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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삶

마태복음 박충구 목사............... 조회 수 2070 추천 수 0 2008.05.30 19: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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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7:1-7 
설교자 : 박충구 목사 
참고 : 새길교회 
거룩함의 체험과 삶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다가올 고난을 내다보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신 후 며칠이 안되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셨는데 거기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수 백년 전의 신화적 존재들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예수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었으며, 예수는 적어도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급이 되는 굉장한 인물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 신앙의 전설적인 두 인물과 동격으로 묘사되고 있는 예수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지는 즉 지상적 경험이 아니라 천상적 현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 사건이 왜 하필이면 산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가?'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서의 이 기이한 체험을 우리는 "일종의 거룩함의 체험"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 사건과는 성격을 조금 달리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구약성서는 아브람의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친인척, 동향인, 동문 모두 버리고 고향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을 향하여 떠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또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하고 약속도 하십니다. 아브람은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립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단을 세운 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아브람의 거룩함에 대한 체험은 그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거룩함의 체험, 하나님 체험'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예수가 가졌던 그 거룩의 체험,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또 자신의 삶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던 아브람과 같은 삶이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믿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존재 앞에 서는 경험:

예수와 아브라함은 거룩한 존재 앞에 서 본 경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 경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하게 하는 경외의 감정을 불러옵니다. 베드로가 한번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 밤이 새도록 애쓴 적이 있었습니다. 본디 어부 출신일 뿐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과 고기가 몰리는 시기와 자리를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아마도 자신의 모든 지혜를 다해 고기를 잡으려 밤새 애썼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것도 건져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허탈한 마음으로 그물을 깁던 베드로에게 예수는 "깊은 데로 나가거라. 거기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이해의 능력 밖에서 베드로는 거룩함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루돌프 옷토라는 사람은 {거룩한 것』(das Heilige)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는데, 거룩함을 그는 깊은 경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함이란 우리를 오싹하게 하는, 두렵고 떨리게 하는 것이지요.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은 신성(神聖)과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없이는 지각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거룩한 것에 대한 인식은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러한 거룩함의 흔적들이 사방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참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맑고 깨끗한 사람 앞에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법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기의 눈빛을 보면서 하나님의 눈빛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거룩함에 대한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12∼13세기에 걸쳐 라인강 주변에 무리를 이루고 살았던 힐데가르트나, 쥴리안과 같은 이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 속에서 경험하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세계를 대상화해서 바라보는 우리들과는 달리 이들은 자연 세계 속의 한 피조물로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른 피조물들을 이해하였습니다. 이 전통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 프란시스가 나오게 됩니다. 프란시스는 바람과 새와 나무들을 한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된 형제와 자매로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피조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깊이 자각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동정과 유대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려 했습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도 이러한 전통에 서 있는 분이었습니다.

거룩함의 경험과 그 특징:

이렇듯 거룩함의 현존을 체험하는 이들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거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이라고 할까요. 또 한가지는 거룩함을 체험했던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룩함을 체험했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죄인이로소이다"(눅 5장 8절) 라고 고백했고,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아하 화로다 나여 죽게되었구나"(사 6장 5절)라고 탄식합니다. 거룩함 앞에서는 경외의 두려움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바로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초라하고, 죄스러우며, 한없이 제약된 존재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는 일이 거룩함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거룩함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특출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말씀을 참고해 보면 이들의 독특한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 .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장 8-10). 깨끗하게 살려고 하는 이, 의를 위하여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이, 즉 깨끗하고 의로움에 대한 희구를 가지고 살던 이들은 거룩함을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살려는 이들은 결국 자신의 추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이들이며, 의를 살아내려 했던 이들은 불의에 대한 판단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거룩함을 체험하게 될 때 그 거룩함을 인식할 뿐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불순함과 죄스러움, 의롭지 못함을 동시에 자각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차원의 자각과 깨달음은 많이 배웠다고 와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많이 먹었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이나, 지위나, 학력이나, 인종이나, 그리고 성적인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직 의롭고 깨끗하게 몸가짐을 고추세우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이들이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깨달았던 것은 거룩한 현존 앞에서 자신의 초라한 죄스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함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깨달음입니다. 신앙인은 이러한 차원의 인식이 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두 가지 여정(旅程):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라는 독일의 여신학자는 그녀의 책 Hinreise에서 우리의 삶에는 두 가지 여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Hinreise와 Zurueckreise로서 Hinreise란 현실에 빠져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두고 떠나는 초월을 향한 여정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여정입니다. 진실을, 깨끗함을 찾으려는 여정입니다. 보다 의로움을 향하여 목을 길게 빼는 그런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가 산 위로 올랐듯이,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서 보다 영원한 것에 대하여 담론하고, 그 자신의 얼굴이 깊은 자각과 환희로 빛나듯이 Hinreise란 보다 참된 삶의 체험을 찾아가는 피정의 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일이기도 하고, 아브람과 같이 자신의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단을 쌓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요일에 이곳에 나와 예배하는 일도 일종의 Hinreise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삶에는 교회는 다니고, 기도는 하는 데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거룩함을 체험하며, 진실한 자아를 발견하는 Hinrese가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영감(靈感)이 없는 문화:

이는 깊은 자각의 순간이 없는 삶, 깨달음이 없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오늘의 자본주의적인 문화가 우리 현대인들을 너무나 세뇌시켜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혼동하게 하는 데 큰 원인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혼동은 영어를 쓰는 문화권속에서 종교적인 용어들이 단순한 감탄사로 전환되고 있는 현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멋진 차를 보고서 holy! awesome! 이라고 말합니다. 하루는 새로 사준 롤러불레이드를 타던 아들 녀석이 holy!, awesome! 소리를 지르고 있어서 내다보았더니 멋지게 미끄러지는 롤러블레이드의 성능에 대하여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정말 거룩하고 경외로운 것을 만나면 무엇이라고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아이들에게도 참된 거룩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염려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속된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각 교단의 총회에 가보면,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고 우리 주변의 모습만 자세히 보아도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이 혼동되어 있는 그릇된 신앙의 가치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저를 비롯한 목사 사제들의 책임이 큽니다. 호세야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저주와 사기와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다. 살육과 학살이 그칠 사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탄식하고, 주민은 쇠약해질 것이다. 들짐승과 하늘을 나는 새들도 다 야위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씨가 마를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비난하지도 말아라. 제사장아, 이 일로 네 백성은 너에게 불만이 크다. 그래서 낮에는 네가 넘어지고, 밤에는 예언자가 너와 함께 넘어질 것이다. 내가 너의 어머니 이스라엘을 멸하겠다.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 (호세아 4장 1-6절)

오늘의 종교, 교회 안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Hinreise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의 잘못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의 지도자나 우리 모두를 정신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병들게 하고 있는 지나친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유행병이 교회 밖에만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그리고 성직자들의 삶 속에도 깊이 배어들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 어렵다고 믿고 있으며, 의를 위하여 사는 일은 피곤한 일이라고 여기고 자신들의 안락과 명예와 성공만을 추구합니다. 깨끗하게 살려기 보다는 학연과 지연을 따라 무리와 당을 짓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의로운 삶을 살려기 보다는 기득권 층에 끼어 부정한 이익을 나누는 일을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거룩함의 체험이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비 알렌(Hervey Allen)은 "모든 새 세대는 야만인들의 신선한 침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은 우스운 표현이지만 쉽게 말해서 문화를 모르고 (야만인들로) 태어난 우리의 자식들은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성인들의 세계로 쳐들어오고 있으므로 우리는 문화와 윤리와 신앙을 가르쳐서 그들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본을 보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 결여된 삶을 가르치고 있으며, 나아가 현실 세계에 집착하는 것만 가르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결과 이들로 하여금 초월적이고 심원한 가치를 향한 정신적이며 종교적인 삶의 여정을 살게 하지 못한다면, 호세아의 말처럼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네가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네 아들딸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사랑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세계의 악순환이 반복될 우려가 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 한 귀퉁이에서 진정한 Hinreise, 거룩함을 만나는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길을 찾아야 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삶:

죌레는 거룩함의 여정만으로 끝나는 삶은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고 봅니다. 거룩함을 체험할 수 있는 기도의 시간, 예배의 시간, 아니면 오늘 본문에서처럼 분요한 세속을 떠난 산 위에서의 체험 이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죌레는 Zurueckreise, 곧 되돌아옴의 여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체험은 반드시 삶의 한 가운데로 돌아올 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거룩함을 향한 믿음의 여정만을 강조하던 운동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신비주의 운동입니다. 신비한 종교체험을 반복하면서 종교적 희열을 느끼고 것으로 삶을 모두 소진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간혹 우리 주변에서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잘못 이해되어 '삶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삶'으로 간주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 경우, 가정도, 자녀도 소중하게 여겨질 수 없고, 따라서 사회적 책임도 무시되거나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계속 읽어보면 제자들의 생각 속에 이러한 유혹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와 산 아래에서 지내온 날들에 비하면 이 산 위에서의 체험은 천상의 체험과 같아서 기이할 뿐 아니라,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것이어서 그들이 보기에는 피곤한 산 아래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여기 이 영광의 자리에서 계속 지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영광스러운 우리만의 삶을 살아 봅시다." 유혹과 시험과 핍박과 고난이 있는 산 아래의 삶의 자리보다는 여기 이 믿음의 자리가 좋으니 여기에 머무르자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산 아래로 내려가서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르게 됩니다. 그 분은 "나를 따르려거든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당신은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앞서 가신 것입니다. 이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나는 예수의 영성을 깊게 하고, 고난을 수납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은 그의 삶 속에 이따금씩 일어났던 Hinreise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일상을 떠난 기도의 시간을 가짐으로써 평안과 안일의 유혹을 이기고 고난의 언덕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의 현존을 깨닫고 느끼는 이들만이 진실과 정직을 지키며 깨끗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세계에서 의를 위한 핍박까지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완성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성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깨끗한 삶과 하나님의 의를 이 땅위에 편만하게 하려는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믿음은 사회에서의 책임으로 깊이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의 현존을 인식하는 삶:

오늘의 많은 교회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초연함으로 길을 걷는 Hinreise도 없고, 책임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Zuruechreise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현실에 대한 집착을 더하게 하고, 그 집착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도움을 축복으로 알아, 축복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함의 체험이 결여된 신앙생활에는 온갖 죄와 탐욕으로 가득 차고 어두움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도 정직한 이들보다는 술수를 쓰는 이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경건하게 살려하는 이들보다는 당을 지어 모략을 일삼는 이들이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믿음도 잃지 않고 삶도 잃지 않는 길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멈추어 서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가 경험했던, 그리고 아브람이 경험했던 그 거룩함의 현존을 인식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거룩함을 인식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이 살아 있는가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러한 거룩함을 향하여 열려진 삶을 향한 성찰이 깊이를 더할수록 우리의 믿음과 삶은 하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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