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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베드로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78 추천 수 0 2020.11.04 05: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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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벧전2:2-1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19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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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8mC9haq9r8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20년 5월10일

 

성경을 자주 읽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배에 참석할 때 외에는 아예 손도 안 대는 분들이 간혹 있을 겁니다. 세상살이가 너무 바빠서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멀리 느껴진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에 종교적인 메타포와 상징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일종의 시입니다. 시어의 깊이를 뚫고 들어가지 못하면 시는 그럴듯해 보일 뿐이지 삶의 현실(reality)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이시영 시인의 짧은 시 “저 잎새 하나”를 읽어볼 테니 어떤 느낌이 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나뭇닢 하나에도 신의 강렬한 입김은 스며/ 바람 불지 않아도 저 잎새 밤새도록 찬란히/ 은빛 등을 뒤집고 있으니”

 

(1)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함께 읽은 벧전 2:2절 이하에도 시처럼 은유가 많이 나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 보배로운 산 돌,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 거룩한 제사장,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 등등입니다. 급기야 어두움과 기이한 빛이라는 표현까지 나옵니다. 이런 일련의 단어를 들으면 뭔가 참된 것을 말하는 거 같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 현실과는 관계없다고 여깁니다. 기독교의 다른 가르침도 현실로 다가오지 않기는 비슷합니다. 구원, 하나님 나라, 생명, 의로움, 성화, 창조, 재림, 부활이 상투적인 낱말로만 남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시를 해설하는 사람처럼 베드로 사도의 말 중에서 한 대목을 집중적으로 해설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풍성한 삶의 능력 가운데서 살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9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을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셨다는 위 문장은 기독교인의 영적 실존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고급스러운 표현입니다. 공동번역의 놀라운 빛을 우리말 성경은 “기이한 빛”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기이한 빛이라는 표현보다는 놀라운 빛이라는 표현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영어로 “원더풀 라이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지금 우리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한 사람과 똑같이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면 당연히 원더풀 라이트 안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 문장을 쓴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돌고래가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듯이 저 놀라운 빛 안에서 살고 있습니까? 그 놀라운 빛이 무엇일까요?

 

(2) 놀랍고 기이한 빛을 이해하려면 먼저 빛이 없는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째, 예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모범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전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리를 찾는 썩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왜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지, 예수는 왜 성전에서의 환전 거래를 부정하는지, 유대 종교 권위에 왜 순종하지 않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 체제를 삶의 절대 규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어두움입니다. 둘째,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아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조상 대대로 동굴에서 지내던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동굴 입구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절대 규범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우연히 동굴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굴 밖은 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동족들에게 자기가 경험한 놀라운 빛의 세상을 전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침묵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침묵할 수 없어서 혼자 외치다가 결국 화형당했습니다. 그리고 동굴 안은 이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생명이 없거나 생명이 위축되거나 왜곡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었어도 내면은 어두울 수 있고, 거꾸로 겉은 초라해도 내면은 생명으로 빛날 수 있습니다. 위의 예를 다시 보십시오. 예수의 복음과 대립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을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세련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보면 그들은 빛의 세계에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빛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굴 안에서만 살았던 사람들에게 동굴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의 외침은 미친 사람의 허튼소리였습니다. 자신들이 어두운 동굴 안에서 경험한 것만을 절대적인 삶으로 여겼기에 빛으로 가득한 동굴 밖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인식의 오류가 저들을 어두움 안에 가둔 것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은 어둠 안에서 살아갈까요, 아니면 빛의 세계에서 살아갈까요?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어둠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베드로전서가 기록되던 시대를 아는 게 필요합니다. 대다수 학자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 박해가 심하게 일어났던 기원후 64년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도미티안 황제에 의해 소아시아에서 기독교 박해가 시작한 기원후 96년 이후라고 주장합니다. 어쨌든지 두 시기의 공통점은 기독교가 로마 정권에 의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의 모든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차원에서 크고 작은 박해가 이어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해에는 두 가지 정치적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황제 숭배의 강화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수단입니다. 기독교를 공격함으로써 정권을 향한 로마 시민들의 비난을 피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마녀사냥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도미티안 황제 시대에 기록된 또 하나의 성경인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로마 황제는 적그리스도였습니다.

 

(3) 로마 제국과 그 시대를 어두움이라고 보는 베드로전서의 관점은 옳을까요? 역사가들은 서로 다르게 평가할 겁니다. 지난 유럽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문명은 로마 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법, 건축, 예술, 연극, 문학, 철학, 과학, 군사 등등, 인간 문명 모든 분야에서 로마는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신학도 로마 문명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4세기에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결정하는 최고 권위의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은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기독교는 로마 문명과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교황과 황제라는 두 체제가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격된 후에 갈릴리 예수의 혁명적인 복음 능력을 잃어버리고 어용 종교로 타락했다고 비판합니다.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어둠의 세력은 단지 로마 제국이라는 특정 국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기독교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두 발을 내디뎌야 할 세상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 문명의 한계를 정확하게 뚫어보는 겁니다. 그 한계가 곧 어두움입니다. 그 한계가 저절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로마 문명은 한계를 감추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빛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런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빛과 어두움을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시대정신 속에 파묻혀서 그 한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로마 시대 당시에 기독교인은 절대적인 생명의 빛을 경험했기에 세상의 어두움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어두움과 빛은 이런 점에서 상대적입니다. 어두움을 알아야 빛을 느낄 수 있고, 빛을 경험해야만 어두움을 뚫어봅니다.

 

(4)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기이한 빛, 즉 놀라운 빛은 무엇일까요? 빛은 구원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놀라운 빛에 들어갔다는 말은 놀라운 구원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빛을 일상에서 종종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시리즈 형태로 만든 영화 <빨간 머리 앤>을 시간이 나는 대로 보고 있습니다. 처음에 우연히 첫 편을 보았다가 계속 보는 중입니다. 고아 소녀 앤은 우여곡절 끝에 늙은 남매가 사는 가정에 양녀로 들어갑니다. 앤은 끔찍하게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세상을 빛처럼 느낄 줄 아는 소녀였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선으로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고, 사람을 볼 줄 압니다. 앤에게 세상은 늘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앤으로 인해서 늙은 남매의 삶에도 생기가 돌게 되었고, 마을 전체가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고아 출신인 데다가 외모가 초라한 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일상과 사물을 고정된 세계로가 아니라 신비롭게 열린 세계로 볼 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앤과 같은 존재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빛으로 나타나는 요정, 또는 천사입니다. 여러분은 일상에서 그런 빛을 경험하고 있으신가요? 아니면 무덤덤한가요?

 

(5)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기이하고 놀라운 빛은 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입니다. NIV 성경은 “into his wonderful light”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생명 자체이니 생명의 빛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것을 같은 구절 앞 문장이 네 가지로 묘사했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그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5절에 이미 나왔습니다.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라 말입니다. 이런 표현이 가리키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우리의 삶을 위축시키는 세상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new being)를 가리킵니다.


이를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이전 것(the old)은 무엇이든지 지나갔으니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전 것에 매달려 삽니다. 부끄러운 과거로 인해서 힘들어하고, 또는 거꾸로 자랑스러운 과거로 우쭐댑니다. 양쪽 모두 우리 삶을 파괴합니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런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더는 과거의 일로 부끄러울 게 없고, 거꾸로 우쭐댈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현재의 삶이 절정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이한 빛(원더풀 라이트)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6) 저의 설명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여전히 생각할 분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 배고프고, 몸이 아프고, 실연당하거나 실직당한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인생살이에서 벌어지는 고난과 시련은 물론 우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짜증 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불안하거나 우울하게도 됩니다. 저는 지금 믿음만 있으면 어려움을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터널을 지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여러 가지 불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빛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들어서 눈을 바로 뜨면 그 빛을 볼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사사로운 일에 정신을 다 빼앗겨서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흔한 표현으로 시련과 불행은 다 지나갑니다. 시련과 불행이 몰고 온 충격도 시간과 더불어서 줄어듭니다. 사실은 행복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행복한 일이 몰고 온 기쁨도 시간과 더불어서 줄어듭니다. 그런 삶의 조건들은 시간과 더불어서 시들해집니다. 어떤 경우에도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빛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즉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절정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믿음이고 영성이고 삶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집중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7) 어떻게 그 사실에 집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빛을 구도적 태도로 따라가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이유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깊어집니다. 형식에만 머물면 신앙의 진보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진정성 있게 다가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짚었던 “택하신 족속”이라는 단어를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이 말은 곧 지금 우리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고,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느끼는 분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늘 여기에 모이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지금 기적과 같은 사건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은 베드로전서가 말하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다.”라는 말씀 앞에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겁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빛 가운데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몇 년이나 살았고, 앞으로 얼마나 남았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살이에서 “맞아. 이것이 바로 생명의 놀라운 빛이야.” 하고 환호성을 친 순간이 언제였습니까? 많았겠지요. 그런 순간이 점점 더 많아집니까? 아니면 줄어듭니까? 인생은 생존경쟁이니까 놀라운 빛이니 뭐니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열심히 노력해서 뭔가 업적을 남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으신지요. 자기 업적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도 한 인생이긴 합니다.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나 근본에서는 불행한 인생입니다. 빛이 아니라 어두운 데에 머무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둠에 들어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하면 저의 설교가 전혀 들리지 않겠지요. 설교자로서 제가 여기서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반복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어내어 놀라운 빛 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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