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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신앙

마태복음 강종수목사............... 조회 수 1829 추천 수 0 2008.01.13 17: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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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0:28-32 
설교자 : 강종수 목사 
참고 : 사이버신학교 http://cafe.daum.net/st888 
고백하는 신앙(마10:28-32) 

주님이 지상에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작업으로 먼저 12명의 사람을 불러 제자로 삼으시고 제자들이 명심하고 지켜야할 교훈을 하신 내용이 본마태복음 10장을 '제자도' 라고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가르치셨는데,전반부에 돈과 세상 문화에서 탈피할 것을 일러주셨습니다.즉 지도자로 나서려면 잘먹고 잘사는 세상 문화에 관심을 끊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두 번째의 교훈인 두려워말라는 것과 셋째는 죽을 각오하라는  내용으로 아주 심각하고도 강한 어조로 당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의 교훈인 사람을  두려워 말라는 내용 중심에서 두렵지않게 여긴다면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고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백하는  신앙이란 주제어로 교훈에 대한 말씀의 내용을 살피고자합니다. 참된 신앙고백의 사람이 되려면,

1. 내 생명 존재의 기원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8-29『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참새도 하나님의 관리에 속한다면 참새보다 귀한 사람 중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는 더욱더 관계와 관심과 결속이 분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생사화복의 근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창조주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경외하는 태도입니다.사람은육신만 죽이지만 하나님은 몸과 영혼 전부를 능히  지옥으로 멸하시는 분이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시요 인생의 심판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뜻으로 하나님을 신앙할 뿐 아니라 두려워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겁내지 않고 있다는 뜻이고 결국 심판에 대해 모르기도 하고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시작을 보면서 만물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에 두는 성도는 모든 생활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나타내시고 소문이 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따르게 되었을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마 16:13-16『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을 또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고 바로 되면 축복을 받게도 되는 것입니다.적어도 내가 믿고 있는 신에 대하여,구주에 대한 인식과 그 이해 속에 살아가는 삶의 표현이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속에 섞여 있을 때,어떤 결정과 어떤 감정의 표현마저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어정쩡할지라도 성도는 확실해야 옳습니다.

예수 믿는 자는 교회에 살짝 왔다가  다녀가는 숨은 자가 아니고 마치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사람처럼 결국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고 표시하면 손해볼일도 많아지고 자연히 사회인들의 짧은  선입견의 요구에 의해 희생도 따르고인내와 불편하게 하기까지 할 여러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대신 우리는 상황에  적절히 기독교인의 임무적인 선택과 표시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신앙인으로 사는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표시 못하는 태도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두렵다는 말이지요?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몸을 죽이고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사람을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 모두를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사람과 하나님이 비교가 안 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은 신으로,창조주로인정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이제는 믿었다면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고하나님의 뜻을  더욱 두려워하고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는 자가 되어야 주님이 더욱 우리를 기뻐하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시 56: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히 13:6『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우리를 우리 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2. 하나님의 간섭을 사랑으로 아는 자들이 믿음을 고백합니다

마 10:30-31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머리털까지 세신다는 것은 심판적인 뜻이 아니라 눈동자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뜨겁고 섬세하신 사랑의 표현입니다.사람들이 죄를 회개치 않고 이 구절을읽으면 나를 속속들이 살펴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일을 꾸미시고 말씀을 통해 나를 불러주셨는가를  깨닫는 자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머리털까지 세시듯이 나를 아끼시고 간섭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읽혀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상 중에 지켜주신다고  믿는다는 것만큼 위대한 축복의 의지가 또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도라면 실제로 그렇게 여기는 정신이 있어서세상을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나아가던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보면 현실적 상황보다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기다리는 그의 태도를 여러 경우에서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함께 거할 때 소유가 너무 많아 양떼를 키우는 양쪽 목자들끼리  서로 싸움이 일어나서 아브라함이 조카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여 간격을 두자고 제의했습니다.그 때 아브라함은 조카부터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기회를 준 것은 그가 믿는 하나님의 간섭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상황판단이 둔해서가 아닙니다.창 13: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창 13:14-15『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쟁을 치를 때 키가  2미터 넘는 철갑으로 완전 무장한골리앗이 말하기를 이스라엘 너희 중에 한사람 나와서 나하고 겨워 이기면 너희들의 종이 되겠노라고  선언을 하였지만 이스라엘 군인들은 너무도 큰 골리앗의 위풍당당함에 질려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 형제들 중 말 째가  되는 다윗이 전쟁터에 있는 형들을 먹일 음식을 들고 가라는 아비 이새의 심부름을 행하러갔다가 거대한 골리앗 앞에 두려워 떠는 이스라엘 군대의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하는 말은,삼상17:36『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을 진입할 때,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40일간 땅을 살피고 오라고 명하여 보냈을 때,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10명의 보고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무서운 군대와  가나안 족속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낙담을 했습니다.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완전히 다른 고백을 했습니다.

민14:8-9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두려워 말라 하나』

3. 사람 앞에 시인함으로 신앙인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합니다

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기독교 신앙은 산 속에 묻혀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뜻도 없고불분명한 근거로 무조건 절이나 하고 비는 우상 종교도 아닙니다.그렇다고 가족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역사를 무시하는 교도 아닙니다.기독교는 역사 속에 현실과 함께 그 종교 활동의 역사를 함께 해 온 종교이기때문에 기독교 신자가 되면 사람사이에서 자기 신앙에 대한 양심적 고백이 뚜렷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사상에 대한 고백을 할 때 혹시나 어려워질까 해서 빠져나갈 궁리로 어설프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회는 합리적이고 더욱 한국인의 정서가 또 문제가 되어  일반적으로 자기 주장에 대해 확실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미덕같이 여겨집니다. 잘못된 것이지요.

6.25 전후로 가장 두려운 존재는 공산당이 아니라  공산당도 아니고 자유당도아닌 회색분자들이었습니다.어느 사회 속에도 여전히 그런 기회주의자들은 있습니다. 유리한대로 철새처럼  날아가고 붙어 다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예적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상대입니다.

정치가 자기 영화를 위한 직업이 되는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한 때는 여당을밀다가 또 세상 바뀌면 야당에 붙어서 자기 입지를 확보하는 정치관이나 철학이 없는 의원도 볼 수 있습니다.일제 때,신앙고백과 평범한 자유 세상에서 직장과 가족관계 속에 우리들의 신앙고백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때는 죽음을 걸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수많은 종들과 성도들이 믿음의 양심적 고백을 함으로 순교를 받거나 고난을 받았습니다.그러나 소수의 무리를 빼고는 모두 주를 부인하고  한국교회사에 치욕적인 배신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태양신 신사를 향하여 예배드리는 중에도 12시가 되면 동쪽을 보고 절을 했다하니 참으로 지금의 처지에서 생각할 때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활 중에 사람들 앞에서 신앙인의 가치관이나 일을 결정과 선택에 있어서 비신앙적인 처세를 보이는 것은 생활중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세상이 두렵고 근심되고 걱정이 되어서 신앙적으로 못 살아가는 것은  일제에 배신행위하고 똑같습니다. 하나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는 목숨을 바로 걸고  선택해야 했지만 지금은 꼭 죽음을 두고 선택할 일도 아닌데, 욕심과 염려로 인해 신앙적 선택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시시하다는 것이지요.
일제 때처럼 일시적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경우는 제자 베드로에게도 있었습니다(마26:69-74). 그러나 베드로는 제대로 회개하여 통곡했지만 한국교회는 아직도 그 때 일에 대해 잘했다고 하는 원수보다 더 기막힌 어떤 교단의 교수와목사도 있습니다.

타협으로 고난을 피한 그 때의 배신행위는 오늘의 실생활 속에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점은 기복신앙주의로 만연해져서 하나님께 아주 조건적이고 상업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더욱 문제입니다.

가령 십일조를 하면 복을 주신다는  결정으로 마치 요술 방망이처럼 하나님을믿겠다든가,교회 나와서 이런 저런 편리를 받아서 행복하다든가 하는 식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참 좋은 결과라 여겨도  주님이 심판 날에 나는 너를 모르겠다 해버리시면 끝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해도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만 좋아하면 바른 신앙이 안됩니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병 낫고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믿는다고한다면 만약 병 낫지 않고 큰 부자 안되고 문화적으로 부요하지 않을 때 그러면 하나님을 안 믿을 겁니까? 그렇게 복만 받아서 세상을 잘 살겠다는 식으로믿는 것을 기복신앙이라 하며 비판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죽든지 살든지 주의 뜻을 솔직하고 확실하게 고백하며 사는 성도를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가령 유다가 바벨론에 끌려가 압제 당하여 살 때,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을 위한 우상을 만들어 모든 백성이 경배하게 했고  거부하는 자는 불 가운데 던져죽이겠다고 했습니다.그때 다니엘의 3친구가 한 말은 너무나도 중요한 신앙고백이었고 우리가 본 받고 지켜야 할 내용입니다.

단 3:16-18『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17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세상에 주셔서 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사 영생부활 주심은 무조건적이었습니다.성경은 누누이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양심의  고백도 어떤 상업적이고 조건적인  고백이 아니라 무조건적 양심의 고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자기가 기독신자라는 것을 표시하지않는 것은  그 어떠한 상황에도 옳지 않습니다. 게다가 누가 묻는데도 부정하거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참으로 그 결과가 어떠할지 두려운 일입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적 신앙생활, 분명하게 자기 신앙 주장을 성경대로 펴는정체성의 확립은 너무도 중요합니다.이것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진정한 새로운 자아를 건지는 일이며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올 한 해는 범사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앙 양심적 고백이 분명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기독 신앙인은 진실해야 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나의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고백되어지고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가식적이고 자기 신앙인격도 아닌 거저 듣고 알고만 있는 지식으로 자기 신앙인격과 생활같이 여기거나  말만하는 신앙은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면서 머리털까지 세실 만큼 우리의사정 속속들이 다 아시고 지켜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무슨 일을 만나도하나님 바로 앞에 모셨듯이 정직한 신앙 고백을 하면서 처신하고 기도하고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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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이버신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 nulser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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