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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바라보기

요한복음 최용우............... 조회 수 1335 추천 수 0 2008.10.26 23:42:29
.........
성경본문 : 요10:11-18 
설교자 : 윤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7.7.29주일설교 
제목: 세상 바라보기
본문: 요한복음 10:11-18
설교: 윤여성 형제  (새길교회 2007.7.29주일설교)

새길교회에 어떻게 나오시게 되셨습니까? 오신 이유는 각 자가 다르겠지만, 다른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셨던 분들 중 저를 포함하여 많은 분들은 교회의 문제 때문에 새길교회로 오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문제라면 크게 두 가지로, 목회자문제와 딱딱한 기독교의 문제라고 요약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목회자의 문제겠지요. 계속 방송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일부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의 문제는 이제 신물이 날 정도가 되어 언급하기도 싫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이 땅의 수많은 교회들의 목회자들도 상당수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하는 행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한국교회의 더 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의미를 잘못 해석하게 하여, 목회자가 모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권한을 마구 휘두릅니다. 마치 예수님 살아생전에 제자들이 ‘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을 일으킨 것처럼 세상권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에 대하여 명확하게 누가복음 22:24~30에서 “너희가 생각하는 세상권세가 아니며 진짜 큰 자는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명쾌하게 답변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기독교는 다른 교리를 채택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런 비판의 이야기를 하려면 하루 종일해도, 아니 일 년 열두 달을 하여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정반대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큰 분노와 실망으로 새길교회를 찾게 되었지만, 지금 소개하려는 목사님과 같은 이름 모를 많은, 한국의 산야를 지키는 목사들을 알고 나서 더 이상 비판의 소리보다는 아름다운 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고 합니다.

2005년 어느 날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이름 모를 목사의 부고 내용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름은 전상수요 호는 만득이, 또는 허이라고 합니다. 만득이란 뜻은 ‘나는 모든 것이 늦었다. 예수의 도에 들어 온 것도 늦었고 깨닫는 것도 늦었다’는 의미로 스스로 붙인 것이고, 또 하나 虛耳(허이)라는 의미는 한글로 하면 사람을 부를 때하는 의미 없는 말이 되고 한자의 뜻으로 하면 ‘그냥 비어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범상치 않은 분의 시를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면'입니다.

깊은 산골에
시리도록 맑은 도랑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녀석들,
흘러가는 동안
마을을 지나고,
도시를 지나면서
더럽혀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녀석들은 결국
뭇 생명의 품인
바다에 닿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세상이라는 곳을 지나가는 동안
때가 묻기도 하겠지만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마침내
무궁한 생명의 근원에 다다를 것입니다.
이런 시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새벽기도를 하다가 쓰러져 운명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죽기 1년 전에 사순절을 맞아 썼다는 유언을 읽으며 저는 숨이 멈추는 것 같은 충격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수의 도에 입문한 지 28번째 되는 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그의 유언입니다.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이 또한 감사하노라.

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
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
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사랑하는 이들이여 !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목회를 위한 목회, 교회를 위한 목회를 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목회를 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노라.  

이 유언을 읽은 후에, 저는 비판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 시간에 가능한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이지요. 한 사람의 모범적인 삶이 전혀 알지도 못하던 저에게도 큰 파장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삶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성경본문 11절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선한 목자와 삯군을 우리는 확실히 구별 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두 번째 문제는 딱딱한 기독교라는 문제입니다. 딱딱한 기독교란 교조적 기독교로, 세상 것을 스폰지처럼 흡수하지 못하고 웬만한 어려움만 만나도 부스러지는 기독교를 말합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 탓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은 잘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적절한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술을 먹는 문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지난해부터 저는 집에서 가끔 집사람하고 맥주 한 잔 정도를 기분 좋게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저는 원래 술을 잘 먹었지만 술을 끊었지요. 끊은 지 13년 만에 다시 맥주 한 잔을 하게 된 상태가 됐습니다. 물론 이제는 저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는 사람들도 없고, 또 제 자신이 더 이상 술의 노예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제력을 갖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맥주 한 잔씩 하지만, 이제는 술을 먹고 개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저에게 묘한 심리적 변화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술을 잘 먹던 시절에 교회를 다닐 때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제 마음 속에 죄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요, 술을 끊고 교회를 다닐 때는 알게 모르게 제 자신의 공로주의가 생각을 지배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인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세상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지요. 마치 이런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성장기에 우리는 ‘의자에 똑바로 앉아’, ‘자세를 똑바로 해’라는 말을 수 없이 들어 왔습니다. 실제로 성장기에는 꼭 필요한 말입니다. 잘못하면 뼈가 휘어지고 이상한 자세가 될 수 있으며 질환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성숙기에도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평생 그런 말을 들으며 살 수는 없습니다. 자세를 똑바로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유익이 되지만, 이 상태에서 머문다면 우리는 군인의 자세와 같은 그런 모습이겠지요. 믿음 역시 마찬가지라 신앙 초기에는 바른 성장을 위해 이런 저런 잔소리들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에서 자라지 못하고 머물면 딱딱한, 교조적 기독교에서 벗어나기 어렵겠지요.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나쁜 자세로 있다면, 이상한 자세가 되어 질환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도 없이 형식만 추구하는 기독교도 문제지만, 형식도 없이 내용만 강조하는 기독교도 문제가 됩니다.

일전에 TV에서 터키에 있는 동방교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터키에 가 본적이 있는데, 그 때도 어떻게 이슬람지역에 동방교회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TV에서 묘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동방교회 내에서 허드렛일은 주로 터키인들이 하고 있었는데, 그 터키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였습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다가 이슬람교의 기도할 시간이 되면 교회 마당에 담요를 펴고 기도하고 있었고, 그 옆을 동방교회 기독교 수사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었습니다. 또 빵을 굽는 시간에는 기독교 수사들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일꾼들도 모두 모여 기쁘게 빵을 만들고 굽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지역에서 기독교인 동방교회가 생존할 수 있는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전쟁을 벌이는 그런 기독교정신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이 많은 진정한 기독교정신을 가진 동방교회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다가 어떤 글이 생각났습니다. 아마도 이현주 님의 글로 기억되는데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생각이 나서 오래 전에 적어두었던 공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주목하기는 근육운동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주목하세요.”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썹을 모으고 숨을 들이쉰 채 근육을 바짝 긴장합니다. 주목을 일종의 근육운동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2분 후에 무엇을 주목했냐고 하면 대답을 못합니다. 근육에 힘만 주었지 진짜 해야 할 것은 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잔뜩 힘만 주고 있지는 않은지요. 지금껏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노력한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근육에 힘주는 것과 참된 주목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딱딱한 기독교를 벗어 던지고 스펀지 같은 기독교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기쁘지 않을 때는 그대로 정지하고 일하지 말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냐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할 것이고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럼 왜 우리를 사용하시느냐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고 그 일을 통하여 참 기쁨을 느끼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천국의 삶을 맛보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없어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결국 내 손해인 것이지요. 하나님의 손해가 아니지요. 믿음은 기쁨 속에서만 자라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인 나,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저에게도 이 같은 체험이 있었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1년 동안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제 안에서 “이제 50이 되어 가는데, 너도 제 2의 인생을 살 준비를 해야 하지 않니?”라는 내면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손쉽게 할 수 있는 봉사의 길을 찾아보리라 생각했습니다. 집사람과 상의했더니, 집사람이 관련 맺었던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책을 읽어 녹음하는 일을 하면 어떠냐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몇 개월이 지난 후에, 전에 생각했던 일이 생각나 복지관에 가서 봉사자신청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복지관에서 녹음을 해보고 일주일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더 지나도 연락이 없었습니다. ‘짤렸구나….’ 아침에 학교에서 Q.T.를 하다가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아니 제가 시간을 내서 봉사를 하고 좀 도와주려고 하는데, 왜 못하게 하세요. 무슨 뜻입니까?”약간 대들 듯 질문을 했지요. 조금 있으니까 저에게 울림이 있었습니다. “네가 뭘 도와줘. 네 도움은 필요 없다. 봉사라고…. 난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어. 너에게 기쁨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잖아. 네가 너의 것을 준다고 생각하면 하지마라. 할 필요가 없다.” 깜짝 놀랐습니다. 곧 회개하고 다시 기도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도와준다고 착각했음을 고백합니다. 저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인 것을 알고 기쁘게 하겠습니다.” 오후에 전화가 왔습니다. “일이 밀려서 연락드린다는 것이 늦었습니다. 복지관에 오실 수 있지요.” 물론 고맙다고 제가 인사를 했습니다. 전화기를 놓고 멍하게 있었습니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간의 녹음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저에게 일거리가 주어진 것입니다. “윤 선생님, 어떤 분이 마사지에 관한 책을 녹음해달라고 하는데, 이 책이 온통 의학용어라 읽어 줄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읽어주실 수 있지요?” “걱정 마세요. 제 전공인데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책은 인체의 근육들, 해부학용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읽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책을 의뢰하신 분이 어떤 분인지 아직도 모르지만, 그 분의 기도와 저의 기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필요한 시점에, 합당한 마음자세를 갖게 하여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열려있으면, 오늘 성경본문 14절의 말씀과 같이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을 체험하게 되겠지요.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2시간도 체 못하는 일이지만, 그 시간은 제 마음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이 기쁩니다. 어쩌다 그 곳에서 주선경 선생님을 뵙는 보너스 기쁨도 있고요.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고 제 안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함을 체험합니다. 다윗이 고백한 말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을 약간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본문 17절 이하 말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이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지났지만, 엉뚱한 이야기 하나 하고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나서 군대에 갔습니다. 제가 장교훈련 중에 아내가 아이를 낳았거든요. 아버지가 아이를 낳는 산모 옆에 없다는 것이 그렇게 큰 죄인일 줄은 그 때는 몰랐습니다. 여하간 그렇게 결혼생활을 했는데 많은 이사경험을 했습니다. 16번인가를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할지는 모르지만….

물론 저보다는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전방에서 세 식구가 군 생활을 했으니, 물 부족으로 새벽에 일어나 물 받던 일들, 물지게로 지어온 물을 사먹던 일 등, 많은 일들이 있던 어느 날, 집사람이 저녁에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오늘 낮에 장보고 오다가 어느 집 담 밑의 구멍으로 하수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그 물을 바라보다가 왔다”고 하면서, “물을 그렇게 쓸 수 있으면 참 행복할 텐데” 하는 말을 하는데, 그 시절 철부지 남편이었던 저도 마음이 참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며칠 전에 집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집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우리의 삶에 어려움과 고난, 고통이 없었다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냥 그럭저럭 예수 믿고 복 받아 잘 산다고 생각하고 살았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삶이었다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어. 진정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산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지 못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살게 하시고, 삶의 여정 속에 계속 악한 세력과 싸워야하는 불편함과 괴로움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신앙은 근육과 같아서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는 말처럼,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 그런 주위환경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하나님을 조금은 알게 되어 참으로 기쁘고, 그 삶으로 이끌어주신 예수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직은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새로운 눈,
새로운 관점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겠지요.
저와 우리 새길교회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더욱 더 알게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를 죽음에서 살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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