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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할 자

마태복음 길희성............... 조회 수 1914 추천 수 0 2008.05.16 09: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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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4:1-11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세상을 구할 자


이제 대선을 한 달도 안 남긴 바야흐로 본격적인 정치 계절이 왔습니다. 치열한 대권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의 마음은 이미 딴 곳에 가 있는 듯합니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경제 한파가 닥쳐 온 국민의 마음을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휘청거린다 싶더니 어느 새 국가가 부도를 내고 국제 통화기금에 경제 주권을 넘기고 구걸을 해야 하는 국제거지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라고 표현합니다. 경제가 엉망이라 대권을 잡아봐야 부담이 클 터인데 대통령은 되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또 누가 대통령이 된들 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허지만 이것은 우리들 생각이고, 후보자들은 저마다 잘 났다고 하며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다는 듯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 칩니다. 하기야 무능한 현 정권보다는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경제 문제에 대처를 좀더 신속하고 현명하게 할 여지는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대통령처럼 팔짱만 끼고 구경하다가 - 이 사람은 마치 대선의 공정관리가 대통령의 주임무나 되는 것처럼 목에 힘 주고 있다가 - 뒤늦게 경제를 챙기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버스 다 지나간 다음에 손 흔드는 격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나라의 경제위기는 기본적으로 대통령이나 경제기획원 장관이 잘 못해서라기 보다는 기업은 기업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분수를 모르고 허풍과 거품 속에서 흥청망청 지낸 결과일 것입니다.


국민의 마음은 이제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쏠리어 있습니다. 이러한 국민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여전히 대권을 향한 이전투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은 여론의 향배에 따라 우왕좌왕하며 싸움질과 눈치만 보다가 시급한 금융개혁법안을 끝내 통과시키지 못한 채 회기가 한 달이나 남았는데도 일찌감치 문을 닫으려다가, 이제 다시 뒤늦게 법안을 통과시키겠다고 허둥지둥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공직자들은 일손을 놓은 채 대권의 향방만 지켜보며 줄서기에 한창입니다. 국민들도 들떠서 자기 일은 팽개친 채 마치 링 위의 권투 선수 구경하듯 하다가 갑자기 국가부도라는 날벼락을 맞고 어안이 벙벙해진 셈입니다.

정치는 참으로 역설적인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정치이건 권모술수가 동원되는 더럽고 추악한 게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단 우리 한국 정치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좀 심하기는 하지만, 정치가들은 모두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 방법이 국민의 수준, 민도의 수준에 따라 좀 세련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고, 좀 점잖기도 하며 좀 치졸하고 노골적이기도 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역설성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치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경제도 군사도 중요하고, 문화도 교육도 종교도 다 중요하지만, 온 국민의 역량과 자산을 어디에다 쓸 것인지 무엇에다 투자해야 하는 것인지를 결정하고 모든 활동의 게임 룰과 틀을 정하는 것은 역시 정치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그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회의 공동선을 이룩하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그야말로 현세에 있어서의 인간 구원의 수단입니다.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사회적 구원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말입니다.

정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아무리 꿈과 이상이 높으면 무엇 하는가, 우선 권력을 잡아야 그 다음 이상을 실현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변명과 구실을 늘어놓으면서 야합과 권모술수를 일삼습니다. 이념이고 원칙이고 헌 신짝처럼 내버리고 표만 얻는다면 누구에게든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이른바 라는 이름 아래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당화됩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정말 저런 사람들이 집권하면 국민을 위한 정치, 사회의 공동선을 실현하는 정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우리가 보아온 대로 권력을 남용하여 자기 이익만을 챙기기에 급급할 것인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사실, 제 버릇 개 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대답은 뻔한 것 같습니다. 결국 집권하면 한 풀이라도 하듯 굶주렸던 배를 채울 것이고, 논공행상을 할 것이며, 국민과 법을 무시하고 무소불위의 초법적 특권을 누릴 것입니다. 아무리 정치를 도덕주의적인 관심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 정치와 도덕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부도덕하면 자기 자신의 인생을 망치지만, 정치가나 공직자가 부도덕하면 사회와 나라를 망칩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대권을 맡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 같이 똑똑하고 능력도 있어 보이나 모두 막강한 권력을 지닌 최고 공직을 맡기에는 도덕적으로는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보통 사람만도 못한 사람들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공적 지도자의 길에 나선 자는 철저한 도덕적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구할 도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라는 유교의 원리는 여전히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정치인이건 종교인이건, 공무원이건 교육자이건, 남을 움직이며 남의 인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공적 자리에 않으려는 사람은 반드시 도덕적 검증을 필요로 합니다. 단순히 어떤 기술이나 노동으로 자기 밥벌이하려는 사람이나 장사나 사업으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몰라도 남을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도덕적 검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 전형적인 예를 발견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적 사역에 나서기 전, 다시 말해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먼저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받고 유혹을 물리침으로 해서 철저한 검증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남을 이끌겠다고 나서는 지도자들, 사회를 구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자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동시에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주목할 점은 마태복음서 기자가 이 이야기를 바로 예수의 성령체험 이야기 직후에 놓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는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소리가 들리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확인하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마치 객관적 사건처럼 서술되어 있으나, 예수님께서 세례 경험을 통해서 얻은 내적 자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세례는 곧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요한이 주는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사명을 자각하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이 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악마가 의심하고 시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시험받는 이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와 악마와의 대면을 통해서 문제로 부상하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 무엇 하는 존재인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악마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러 이렇게 하라"라고 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의심하는 말을 합니다. 그것은 악마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관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 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악마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의심했던 것입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말해, 악마는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 상과 메시아 관을 예수가 받아들이고, 그 악마가 생각하는 세상 구원의 방식을 예수더러 택하라고 유혹한 것입니다. 악마는 도전적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네가 무엇으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느냐? 네 따위가 무슨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란 말인가? 네가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경제 기적이라도 일으킬 수 있느냐? 네가 성전 꼭대기에서 확 뛰어내려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들을 절대 복종시키고 순식간에 엄청난 인기라도 누리는 별난 재주라도 있단 말이냐?" 하는 것이 악마의 유혹이었습니다.

두 번의 시험을 단호히 물리치자 이번에는 악마가 아주 노골적으로 유혹합니다. 세 번째 시험은 악마가 예수를 높은 산으로 끌고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이면서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은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이 누구 것인 줄 아느냐? 바로 내것이야 내것. 원칙대로 사는 사람, 양심대로 사는 고지식한 사람은 절대로 이 세상을 차지 못해. 그러니 나에게 절해. 딱 한 번만 하면 세상을 차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야. 일단 그렇게 해서 세상을 차지하고 난 다음 정치 잘 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것이 악마의 유혹입니다.

이 악마의 시험 이야기는 어쩌면 예수 자신이 받은 내면적 유혹을 객관화된 이야기로 전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공적활동에 들어가시기 전 자신 안에서 괴롭히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면서 그것과 싸워 물리쳐야만 했던 리얼한 내면의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는 악마의 의심은 사실은 예수가 바로 자기 안에서 들은 악마의 목소리, 아니 자기가 자기에게 한 소리일 것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졌던 의심이며 그것으로부터 오는 유혹의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이 의심과 유혹은 곧 내가 무엇으로써 이 세상을 구할까, 무엇으로써 이 굶주리고 헐벗은 민중, 억압받는 우리 민족을 구원할까 하는 데서 오는 고민과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내가 어떻게 세상을 구할까, 무엇으로써 방황하고 있는 우리 민족을 구원한단 말인가, 내가 이제 하나님 나라의 구원 사역을 한다고 나서면 과연 사람들이 나를 믿어줄 것인가? 배고픈 사람들의 배를 채울 경제 기적이라도 행해야 할 것 아닌가, 무슨 희한한 쇼라도 벌려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인기를 모아야 할 게 아닌가? 아니면 아예 노골적으로 악의 세력과 손을 잡아 버릴까? 당분간 그렇게 해서 권력을 잡은 다음 다시 잘 하면 될 것 아닌가? 이러한 갈등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의 마음을 유혹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바로 섰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역사의 새 물결을 일으키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물결의 파장은 때로는 세차게, 때로는 미약하게, 때로는 순수하게, 때로는 왜곡된 형태로, 때로는 교회를 통해서 때로는 교회 밖의 휴머니스틀들이나 무신론자들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선 주자들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정권교체라는 구호 아래 3공, 5, 6공 가리지 않고 앞장서서 독재 세력과 손잡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 끝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수십 번이나 지키겠다고 한 경선 승복의 약속을 헌 신짝처럼 파기하고 온갖 정당화로 자신의 떳떳치 못한 행동을 호도하려 하고 있으며, 또 법대로 라는 별명을 가진 한 사람은 남에게는 법대로 했는지는 모르나 자기 맏아들만은 법을 교묘히 이용해서 남들이 다하는 병역의무를 회피하게 만들고서는 자기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자기는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을 둘러싼 추종세력들은 어떻습니까? 여론의 향배만 지켜보다가 아무런 원칙도 없이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철새 정치인들의 모습은 정치 염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시민의식은 어디에 있습니까? 독재고 민주투쟁이고 하는 것은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정의고 개혁이고 아무 관심 없고 오직 우리 단체의 이익과 우리 지역만 안중에 있습니다.

너무 가혹한 평입니까? 정치를 어떻게 예수님의 행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인에게서 보통 사람들 정도의 도덕적 수준은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들이 다 가는 군대를 자기 아들이라고 못 보낼 이유 없고, 초등학교 아이들조차도 잘 지키는 경선 승복을 대통령이 되겠다는 자가 안 지키고, 정권교체가 수단인지 목적인지조차 구별 못하고 아무하고나 손잡는 정치인들을 놓고 우리더러 그 중의 하나를 골라잡으라 하니 어처구니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고 표를 안 찍고 등산이나 갈 수 도 없는 상황입니다.

진정으로 사회를 구원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경제 기적이, 한강의 기적이 또 한 번 일어나면 정말 되겠습니까? 그래서 신문들은 독재 시대의 향수를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 위기가 과연 어디서 왔는지는 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다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해외여행 한 번쯤 해 본 사람이라면 우리 돈이 달러에 비하여 훨씬 고평가 되어 있었다는 것쯤은 벌써부터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경제학자들이나 관료들은 무엇하고 있다가 이제야 호들갑들을 떠는지 모르겠습니다. 청바지 값, 양주 값이 세계에서 제일 비싼 나라가 우리 나라라는 것도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국민당 소득 일만불이라 하지만 씀씀이는 3만불 되는 국민들보다 더 흥청망청 댄다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사람 없는데, 이런 나라가 망하지 않고 어느 나라가 망한다는 말입니까? 온 나라가 세계의 온갖 사치품과 유행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는데, 무슨 수로 외환 적자를 안 본단 말입니까? 내가 아는 어느 교수 한사람이 독일 하이델베르그에서 다른 독일인 교수와 여름에 한 아파트에서 같이 생활을 했는데, 그 독일인 교수는 자기를 설거지를 못하게 하더랍니다. 이유인즉 당신은 물을 너무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몇 배나 잘 사는 독일인은 물도 아껴 쓰는데 우리는 그야말로 물을 물쓰듯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바로 박혀야 경제도 사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로 서야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과소비와 허영은 정신적 공허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향락과 자기 과시, 아니면 고작해야 자기 자식에다 온갖 정성과 투자를 퍼붓는 데서 인생의 보람과 만족과 의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호의호식, 그리고 내 자식 내 새끼 돌보는 일 이외에 별로 인생의 다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가치는 고사하고 취미생활 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 우리 한국 사람들 아닌가 합니다. 이른바 선진국 사람들은 취미생활과 추구하는 가치가 무척 다양화되어 있다는 것을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우리처럼 획일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처럼 남들이 골프 치니까 너도나도 골프를 치지는 않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빵으로만 살려는 나라는 빵도 얻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가 당한 시험과 유혹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날마다 경험하는 유혹의 이야기이며, 우리가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경제도 정치도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본 일도 없는 젊은이들이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니며, 여성들은 무조건 비싼 화장품만 찾고, 남자들은 2차 3차 하면서 술집을 전전하며, 무슨 스트레스가 그리 많다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노래방을 찾는 사회가 어떻게 버틸 수 있겠습니까? 자고 나면 느는 것은 유흥업소들뿐이며, 생겼다 하면 교회건물 뿐인 나라입니다. 병든 사회에 교회가 많이 느는데 좋은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교회는 많이 느는데 세상은 더 형편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 위기는 근본적으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정신적 위기이고 도덕적 위기입니다. 정치가 부패하여 정경유착의 관행을 끊지 못하고, 기업들은 과도한 욕심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며, 은행은 서민들한테는 한없이 문턱을 높이다가 힘있는 사람들의 압력으로 형편없는 기업들에 돈을 퍼부어 주다가 기업과 은행이 온통 부실화되고 국제적 신용이 펑크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경제 논리로만 했으면 이런 참담한 꼴은 안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경제 논리 그대로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고 당연한 상식 같아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단순히 경제만으로는 안 되고 정신이 올바로 박혀야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제력과 도덕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직, 근면, 친절, 그리고 성실,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지키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며, 이런 것들은 과도한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목전의 이익만 좇고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국민들에게는 불가능한 법입니다. 근면, 절제, 정직, 성실성 없이는 결코 경제가 순수히 경제 논리대로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경제는 정직하다고나 할까요. 심은 것만큼, 노력한 것만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경제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며, 경제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가장 기본적인 데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이미 삼풍 백화점의 붕괴나 성수대교의 붕괴 같은 어처구니없는 참사들이 누차 우리의 실상을 고발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건만,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뉘우치지 못하고, 정신 못 차리고 흥청망청 대다가 결국 오늘의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정말 우리가 살 길은 죽어야 산다는 진리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 살을 잘라내고 뼈를 깎는 자기부정의 고통이 없이는 우리 경제가 되살아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정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대권주자들은 우리의 문제가 정말 어디에 있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김을 청산한다고 됩니까? 세대 교체를, 정권 교체를 한다고 됩니까? 공무원이 바뀌지 않고 기업인들이 바뀌지 않고 국민들이 바뀌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은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수준, 국민의 의식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말은 부동의 진리입니다. 지금의 정치인들을 누가 뽑아 놓았습니까?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영적 각성, 도덕적 각성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충동질하는 악마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는 믿음뿐임을 오늘의 말씀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제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 모두가 바로 서야 합니다. 나라를 망쳐 놓은 정치인들, 경제인들, 재벌들에게 이 나라를 구해줄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땀 흘려 일하는 근로자들, 물 한 방울이라도 아껴 쓰는 주부들, 그리고 주어진 직장에서 양심을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샐러리맨들이 지금까지 이 나라를 지탱해 왔고 앞으로도 이 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쓰러진 인간이었으나, 새 인간 예수, 두 번째 아담 예수, 인간을 구원하실 예수는 유혹을 이기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곧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 메시아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는 것은 그가 경제 기적을 이루었기 때문도 아니고, 정치에 뛰어들어 정권을 잡았기 때문도 아니며,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비참한 민족의 현실 앞에서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 앞에 무릎꿇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길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의로운 고난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난의 길 외에 인간을 구하고, 사회를 구하고 역사를 정화하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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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8 사도행전 베드로의 설교 행2:22-36  박영선 목사  2009-06-19 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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