 정책 뿐 아니라 일본의 유사입법도 한 몫 단단히 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는 비판하고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조장 세력들이 뒤로 물러나면 한반도는 매우 평화스러워 질 것입니다.

  그리고, 개신교의 또 다른 적(敵)은 다른 종교들입니다. 타종교들을 우상이나 미신으로 보고 없어져야 할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선교나 전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하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군적으로 섬멸할 대상으로 보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태도요 편협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대로 한국의 대형 개신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에게는 두 가지의 우방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는 미국이요, 다른 하나는 돈과 재물입니다. 한국교회들은 왜 그렇게도 미국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좋아한다면 미국의 좋은 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선 가깝게는 미국의 교회에서 배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의 장로교회로부터 배워서 어떻게 미국 장로교회가 사회 속에서 인권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가를 보고 배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의 감리교회는 미국의 연합감리교회로부터 배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의 연합감리교회는 정말 모범적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미국의 좋은 점은 닮지 않고, 미국 정부가 하는 것만 무조건 좋아하고 찬성합니다. 미국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의 우방은 재물과 돈입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 그리고 그 목사님들이 왜 그렇게 재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온통 축복이고, 삼박자 구원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재물이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서 교회가 평가되고, 목회자의 능력이 평가됩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겨서는 안 된다"는 성서의 지상명령이 한국교회에서는 전연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큰 건물, 많은 예산, 그것도 모자라서, 교육관, 기도원, 선교원, 공원묘지 등을 짓거나 사들입니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닙니다. 한국의 가톨릭 교회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신·구교 모두 재물, 부동산, 돈과 왜 그렇게 긴밀한 연대관계를 맺고 있는지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거꾸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역행하며, 평화와 안전에 방해가 되며, 좋은 것을 버리고, 나쁜 것을 취하며, 나아가서 하나님 보다는 재물을 섬기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외친 바 있습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 이사야 5:20-21

  한국 교회가 변해야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종교가 그 나라의 건강을 재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나라의 국민들의 정신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바로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합니다. 교회를 대신할 다른 기독교 기관은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곧 한국의 기독교의 유일한 "조직적인"(organizational) 표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한국교회를 향해서 소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우리 안에서도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대형교회들은 툭하면 나라를 위한 기도회, 구국기도회를 열면서 자기들이야말로 나라를 위해서, 아니 나라를 "건지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70년대 80년대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유신헌법 반대 등을 외치면서 가두진출을 했지만, 그 반대의 이유로, 이제 보수 대형교회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역사와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무관심하다가 요즘 들어서 갑자기 사회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바뀌려면, 교회가 바뀌어야 하고, 교회가 바뀌려면, 신앙의 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한국 교회는 갈라집니다. 마치 "민족대회"와 "국민대회"가 갈라지듯이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로 갈라집니다. 또 한국교회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느냐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보다는 예수를 선호하고, 바울과 같은 이는 예수보다는 그리스도를 선호하지만, 예수와 그리스도는 동일하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예수와 그리스도에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2000년 전에 갈릴리의 가난하지만, 사랑과 정의감이 많은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후대 사람들이 붙여준 타이틀, 상징입니다.    

  도로테 죌레라는 독일 여성신학자가 얼마 전 2003년 4월 27일에 74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이루어 놓은 많은 업적 가운데, 1994년에 쓰여진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이 말해져야 한다"라고 하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죌레는 예수와 그리스도의 차이와 연결점을 자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말은 특정한 의미에서 집단성을 표현한다. 나사렛의 예수가 죽기까지 고문당한 갈릴리의 가난한 남자였다면, 그리스도는 그와 함께 세상에 왔으며 우리를 통해 그 안에 살아 있는 죽일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말한다면 나는 언제나 아씨시의 프란시스와 빙엔의 힐데가르트, 마르틴 루터 킹과 엘살바도르에서 살해된 미국 수녀 이타 포드(Ita Ford)와 오늘도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리스도란 나에게 연대성, 즉 함께 고난 당하고 함께 싸우는 것을 표현하는 한 이름이다. 그리스도는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고 더 나아가 때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바보"로 만드는 신비에 넘치는 힘이다. 그 힘은 성공에 대한 전망이나 아무러한 목적 없이 삶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 빵을 나누고 집을 나누며 두려움과 기쁨을 나눈다.

  저의 생각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가장 그리스도다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 해방자, 즉 메시야라는 뜻을 가진 타이틀입니다. 예수의 짧은 역사적 삶 자체가 해방자이자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집단성을 표현하고 연대성을 표현한다고 한다면, 예수는 주위에 모인 가난한 사람들, 세리들, 병든 사람들과 집단을 이루었고, 연대성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의 연대성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과 연결하여 이렇게 요약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100퍼센트의 연대성을 이루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철저히 성령의 도움에 힘입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연대성과 성령의 힘으로 합쳐진 존재입니다. 예수는 그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고, 예수 안에 창조적인 성령의 활동과 개입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요소를 우리는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는 원래 그러한 능력이 있는, 본질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분으로 믿었던 것이 전통적인 예수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주의 영이 있다는 것을 믿었고, 하나님의 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땅과 하늘이 교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교감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문의 말씀대로 자신의 현재의 상태를 말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는 연대를 이룬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를 둘러싼 민중이 없이는 예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 즉 민중들을 빼놓고 예수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이 개인 예수는 원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어렸을 적에 기저귀를 찼었겠느냐는 논란이 있었고, 갓난 젖먹이 예수가 동방박사에게 축복을 베푸는 그림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반복합니다마는 예수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예수를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과 어떻게 지냈는가가 바로 예수의 예수됨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과 연대하게끔 이끄는 것은 주님의 성령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적으로 말하면, 성령은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령은 예수를 사람들과 연대하게 하며, 그들을 해방하도록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성령은 한마디로 "관계의 힘" 혹은 "내적인 관계의 힘" 혹은 "연대하게 하는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방교회에서 하나님을 두 가지의 차원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본질이요 다른 하나는 에너지, 즉 힘이라고 했는데, 내적인 관계의 힘은 바로 이 에너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기(氣)는 기운이며, 에너지인데,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힘이라는 것이 동양의 이해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영을 동양의 기로 바꾸어 생각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적인 힘이 예수에 임하였고, 예수를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던 하나님의 역동적인 힘이라는 것인데, 이 힘이 이미 우리의 선조들에게도 임하고 있었다는 것을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것을 우주 속에 있는 기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이 기는 우리 생명의 근원이요,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연대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氣)이며, 성령은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존재로 만들어 줄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 바울 서신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우리도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힘은 바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양의 기 이해보다 질적으로 크게 앞선 이해로서 높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탁월한 이해가 로마서 8장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롬 8:14-17)

  로마서 전체에서 이 8장은 유일하게 성령에 관한 장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 5 장과 6장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으며, 7장도 5, 6장과 이어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인간론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과 예수는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는 쉽게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구별해야 합니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영은 언뜻 보기에 그리스도와 구별되지 않습니다. 서로 구별 없이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삼위일체적 고백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스스로 낮추셔서 그리스도와 같이 우리의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는 도우미, 카운셀러, 위로자가 되어주시므로, 스스로를 목적으로 간주하지 않으시고, 수단의 위치에 서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되도록 북돋아 주는 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성령을 하나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열어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 성서의 야훼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받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고난받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은 자기 자신을 내어주되 겸손하게 내어주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서도록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준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오순절 때에 바벨탑의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의사소통되어 생명의 기가 흐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구원의 기쁨을 자져다 줍니다. 유영모 선생이 말했듯이, 기쁨이란 '기뿜' 즉 생명의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영모 선생은 기도하는 것을 기가 통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기의 길 즉 기도(氣道)가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지극한 생명의 기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우리를 도와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형 교회는 우리들을 여러 가지 공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교회가 부과한 것들을 지키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든지, 심판 받는다든지, 아니면 받을 복을 놓친다고 위협을 하고, 나아가서는 적 그리스도로 몰아 부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도들을 겁주고, 공포 속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마음대로 교회를 주무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다시는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우리를 자유인으로 해방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의 형제 자매가 되게 합니다. 예수처럼 이 땅에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성의 대형교회들은 우리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아서 크게 두 가지의 잘못을 대형교회들이 저지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신학적 이해를 조장하여, 우리는 아무런 노력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수가 2000년 전에 우리가 해야할 일들을 다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저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피동적 신앙인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둘째로,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조장하여, 교회의 권위가 성령을 대신하고, 성령을 복받는 수단으로 대체함으로써 더욱 신앙인들을 교회제도에 묶어 놓고, 노예로 만들어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케하시는 데, 대형교회의 성령은 우리를 꽁꽁 묶어 구속합니다.    

  한국 교회가 변해야 나라가 삽니다. 한국 교회의 변화는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메시지의 신학적 내용을 바로 잡는 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점을 뜯어고치는 일도, 그것이 이 땅에 평화와 정의를 위해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소리만 큰 꽹과리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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