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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선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

고린도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96 추천 수 0 2020.01.22 23: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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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6: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9.1.2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새로운 시선으로 성서를 본다는 것

고후6:2

 

새 해 첫 주일입니다. 새롭게 펼친 일기장에 저는 [매 순간 새로운 시선과 매일 새로운 해석]이라고 적고 그 밑에 ‘무외시(無畏施)’라는 불교의 용어 하나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목사에게 세상과 사물을 매 순간 새롭게 본다는 것은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제가 금년의 주제어로 정한 것은, 과거의 인간이 인식했던 천체운행의 리듬인 회갑(回甲)즉, 육십갑자가 다시 돌아와 처음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처음처럼 보고 느끼며 살아야 하는 때가 된 거죠. 성서를 보고 해석하고 전달하는 일에도 그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보고자 하는 본문은 고후6:2절입니다. 이 말들은 모두 바울의 말입니다. 바울은 오늘 ‘구원의 시기’를 말하면서 지상의 예수 시기가 아닌 자기의 시기를 구원의 날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 ‘구원의 때’라든지, ‘구원의 방법’이라든지, ‘구원의 내용’이라든지, ‘구원에 대한 모든 결정’은 오로지 누구만 해야 하는가 하면, 예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신앙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예수가 지상의 인물로 존재했다면 구원의 날은 바울이 선포하고 돌아다니는 ‘바울의 지금’이 아니라 예수가 살았던 ‘갈릴리의 어느 곳’이거나 ‘갈릴리의 한 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의아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예수가 아닌 바울이 제 맘대로, 제가 정한 장소나 시기에 ‘보라 지금이 구원받을 때다’한다는 게 말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왜 과거의 어느 한 때(예수의 때)가 아니라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구원의 날로 선포했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소식을 [복음]이라 규정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 [개들]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심지어 멸망에 이르는 소식을 전하는 작자들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지상의 예수를 본 적도 없으며 예루살렘 교회와 갈등을 빚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어떤 학자들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훨씬 강경한 분파, 예를 들면 할례당과 같은 분파들과 갈등이 빚어졌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돌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생애 마지막까지 바울은 예루살렘 지도자들, 특히 주의 형제 야고보와 화해를 하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의 말들을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대담한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 받은 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증거로 제시하는 증표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제시하는 증표는 바로 ‘성령체험’입니다. 성령 체험은 할례로부터 자유로운 이방선교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한계들을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바울에게 성령체험은 은사운동 및 종말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이런 이해가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파송 받은 제자이며, 그 증거로 성령 체험을 제시하고, 성령체험은 은사운동과 종말론과 관계를 맺는다는 이해는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헬라파 유대인들은 대부분 성령주의자들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성령을 모르더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세례까지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음은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는 성서의 증언입니다.

 

“한편 아볼로라는 어떤 유다인이 에베소에 도착했는데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달변가이며 성서에 능통했다. 이 사람은 주님의 길을 배웠고 영으로 달아올라 예수에 관한 일들을 정확하게 말하고 가르쳤으나,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당신들이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그에게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행19:1-7)하고 대답했다.”

 

이 대목은 성령의 역할과 체험에 대한 강조 그리고 그에 따른 신학적 전개가 바울에게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 전통에 서 있는 셈입니다. 사실, 이 전통에서 종말론은 현존하지 않는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나 소식이 아닌 하나님의 현존방식입니다. 만약 종말의 현존방식이 성령이라면 ‘성령의 체험’ 그 자체가 축복과 저주 또는 삶과 죽음의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모든 신앙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헬라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랬습니다. 따라서 전승을 결정하는 주요 인자가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라 현재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보여주는 한 가지 훌륭한 예가 복음서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이 공생에 동안 말하고 행동 하실 때 그는 과거의 율법에 근거해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순간순간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선언과 행동의 근거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서의 예수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의 지상적 생애와 그 전승마저도 자신의 신학적 이해와 필요를 위해 때론 침묵하거나 때론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바울보다 훨씬 다른 바울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는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장 6절),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갈 6장 17절)는 그의 말에서 예수보다 크게(존재가 예수보다 크다는 의미가 아니다)생각하고 행동하는 바울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선상에서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이라는 바울의 선포는 기괴한 게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바울의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성서가 역사적 정보를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담고 있는 문헌이라며 성서무오설을 고집하는 문자주의자들이나, 역사에 대한 정확한 복원만이 교회와 신학을 진정으로 새롭게 세우는 길이라며, 역사비평학적 주석을 힘써 외치는 자들에겐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주제는 역사적 방법이 추구하는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현재적 신앙에 살아 있는 예수를 배우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역사라는 용어를 좁은 의미에서 정의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과거에 대해 인간이 구성한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모든 역사의 불가피하게 선택적이고 편협한 성격과, 수정의 여지가 있는 성격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초기 기독교를 출발시키고 규정하는 근원적 요소로서, 또한 역사적 방법만으로는 온전히 입증할 수 없으나 “진정한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신앙체험으로 강력하게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분으로서의 주님/성령에 대한 바울의 체험과 그에 따른 살아 있는 주님의 현존에 대해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역사적 기록과 관련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규칙을 깨뜨린 자 앞에서 나 자신의 존재를 묻게 되는 문제입니다. 이때 예수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 단지 분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기억의 대상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대면하여 우리에게 지시하는 대리인인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에 관해 배운다는 것에는 예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든 오늘날이든 바울의 이러한 주장을 모든 사람들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관점은 적어도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 가지 유용한 관점은 제공해 주고 있다하겠습니다. 그것은 성서에 대한 문자주의적 해석이나 역사비평적 주석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성서 자체를 역사로 간주하고 문자를 고수/숭배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역사적 방법에 따라 역사를 정확히 복원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현존하는 주님/성령을 따라 이전의 전승들을 다양하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심지어 변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임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파다보면 또 다른 이유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전만이 유일하게 계시된 책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하는 난점이 존재합니다. 일단 오늘날 카톨릭과 성공회가 사용하고 있는 성서와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서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서에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마카베오 상, 마카베오 하가 들어 있지 않죠. 하지만 카톨릭과 성공회는 이러한 문헌들도 경전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며 소중히 여깁니다. 이 문헌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 간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사고하는 방식이 서로 차이 나지 않을까요? 물론 차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한데, 초기 기독교에서 성서란 구약이며 신약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구약이라고 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이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동고동락한 사도들이 썼다고 알려진 또 다른 복음서들과 행전들 그리고 서신과 계시록 계열의 다른 텍스트들도 신봉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은 말합니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중심으로 현재의 삶의 모순들을 돌파하려는 그의 관점. 현장에서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 하는 프론티어, 즉 선교사로서의 그의 삶, 나아가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그의 소망. 이러한 점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라는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을 이 시대 신앙의 좌표로 삼아야 합니다. 과거에 적힌 문자가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도래할 그분을 고대하며 성서에 박힌 문자를 읽어가는 방식. 성서란 내게 그러한 것이며, 따라서 읽기란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눈을 통해 읽을 때 드러나는 유한성을 인식하는 읽기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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