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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와 구원의 기쁨

누가복음 이정재 신부............... 조회 수 2123 추천 수 0 2007.12.17 00: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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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14-23 
설교자 : 이재정 신부 
참고 : 새길교회 
우리는 지금 제3의 천년시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21세기에 대비하는 소리가 높습니다. 새로운 슬로건이 난무하고 새로운 기구나 운동들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지난 100년과 앞으로의 21세기의 백년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가 개발과 발전이 주도적이었던 반면에 새 시대는 인간성의 회복, 인간의 존엄성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2장 7절에 나타나고 있는 바 하느님이 인간을 땅의 먼지 가운데서 창조하신 것과 같이 새로운 인간창조의 시대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되어 있고, 과거의 역사를 움직였던 이념들이 쇠퇴해 버린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미국 성공회의 베네트 심스 주교는 이러한 변화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폭력은 이제 무력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결코 문제 해결의 방법이 아니고 다만 파괴의 원인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② 인간은 물론 자연에 이르기까지 상호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평화와 존중의 관계가 인류의 소망이 된 것은 과거 천년간 벌려온 무수한 전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인류는 이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종, 언어,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에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윌리암 템플은 인간을 죄에 빠트리고 세계를 악으로 떨어트리는 말로서 불일치(disunion), 불합리(disintegration), 소외(ailenation)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은 모두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대결이나 단절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러한 상황이 죄와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폭력을 불러오고 파괴를 일으킵니다. 템플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당시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창하면서 평등과 협동, 관용과 일치를 내세운 바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평화와 관용의 징후를 보고 있습니다. 누가 냉전체계의 붕괴를 예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 정책에 의해 고통을 가장 많이 받았던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다는 것을 누가 꿈이라도 꿀 수 있었습니까? 중동의 평화나 독일의 통일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누가 기대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의 지배욕, 식민통치의 영향, 국가적인 또는 인종적인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교적 이기주의는 곳곳에 비극과 고난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르완다에서 150만 명이 넘는 후투족이 살상 당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며, 아직도 수단에서는 아랍인과 아프리카인들이 대결의 참극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분명히 21세기는 달라져야 합니다. 새 세계가 와야 합니다. 일본에서 있었던 독가스 사건처럼 아무 원한 관계도 없이 세계를 온통 적대시하고 무차별 살생을 일으키는 사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각오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우리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물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세계가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존속한다는 것입니다(골로사이 1:18).
오늘 읽은 본문은 최후의 만찬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 함은 그의 몸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새로운 세계를 내다보면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의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만 아니라 이 세상과도 하나가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역사 하심에 같이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 대한 약속이며, 그 약속은 우리들의 참여(remember)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예수를 버리지만 예수는 세상이 궁극적인 자신의 희생과 사랑의 대상일 뿐 아니라 그 세상이 곧 자신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화해의 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깊은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과의 완전한 일치, 다시 말해 예수의 구원의 역사에 완전한 참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두번째의 부름이었습니다. 첫째 부르심이 하느님나라에 대한 미래적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둘째 부르심은 이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 그리고 그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자기 희생을 요구합니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시간을 요구합니다. 어린양이 세상의 권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는 상황은 곧 최후의 때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계 13:8).
세계가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절대 권력자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이념, 경제적 폭력, 그리고 사회적 갈등구조 등은 세계를 온통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자연파괴를 불러왔고, 공해는 이제 세상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제 세상을 그리스도의 몸과 일치하는 새 세상으로 만드는 일이며, 이 책임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계승해 나가도록 주어졌습니다.
리차드 후커(1554-1600)는 자연과학이 발달되기 이전에 예언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만물을 다만 그 자체를 위해서만 만든 것이 아니다. 하나 하나가 만물을 이루는 것이며, 각양의 것은 각각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필요로 하는 관계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후커는 이런 관점에 서서 가톨릭 전통인 교회지상주의와 퓨리턴의 성서절대주의가 대립했을 때, 교회와 세속사회(국가)가 갈등의 관계에 놓였을 때, 국민과 왕권이 대결의 상황에 있었을 때 "관용의 신학"을 제창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용은 결코 양자의 타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은 고난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고난의 역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사에 깊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여를 통해서 새 역사인 하느님의 나라, 구원의 세계가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며, 이 세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화해 즉 자기 희생을 통한 끊임없는 그리고 절대적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라는 새로운 명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화해라는 것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사랑이 없이는 부활도, 21세기 새 역사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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