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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이 있을찌어다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3986 추천 수 0 2009.02.02 10: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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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19-23 
설교자 : 이재철 목사 
참고 : 주님의교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안식일후 첫날, 즉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그날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밖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녀의 삶 자체가 부활과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그같은 그녀의 삶이 얼마나 밝고 빛났을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때에"(19a)

안식후 첫날 저녁이란 주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녁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막달라 마리아가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을 시각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본문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19b)

그들은 예수님과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마가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두려워서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제자였던 자기들에게도 위해를 가할까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겁을 먹고 있었던지 그들은 `문들을 닫고' 있었다고 본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닫았다'는 동사 kle o는 걸어 잠구었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문만을 잠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중 혹은 삼중으로 된 문들을 그들은 겹겹이 걸어 잠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공포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 역시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믿지 않았을 때, 그 결과는 참혹한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과 집밖에서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증거하며 다니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비교하여 그려 보십시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란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막달라의 창녀였었다는 전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이처럼 엄청난 차이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걸어 잠군 것은 단순히 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걸어 잠구었던 것은 실은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마음의 빗장을 치고 있었습니다. 빗장 쳐진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만이 판을 치는 법입니다.

신앙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려움의 빗장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의심과 불신의 문을 열어 젖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어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의 빗장을 걷어내시고 밝은 세상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19c)

마침내 주님께서 제자들의 굳게 닫힌 내적·외적 문들을 친히 열어 주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찾아오시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굳게 닫힌 문들을 열어 달라고 두드리시지를 않았습니다. 손수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열어 주지 않는다고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의 한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나 자신이 어떤 이유로 인해 두려움에 떨며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근 채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내가 문을 열어 준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은 여전히 꽁꽁 닫겨진 채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누군가가 그 방안에 나타난다면 기겁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임에 그것은 귀신임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굳게 문이 닫혀진 방안에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의 두려움은 배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누가복음 24장 37절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표현을 점잖게 해서 `영'이지 사실은 제자들이 `귀신'인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잖아도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이 갑자기 나타나신 주님을 귀신이라 여겨 질겁을 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귀신의 특성은 몸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귀신이 아니셨습니다. 분명히 손과 발, 몸을 그대로 갖고 계셨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일깨워 주심으로써, 제자 가운데 계신 이는 귀신이 아니라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직접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찾아오시어 문을 두드리시지 않았습니까? 왜 문을 통해 들어오시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시어 제자들을 더더욱 놀라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공연히 제자들을 골려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몸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심을 제자들의 심령에 분명히 각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 지금 이 방의 모든 문들이 이중삼중으로 겹겹이 잠겨 있다고 치십시다. 이 방안에 있는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밖에서 부수지도 않고서 귀신이 아닌 누군가가 이 방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뿐입니다. 20년전,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때는 이곳이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 벌판 위에서 이 방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에 섭니다. 그리고 다시 오늘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면 문은 잠긴 채 그대로이지만 그는 이 방에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실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분명히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육체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시거나 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방에 나타나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인식시켜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당신을 가리켜 그토록 즐겨 사용하시던 `인자(人子)'―즉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을 부활 후에는 다시는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시공을 초월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본문 19절 종반절은, 시공을 초월하여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첫마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d)

여기에서 평강이란 단어 `에이레네'는 히브리말 `샬롬'을 옮긴 것으로 그 뜻은 `평안' `평화' `화평' `평강'이란 의미입니다. `샬롬'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거나 헤어질 때 보편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만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20)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귀신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21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a)

주님께서는 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인사말을 연거푸 두 번 하는 경우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26절 역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8일 후에도 문들이 걸어 잠긴 방안에 시공을 초월하여 나타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그때에도 역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 평안이었음을 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제자들이 두려움과 불신과 불안에서 벗어나 그들의 심령 속에 참된 평강이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참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강의 사람이어야 함을 일깨워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평강의 원천은 누구십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트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떤 상황에선들 어찌 평강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앞에,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우리의 평강을 앗아갈 상황이 어찌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어찌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믿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건 평강의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두려워 문을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구고서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그들에게 평강을 부어 주셨을 때 그들은 굳게 잠겨 있던 문을 비로소 활짝 열어 젖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두려움의 문, 불신의 문, 불안의 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골방에서 뛰쳐나와 이 평강을, 진리의 평안을, 참생명의 화평을 전하는 평강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후 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바울이 이 글을 쓸 때에 그는 로마의 감옥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로마의 감옥은 2중 3중으로 철문이 굳게 닫겨져 있었습니다. 지하에 있던 감옥은 암흑천지였습니다. 먹을 것이 제대로 제공될 리도 없었습니다. 모든 여건이 지옥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울은 평강을 간직한 평강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철문이 겹겹으로 잠겨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암흑천지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기를 찾아와 자기 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의 평강을 빼앗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생각해 볼 때에 저와 여러분 중 누가 지금 현재 더 평안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입니다. 저는 겨우 두 발만을 밑바닥에 맡긴 채 서 있는 반면에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의자에 맡기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평안스런 자세가 있습니다. 아예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잠을 잘 때 서거나 앉아서 자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드러누워서 잡니다. 그것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평안한 자세인 까닭입니다. 드러눕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온몸을 남김없이 온전히 방바닥에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바닥에 많이 맡기면 맡길수록 우리의 몸은 더 평안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닥을 믿지 못하면 우리를 맡길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이 강단이 곧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저는 지금 두 발을 강단에 맡긴 채 평안스레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곧 의자가 쓰러질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평안히 앉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지진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평안히 누워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바닥에 많이 맡길수록 평안하지만 그것은 바닥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바닥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몸의 평안은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 많이 맡길수록 우리는 평안을 얻습니다. 작게 맡길수록 우리는 그만큼 고통과 괴롬을 더 겪어야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만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의 온전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여행을 하다보면 호텔방 옷장 안에 조그만 금고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중한 것은 그 속에 넣어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안에는 언제나 이런 경고문이 놓여 있습니다.

`더 귀중한 것은 호텔 프런트에 있는 금고에 맡기십시오. 호텔 프런트에 맡기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는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맡긴 것만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맡길 수 있는데도 호텔주인을 믿지 못해 귀중품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밤낮 불안해하는 투숙객이 있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잠시 이 세상에 투숙하고 있는 여행객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맡기는 만큼만 평안합니다. 그 분께 맡긴다는 것은 그 분이 결과를 선하게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어떤 상황 속에서건 그 분의 법도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맡길려면 손과 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맡기십시오. 평강의 하나님께서 평강의 삶으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27)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을 꼭꼭 닫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지금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에게 평강을 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평강의 주님이시요, 전능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나 자신을 맡기는 자 되게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과 불안과 불신의 빗장을 열어 젖히고, 주님과 더불어 참 평강의 삶을 누리게 해 주시기를 평강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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