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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줄 모르는 종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2080 추천 수 0 2008.01.21 00: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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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8:23-35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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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우리는 현실을 망각하고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국 분단의 현실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현실이 되다 보니 분단이 온갖 민족 고난의 뿌리인데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손바닥만한 땅에 살면서도 목전의 현실에 눈이 팔려 정작 우리가 처한 근본문제를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분단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실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6.25를 맞으면서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군사비에 엄청난 돈을 지출하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교육투자, 환경투자, 복지예산 등 돈을 써야 할 곳이 한둘이 아닌데도 국방비에 30% 이상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남북한 모두 어리석게도 무기구입에 혈안이 되어, 작년인가는 무기구입 세계 2위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지난해 예산 5%를 교육비로 확보하는 일이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우리는 들었습니다. 분단의 현실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 외에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까? 안보라는 이름 아래 군사독재를 정당화시켜 주었으며, 무시무시한 보안법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납치, 투옥, 고문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고향을 잃고 한 많은 슬픔의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반 조각이 난 좁은 땅덩어리 속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를 안고 심적 압박감 속에서 살아야 하며, 북경과 모스크바는 자유롭게 왕래하건만 정작 지척에 둔 우리 땅은 아예 갈 엄두도 못 내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분단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칼을 쳐서 보습으로 만들고" 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평화의 비전(이사야 2:4)이 6월이면 한층 더 그리워집니다. "주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마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분단 50년의 포로기가 끝나기를 바라면서 희년의 기대에 한껏 부풀었던 1995년도 실망스럽게 지나갔고, 올해도 벌써 반년이 지나갔건만 별다른 희망의 징조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국민들은 이제 너무나 많이 속고 너무나 자주 실망한 나머지 아예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상태로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지구상 유일한 분단 국가라는 수치 앞에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민족입니다. 동족끼리 어쩌면 싸워도 저렇게 지독하게 싸울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정말 완악하고 미련하고 못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주위의 강대국들이 보다 못해 뜯어말리려고 애쓰는 듯 하는 데도, 마치 머리채 휘어잡고 싸우는 두 여인의 안쓰러운 모습과도 같이 추태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그기를 몰고 온 귀순 용사의 인터뷰에서 소위 남한 점령 7일 작전을 공개했다가 미국무성의 반박으로 국제적 망신을 당한 일이 있으며, 그런가 하면 북한의 수해 보험금 수령 액을 열배로 부풀렸다가 미국 대사에 의해 정정되어 또 다시 망신을 당했습니다. 사실, 남북한은 50년간이나 서로 건재해 왔으면서도 이제나저제나 저쪽이 금방이라도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예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말로는 북한의 붕괴를 원치 않는다고 하지만, 내심은 언제 붕괴될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의 식량난을 돕는데 그렇게 인색하게, 국제 압력에 못 이겨 마지못해 동참하는 못난 모습을 보일 리가 없습니다. 4자 회담으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이라 말하지만, 북한이 그렇게 압력에 굴할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나 같은 문외한도 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 인간은 개인으로나 집단으로 서로 상처를 주고 원한을 사고 원수를 맺으며 삽니다. 이 원한은 풀지 않으면 오히려 증폭되고 누적됩니다. 이것이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사회의 모습입니다. 죄란 바로 평화롭고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서로 적을 만들고 원수지게 하는 파괴적 힘입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이 죄의 힘에서 오는 것입니다. 죄란 인간관계를 갈등과 대립 분열과 증오로 망치게 하는 힘입니다. 인간역사는 증오와 원한으로 가득한 역사입니다.
우리 무속 전통에서는 원혼들이 구천을 헤매며 산 자들에게 해꾸지를 한다고 소박하게 말하지만 결국 같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깨어지고 상처받은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용서와 화해뿐임을 가르칩니다. 용서와 화해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용서와 화해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고후 5:18-20). 화해의 역사를 창조하는 그리스도의 사절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용서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아니, 용서란 아예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한다거나,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 자를 용서해 보려고 노력해 본 사람은 다 고백하는 사실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과한다 해도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가 않고, 그 사람을 보기만 하면 자꾸 생각나서 괴로워집니다. 물론 시간이 가면 사무쳤던 원한도 강도를 잃어 가고 끝내는 잊혀지기도 하기에 우리가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로 잊는다는 것,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용서 못하고 사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나마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용서의 대용물일 것입니다. 망각은 원한의 자연적 치료제라고나 할까요. 시간이 가면 기억도 희미해지고 분한 마음도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46년이나 되어 잊을 법도 한데,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하면서 6.25를 잊기는커녕 새삼 기억을 들추어내어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증오심을 북돋으려 하고 있습니다. 실로 용서라는 것, 잊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기억을 잘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실 때(이사야 43:25), 그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컴퓨터처럼 일일이 기억하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떳떳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어려운 일일뿐만 아니라 그렇게 간단한 일도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용서가 무조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용서란 대단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잘잘못을 가리지도 않고 덮어놓고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특히 우리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용서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개인적 차원의 경우는 자기가 손해보면서도 얼마든지 남을 용서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차원의 문제가 되면 일이 훨씬 복잡하게 됩니다. 사회적인 차원의 경우에는 쉽게 용서해줌으로 인해 대다수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사회 전체에게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가운데는 용서는 무조건 해야 하는 것,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가령, 지금 진행 중인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의 경우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판도 필요 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서슬 퍼럴 때, 저는 서울대학교의 어느 교수­독실한 신자요 유명한 교회의 장로­가 "기독교인들은 독재자라도 미워해서는 안 되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얘기지만,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첫째,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분명히 피해자만이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피해도 안 본 사람이 대신 용서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용서의 문제에 제 삼자가 나서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혼자서 분을 삼키다가 겨우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가도 제 삼자가 "용서해야지" 하는 말을 너무 쉽게 내 뱉으면 용서할 마음이 싹 달아나는 경험을 합니다. 광주 사람들이 전두환씨를 용서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희생자 유가족들의 용서는 결정적입니다. 물론 독재자는 국민 모두에게 잘못을 저질렀고 국민 모두가 용서의 권리가 있기는 하지만, 직접 희생을 당하거나 희생자 유가족의 권리는 우리의 권리와는 다릅니다. 희생자 유가족이 용서하지 못하는데 옆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둘째로, 용서는 회개와 뉘우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 집단적인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정의를 외면한 사랑이 됩니다. 사회 정의는 많은 사람을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정의와 사랑을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는 대다수를 위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 사랑을 외면하고 한 두 사람의 값싼 동정심으로 무조건 용서한다는 것은 사랑과 정의를 배반하는 행위입니다. 사랑 없는 정의가 파괴적이기는 하나, 정의 없는 사랑은 무책임한 사랑이요 다수에 대한 사랑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용서는 분명히 회개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다른 제자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누가 17: 3-4). 용서는 분명히 회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를 우리 국민들이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서 진정한 회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김영삼 정권이 재판 후에 혹시 사면이라도 하면 가만 안 있겠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또 우리가 일본을 용서하기 어려운 것도 과거의 행적에 대한 진정한 뉘우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주에선 한일 정상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 까다로운 감정문제는 빗겨 가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2002년 월드컵을 공동 개최한다 해도 화합의 공동 개최가 될 수 없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압니다. 정신대로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다 당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일본 정부의 말 한 마디이지 돈 몇 푼이 아닙니다. 가해자에게 사과를 구걸해야 하는 우리 모습이 안스럽기까지 합니다.

뉘우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어렵지만, 용서의 전제인 회개,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은 더 더욱 힘든 일입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의 본능적입니다. 자기 정당화, 자기 방어의 본능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모두가 할 말이 있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먼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행여 대범하게 마음먹고 용기를 내어 사과를 하다가도 은근히 자기변명으로 빠져 버리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사람이 과연 사과하러 온 것인지 변명하러 온 것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결국 변명하러 온 것이며, 그래서 상대방을 더 화나게 합니다. 결국 또 다시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깨끗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구차한 변명 없이 사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자기정당화의 집착­부모 자식간, 부부지간, 친구 동료지간­이 뿌리 깊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과에는 두려움도 따릅니다. 특히 약자의 경우에는, 행여 상대방이 사과를 받아 주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수모 당하고 자존심 상하느니 그냥 초지일관 모르는 체, 강심장으로 무시해 버리는 게 낫다, 뻔뻔스럽지만 밀고 나가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과를 어렵게 하는 것은 약자의 두려움보다는 강자의 오만입니다.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약자의 한이 얼마나 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힘이 있는 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일본이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사실, 강자는 심리적으로는 약자보다 사과하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어렵습니다. 사과를 안 하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오만, 너 아니라도 잘 살 수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반대로 약자는 심리적으로는 사과하기 어렵습니다. 두려움이 있고 열등감에서 오는 자존심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약자는 사과를 위한 심적 여유가 없습니다. 북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또 약자의 사과는 비굴한 사과, 강요된 사과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에게는 사과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를 어떻게 강요할 수 있습니까? 자발적인 것은 좋으나, 신뢰가 먼저입니다. 용서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먼저 심어주어야 합니다. 선의, 호의를 먼저 보여야 사과할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약자는 쉽게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일본이 진정으로 뉘우치기만 한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해를 하고 싶기에, 강자의 도움을 바라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강자는 사과하지도 않고 사과 받지도 않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약자는 약자대로, 강자는 강자대로 진정으로 사과하고 뉘우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용서가 없이는 빗나간 인간관계가 근본적으로 회복될 길은 없습니다. 용서란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 드러났으리라 생각됩니다.

진정한 회개와 용서는 결국 인간의 논리, 인간적인 차원만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새로운 인간관계의 회복,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인간의 타산이나 전술전략으로, 외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새로운 차원이 개입되지 않는 한 진정한 사과와 용서는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인간이 망친 인간간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단순한 신앙의 논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한 우리들의 교만, 우리들의 힘의 논리, 자기정당화의 논리는 결코 꺾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그리고 용서가 무엇인지를 경험해보지 않는 한 용서와 화해의 기적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교만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진정한 화해와 기적의 새 역사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야 강자이든 약자이든 자신의 잘못을 서로 인정하는 겸손이 우러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경고적으로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단적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서 분개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런 못된 놈이 있나, 은혜도 모르는 얌체 같은 놈이라고 비난을 퍼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행여 이 악한 종과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존재라는 사실을 이 비유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라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부터는 오직 이 놀라운 은혜 때문에 자유의 몸이 되어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된 존재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은총을 잊지 말고 항시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할 때, 우리의 교만은 꺾일 수밖에 없고, 진정으로 남이 우리에게 범한 잘못도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점을 오늘의 비유의 말씀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기독인은 모두 하나님께 은총의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기독인 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가 다 그렇지만, 기독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기독인은 이 은총의 빚을 동료 인간들에게 갚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에는 방정식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 자만이 사랑할 수 있고, 용서받은 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혹은 주위 사람들에게 비판만 받고 자란 사람은 남에게 관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고쳐야 할 나쁜 버릇 중에 하나가 남을 비판하기 쉬운 버릇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하나님이 늘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 율법주의적 신앙 등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쉽게 남을 비판하게 만듭니다. 특히, 목사나 장로의 아들들, 교육자들의 자녀들이 이러한 모범생의 압력을 많이 받다보니 자연이 삐뚤어지기가 쉬운 법입니다. 잔소리 많이 듣고 자라면 잔소리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과 율법적 설교를 많이 듣고 자라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됩니다. 관대한 마음, 너그러운 마음이 없어집니다. 신앙은 이렇게 잔소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총의 하나님, 너그러우신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지고, 남을 향해서도 솔직하고 겸손한 인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고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총으로밖에는 살 수 없는 자이며, 저 사람도 나와 같이 은총을 필요로 하는 자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자비와 관용을 베풀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악한 종은 바로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순간의 위기만 면했을 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지 못했고 기억조차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졌던 빚하고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적은 빚을 진 자를 만나자 닥달을 한 것입니다. 이 악한 종은 결국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 했을 뿐 진정으로 뉘우치지도 않았고 은총에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은총을 배반한 자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먼저 은혜를 베풀면서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기도입니다. 함부로 드리기는 어려운 기도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마치 용서 받기 위한 조건이라도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것처럼 이해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실, 은총의 세계에서도 뻔뻔스러움만은 안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일방통행은 없고 받는 대로 자기도 주어야 합니다.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려는 자는 결국 받은 것마저 다 토해내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용서를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올바른 마음가짐이요 자세입니다. 곧 겸손과 회개의 마음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용서의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구하는 자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용서를 구한다면 자기모순입니다. 마땅히 남을 용서하면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은 진정한 회개뿐입니다. 그런데 이 진정한 회개의 마음이란 결국 타인에 대한 용서와 관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요 빚진 자들이라는 동료의식 속에서 우리는 서로 용납하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악한 종과 같이 용서받기는커녕 베풀어졌던 은총마저 취소되고 마지막 한 푼이라도 갚기 전에는 풀려나지 못하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6월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우리 민족에게는 그야말로 잔인한 달입니다. 46년의 세월이 지나 상처가 아물만도 한데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아물만 하면 자꾸 상처를 긁어 악화시키는 자들이 이 땅에는 아직 너무 많습니다. "상기하자 6.25" 구호를 외치면서 분노를 되새기고 증오를 부추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잘난 것 하나 없는 우리 민족,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진 이 민족이 이만큼 사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깊이 감사하면서 우리보다 못살고 약한 우리 동족에 대하여 오만하지 말고 겸손히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좀 잘 살게 되었다 하여, 돈 좀 있다 하여 교만해서, 북한을 옥죄이고 압력을 넣고 국제적으로 조정하고 지배하려 하니 문제가 풀릴 리가 없습니다. 나는 외교 전문가는 아니지만, 남북한 문제는 결코 정치 외교적으로는 풀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으로 접근해야 결국 풀릴 것입니다. 이것은 곧 남북한이 너나 없이 하나님 앞에 함께 죄인임을 자복하고 서로간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있기 전에는 진정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며, 통일을 해도 미움과 갈등의 불씨를 안은 불완전한 통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정치적 통일보다 중요한 것이 화해하려는 마음, 용서하려는 마음의 화합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아무런 조건 없이 "잘못했다", "미안하게 됐다" 하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까? 약자보다는 강자가 먼저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입니다. 강자인 하나님께서 약자인 우리 죄인들을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회개와 뉘우침을 촉발하신 것입니다. 먼저 찾은 것은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입니다. 약자에게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며, 약자에게 남은 것은 자존심 하나뿐입니다. 그것마저 버리고 먼저 머리 숙이고 용서를 구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짓입니다.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집하는 한 오늘의 비유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총을 배반하는 악한 종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우리에게 베푸셨던 자비와 은총을 거두고 우리에게 더 가혹한 요구를 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받은 은총에 감사하면서 교만하지 말고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삶을 살 때입니다. 받은 바 은총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그 은총을 감사하면서 남에게 베풀며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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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 누가복음 영원을 향한 삶 눅16:19∼26  임영수 목사  2009-07-13 2257
1759 마가복음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 막2:1∼12  임영수 목사  2009-07-13 1900
1758 창세기 동행하시는 하나님 창13:5-15  강종수 목사  2009-07-12 2857
1757 마태복음 풍랑을 잠재우신 하나님 마8:23~34  조용기 목사  2009-07-11 2204
1756 에배소서 나는 얼마나 부자인가? 엡1:17~19  조용기 목사  2009-07-11 2155
1755 시편 하나님이 보시는 나 시103:8~17  조용기 목사  2009-07-11 2276
1754 누가복음 의로운 죄인과 더러운 죄인 눅18:9~14  조용기 목사  2009-07-11 2492
1753 요한복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요15:1~8  조용기 목사  2009-07-11 3646
1752 요한계시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계3:19~22  조용기 목사  2009-07-11 1745
1751 고린도후 고난의 길은 영광으로 통한다 고후4:17~18  조용기 목사  2009-07-11 1942
1750 마태복음 왜 선교해야 하나? 마28:19~20  조용기 목사  2009-07-11 2123
1749 에배소서 영의 세계 3가지 법칙 엡1:10  이천수 목사  2009-07-10 3268
1748 에배소서 하늘과 땅의 원리 엡1:22  이천수 목사  2009-07-10 2071
1747 고린도전 사랑의 나라 고전13:8~10  이천수 목사  2009-07-08 1774
1746 디모데후 돈보다는 사람을 사랑하자! 딤후3:2  이천수 목사  2009-07-08 2031
1745 누가복음 산자의 하나님' [2] 눅20:34-38  이천수 목사  2009-07-08 2605
1744 요한계시 부활의 능력 계3:21  이천수 목사  2009-07-08 2740
1743 마태복음 뜻이 하늘에서 마6:10  이천수 목사  2009-07-07 2636
1742 에배소서 '우리 모두 한 지체다' 엡5:30  이천수 목사  2009-07-07 2291
1741 마태복음 사망의 포위망을 뚫자 마7:1-10  이천수 목사  2009-07-06 1993
1740 고린도후 삼층천의 축복 고후12:2-5  이천수 목사  2009-07-06 3406
1739 마태복음 사랑이 팔자다 마16:16-18  이천수 목사  2009-07-06 2115
1738 창세기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창4:1-15  이천수 목사  2009-07-06 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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