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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의 인도

시편 김홍전 목사............... 조회 수 617 추천 수 0 2017.08.09 23: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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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23:1-6 
설교자 : 김홍전 목사 
참고 :  

성경: 23:1-6

제목: 하나님 말씀의 인도

 

1. 참된 강설이 중요함

교회의 징표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하게 바르게 전파한다는 것과 성례를 바르게 집행해 나가는 것, 그리고 권징을 충실하게 적용하는 것, 이 세 가지를 역사적으로 개혁교회에서 늘 주장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바르게 전파된다 할 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입니다. 강단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하면서 성경 신앙의 터 위에서 말을 하기만 하면 그만인가? 그러나 그 말의 참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잘 추려서 보면 말씀이 반드시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서 전달되는 데는 또한 차서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지혜로서의 말씀이 정상적으로 활용되어 속죄함과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사람으로서 성화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중요한데, 성화의 길을 걷는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생명체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된 자로 장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구원의 사실과 구원받는 자가 정상적으로 장성해 가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 선생은 디모데에게 대해서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3:15)고 말하고, 그 다음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느니라](딤후3:16-17)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구원의 지혜와 더불어 교훈도 있고, 책망하는 것도 있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 것도 있고, 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의로써 자꾸 교육해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온 후에는 속죄의 사실의 터 위에서 하나님의 칭의로 우리가 공로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우리의 영혼의 기능에도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있는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을 잘 나타낼 수 있도록 필요한 큰 개변을 일으켜 주십니다. 이로 인하여 새사람을 형성하고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이제 옛사람답게 정상적으로 자라나가면서 늘 성화의 생활을 하는 것, 거룩한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그 사실에 필요한 것들을 깨우쳐 주며, 그와 동시에 성령님께서 필요한 힘을 주신다는 사실에서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의 수단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이 구속의 은혜의 수단으로 교인들이 정상적으로 작용하도록 교회에서는 말씀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런 내용을 잘 깨달아 아는 사람, 그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은사를 받고, 필요한 훈련을 하여 준비가 된 사람이 늘 서서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라도 자기가 성경을 보고 느끼고 깨닫는바 감사와 간증의 표현을 강단에서 정규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스타일일 취하는 데가 있습니다. 요컨대 목회자가 없고 교인들끼리 다 같이 모여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경배하다가 누구에게든지 성령님이 감응하여 역사할 것 같으면 그가 일어나서 그 때 역사한 사실에 대해서, 깨달은 바에 의해서 간증해 나가는 식으로 집회를 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전담하는 이, 결국 전도자 혹은 말씀을 맡은 자라는 형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하게 전파되어야 하는데, 현실상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순결하게, 온전하게만 전파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어떤 교회가 말씀이 순결하지 않게 전파된다고 해서 교회의 특성적인 사실을 금방 다 상실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의 불순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순의 한계는 어느 정도이냐 할 때 그리스도 교회의 대본인 강령이 없어질 때는 교회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신앙의 기본 강령이라는 것들, 요컨대 구원의 크신 사실이 거기서 부정되어 버리는 불순한 종교적인 강설을 대치해 버리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2. 참 교회와 교회가 아니 것의 구별은 어떠한 신앙의 기본적인 것들을 품고 인도함을 받고 있느냐에 있음.

역사적인 교회가 치중했던바 신앙의 기본 강령이라고 하는 것들, 즉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성과 신성, 하나님의 엄위와 자비, 그로 말미암아서 성육신 하시고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실 즉 십자가의 돌아가심과 부활하심과 그로 말미암은 우리 개개인의 속죄와 의롭다 하심과 새로운 생명과 죄를 이기는 사실 등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도리를 받아 드려야 한다.

 

참 교회라는 것은 반드시 신앙의 전통적인 기본 강령을 그래도 지지하고 전파해야지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훼파해 버리면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드릴 수 없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교회가 아닌 것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주의해서 받아드려야 한다. 우리 신앙의 처지 즉 우리가 믿는바 우리의 신조로 볼 때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주장하는바 기독교의 여러 가지 강령들이나 주장들, 그런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을 정당한 교회라고 볼 수가 업습니다. 이러한 교회를 정당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것은 배교입니다. 교회 아닌 것을 교회라고 생각하니까 그 결과는 교회 아닌 것을 자꾸 불리는 것입니다.

 

교회 관이 불분명하든지 잘못되면 대단히 위험하다. 불분명한 교회 관 때문에 교회 아닌 것을 교회인 줄 생각하는 잘못은 유치한 사람들도 범하고 자식이 많은 사람들도 범합니다. 유치한 사람들은 교회로서의 요소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신자들이 모여서 기도회하고 찬송하고 무슨 예배 식을 집행하면 교회가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데 이것도 참으로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교회를 그런 정도로 생각하니까 그런 정도 안에서 사람들이 규합해 가지고 적당하게 유지하면 교회가 된다는 생각을 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교적 유치한 사람들이 모인 데에서 보게 됩니다. 또한 대체로 하나님의 말씀의 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데에서 그런 것이 보입니다.

 

3. 등이요 빛인 말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된다 할 때에는 그 말씀이 구원의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과 구원받은 자가 정상적으로 장성하되 영화의 정점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데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활발하고 힘이 있어서 관절과 골수 같은 것들을 다 쪼갭니다(4:12-13).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경우에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서 사망에 이르는 자에게는 그것이 무슨 향기냐 하면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른 향기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생명을 주는데, 만일 안 받으면 안 받는 대로 그냥 없어지는 것이냐 하면 그게 아니라 대신 구원받는 자들에게 그 말이 들어가면 생명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어떤 면에서든지 활발하고 능력 있습니다(고후2:15-16). 양쪽에 날이 선 칼과 같이 이쪽으로 때려도 맞고 저쪽으로 때려도 맞습니다. 그에게 거룩한 은혜의 말씀으로, 생명의 풍성한 양식으로 들어갔는데 안 받고 거절을 하면 그냥 끝나지 않고 반대의 작용, 정죄하는 작용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활하고 성장해 나가는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긴요하게 역사 하는 큰 사실의 하나는 그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이 되고 우리의 길에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119:105). 캄캄한 밤 어느 길을 가려고 한다면 빛이 필요합니다.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환히 비치는 빛이 있어서 길을 쭉 비춰 보면, 아 이것이 길이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는 길이 보인다 해도 당장 내 발부리 앞이 어두우면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발 앞에 등이 있어서 길을 비춰 주면 그 등과 함께 한 걸음씩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일보일보의 전진에서 불명료하지 않게, 무엇이 어디 있으며 어디를 밟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역을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이 나에게 있어서 내 인생의 길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훤히 비추어 주고 또한 그 길을 행보할 때에 내 발걸음 하나하나를 비추어서 가게 한다는 것이 주의 말씀이 등이요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생명과 관련된 귀하고 훌륭한 소식인지 알아야 합니다.

 

4. 나의 인생길은 나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어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든지 인생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은 가고, 세월이 가면 역사가 흘러가면서 자취는 남게 됩니다. 인생의 길은 그렇게 하나의 역사의 자취로 남겨집니다. 나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지라도 인생의 시간은 흘러가는데, 인생길의 목표가 어딘지 자기는 알 수 없기에 그냥 간다는 사람도 많고, 그런가 하면 내일은 모르는 것이니 자기는 현실에서만 그 냥 향락하고 살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내일을 알 수 있게 피조 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내일을 향해서 기도록 만들어진 것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알지 못하는 내일을 향해서 늘 결어야 할 것이냐 할 때, 너는 그런 기능이 없는 네 스스로의 안목을 의지하지 말고 네 길을 정하시고 네 길을 인도하시고 네 길을 비추어 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여 그의 붙드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고 가라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없게 피조되었다는 사실을 늘 명확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내일을 향해서 늘 걸어야만 할 신성한 의무가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어떤 마련이 있느냐 할 때, 내 길을 처음부터 정해서 이리로 가야 할 것이다 하고 놓아두시고, 저기에 목표가 있지 않느냐 저게 네 길이다 하고 비춰 주시고, 또 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가 주장해서 잘 가게 하리라 하고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은혜입니다. 사람은 거기에 의지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아담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원적인 의, 원시 의라는 것을 가졌던 아담도 그렇게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제멋대로 길을 걸으려고 하였고 그것이 곧 최초의 범죄입니다. 인류를 대표한 총대로 앉아서 전 인류를 끌고 자기는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길을 걷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인생의 길을 제 손에 잡아 가지고 내가 한번 주장하고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최초 아담의 죄로서 전 인류가 같이 죄책을 짊어지게 된 큰 죄악인 것입니다. 그런 아담의 품성이라는 것이 자손만대에 계계승승 이어져 와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정욕, 탐욕의 형태로 강하게 늘 나타납니다. 자기의 길을 자기가 정하고 자기의 행복은 자기가 취하겠다는 생각,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인생의 길을 끌고 나가는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고 나온 사람이 정당한 생활을 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자기 생활 전체를 포기하는 신앙상태로 드러나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주장해 나오던 과거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다 내놓아 버리고 그렇지 못한 과거의 태도를 아프게 느끼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고 할 때는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법률적인, 그렇지 않으면 사회 일반 도덕상의 죄악만을 생각하고 회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인생을 항상 자기가 쥐고서 밀고 나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프게 회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도리라는 것은 자기는 그대로 두어두고 하나님이 벌 내리실 것은 면하고 복만 주시기를 바라는 그런 아주 비위 좋은 생각으로의 신앙이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인생관이나 인간관 같은 것을 그냥 쥐고서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공리주의적인 종교 선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어 냈느냐? 처음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떻게 가느냐 하면 자기 맘대로 자기의 행복을 제가 건설하겠다고 추구하며 나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반역의 죄악입니다. 이런 반역의 죄악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하고 맡기고 의지하고 인도하시는 대로 살겠다 하는 정신으로 바로 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의식입니다. 그것이 최초의 의식으로서 거기서부터 비로소 인생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식이 크리스천이라 하는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결핍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잠시도 우리에게서 떠날 수 없는 고정 관념, 기본적인 의식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흐려져 자신을 설복해 가면서 제 뜻대로 행복을 한번 추구하고 생활을 경영해 보려고 하는 탐욕이 나오는 일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시고 빛을 비춰주시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요구가 빈곤한데 있다.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시고 빛을 비워 주신다 할지라도, 지금 내가 경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중지하시지 아니하면 좋겠다고 조건을 붙이는 일이 우리에게 아직도 많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주장하시기를 바라기는 합니다. 또 인생을 살아보니 참으로 사람이 약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지금 내가 경영해서 얻어 놓은 이 행복만은 하나님이 기정사실로 용인하시고 그 위에서 이제부터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식 생각을 흔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9:16-17절과 누가복음 5:36-37절에 나오는 새 포도주와 새 옷감 애기를 자주 합니다. 그것은 실컷 자기의 헌 옷감으로 옷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여기부터는 하나님이 맡아서 새 옷감으로 마무리해 주십시오. 하는 생각은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체를 포기하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지라도 마땅히 그렇게 시작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맡아서 인도해 주시고 이제부터 새로 건설을 해 주십시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예수를 믿는 경우라고 해서 지금까지 내가 건설해 놓은 그 인생 위에다 하나님이 계승해서 맡아서 좀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되는 생각인 것입니다.

 

5. 자기의 전체를 맡기는 문제.

사람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새로 난 어린아이이지 장성한 사람으로서 개과천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죽음에 있던 과거를 그냥 용인해 달라고 하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는 예수를 믿은 후에는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자기라는 것, 옛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를 지배해서 인생을 건설하고 나가는 사실 위에다, 하나님이 이것을 좀 맡아서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인계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옳지 않음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상태를 가장 잘 아시고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혹시 나의 이 행복이 쭈그러지면 어쩌나, 없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러 가지 선의는 우리로서는 다 측량할 수 없이 크고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엇을 스스로 경영해 가지고 그것이 좀 행복스럽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안 놓치려고 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선의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와 같이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단념을 하는 것이 늘 정당합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셔서 내리신 은혜라고 할지라도, 즉 지금까지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셔서 쭉 계속해 나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느덧 거기에 대한 자신의 애착이 너무 강해서, 이것만은 하나님이 그냥 잘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큰 사례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아들입니다. 이삭은 특별히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경륜 가운데 나온 자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착 혹은 소유욕이라고 할 것이 강해지니까 그것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안되겠으니 도로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경영한 계획이지만 이제 취소한다. 하는 말씀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 내가 경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해야 할 것이라는 큰 교훈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소중한 것이 자기에게 있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지켜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 맡기고 의지하고 나가는 것이 빈곤하고, 자기의 생활감정이 어느덧 그것이 혹시 꺼질까, 이러면 실패할까, 저러면 안 될까 하면서 점점 자기라는 세계가 커지고 자기주장이 강하게 들어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니까 어느덧 유혹을 받아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포기하게 만드시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이 안 생기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할 때 그 길에 대해 가르쳐 주시는 성경의 말씀을 보십시오. 잠언 3:6절을 보면 [너는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잠언 16:3절에도 [너의 하는 일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니라] 했습니다. 야고보서 1:5-8절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제는 자기가 경영하던 것을 놔두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맡아서 경영하십시오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다 내가 캄캄했을 때에 모르고 자기 욕심에 의해서 한 것이니까 주님 앞에서 그걸 계수하지 마시고 이제부터 저를 잡으사 갓난아이같이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섭리대로 인도하신 사실들을 활용하시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뜻입니다.

 

6. 사도 바울의 예

사도 바울 선생은 회심하기 전에, 과거에 당시 유대 사람의 사상에 큰 영향력과 원천 노릇을 해 주던 헬레니즘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전통적인 히브리적 신관 아래서 하나님을 알고 나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새롭게 변화된 뒤에 과거를 전부 포기하고 이제부터 나의 모든 생을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며 인생을 살아간 바울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내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들을 전연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죄다 포기하시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자기는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것들을 포기하고 주께 맡겨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손으로 잡아서 경영하려고 하는 것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 무엇을 건설하고자 하시면 당신이 원하시는 재료로 건설해 주시기를 바라고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정신이 있어야 먼저 있어야 인도를 받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는 인도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을 앞에 두고서 이것을 가지고 여기서부터 경영해 주십시오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도를 받을 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7.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도덕성의 문제

예수를 믿고 난 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할 때에 전체를 맡긴다는 문제 다음으로는 선과 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또한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은 도덕상 가치의 문제가 사람에게 오는 것인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정당하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효과 있게 의미 있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하나는 도덕상의 문제 즉 선악의 문제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의와 불의, 즉 당위인가 아닌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는 여러 가지 도덕적인 교훈을 따라 사는데 있어 자기의 차원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아니해야 합니다. 가령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는 말씀이 있을 때 자기가 마음 가운데 열심히 해 보려고 시도는 할지언정 바로 그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본적인 것을 위시해서 도덕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이라도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런고로 어린아이가 새로 났으면 우선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8. 어떻게 성경이 내게 양식이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이 그냥 평범한 도덕적 교훈에 그치지 않고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되려면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도의 젖을 사모한다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2: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먼저 궤휼이 없이 도의 젖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여러 가지 꾀를 집어넣지 않고, 타협을 짓지 않고, 잘못된 해석을 거기다 붙이지 않고, 너에게 명령하는 대로 순결하게 받아들여서 그것을 네 생활로 드러내도록 하라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받았으면 벌써 믿음이 생긴 것인데,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리스도인다운 덕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는 덕이 공급되어야 하고 덕에는 지식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덕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도리 가운데로 자꾸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서는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렇게 라도 헤프게 살아서는 안 된다. 말도 헤프게 하면 안 되고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와 은혜를 헤프게 써도 안 된다. 이런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절제 다음에는 인애가 있어야 하고, 인내 다음에는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형제 우애에는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차서대로 가지라는 게 아니라 다 함께 정상적인 자꾸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5-7절에 있는 말씀들인데 정상적인 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상적으로 장성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도의 젖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정상적으로 장성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도의 젖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젖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 젖만 먹고 단단한 음식을 못 먹으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라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도리의 초보에서만 뱅뱅 돌고 깊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의 한 징표입니다. 순수한 도의 젖을 사모하여 먹으라는 것은 막 새로 나서 장성해야 할 사람이 마땅히 먹어야 할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사욕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본적으로 그에게 주는 것들을 먼저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의지하고 사는 도리를 알고 처음부터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되 자기에게 잘못된 것이 있음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사는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있기가 쉽습니다. 그런 잘못에 대해서 꼭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처음에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비판하는 그 판단으로 하나님께 판단을 받을 것이다. 또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을 너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느냐]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도무지 모르고 앉아서 다른 사람의 티를 자꾸 헐 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기본적으로 이러한 부분부터 고쳐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도리들을 가지고 볼 때 은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라 하는 것, 그 은덕이 무엇이냐 할 때 과거에 위대한 스승들은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을 은덕이라고 쳤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를 바로 볼 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기에게 잘못된 것, 비웃음 받을 만한 큰 결핍들이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든지 오히려 자랑한다면 그것이 겸손과는 반대의 패덕입니다.

 

겸손은 이런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의 기본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하는 데 있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으면 그 다음에는 아상으로서의 자기를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높다고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편아 해서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평상을 해서 늘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도 도덕상 유치한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도덕상 유치한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나오는 게 아니므로 우리들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경우 성자라도 그것이 어느 때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나오기 쉬우니까 그렇습니다.

 

8. 먼저 인도를 받기에 합당한 자리에 서야 함

주님께서 내 길의 빛이 되고 내 발의 등불이 되려면 먼저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자기 자신의 위치를 확정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덮어놓고 빛을 비추어 주겠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가치가 어떤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의 잘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등불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겠는가 할 때는 먼저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네가 대체 얼마만한 능력을 가진 자로 생각하느냐?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냐? 얼마만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냐? 능력이 있는데 능력 이상의 것을 항상 부허하게 바라고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능력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이 세상 사람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고보서 1:5-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말씀에 보면 구할 때 필요한 {두 가지의 자격}이 금방 눈에 뜁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첫째는 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할 만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할 만한 믿음}이란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것을 믿고 안심하는 심정인 것입니다. 그것 믿느냐? 아니면 없으면서 구하느냐? 입니다. 또 한 가지 자격은 뭐냐 하면 나는 의지할 다른 것이 없이 완전히 배수진을 치고 서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 구해 보다 안 되면 요렇게 라도 해야겠다 하는 것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요렇게 라도를 가지고 있는가?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을 어디다 가만히 숨겨 두고 그것이 별로 신통치 않으니까 여기서는 안 쓰고, 하나님 앞에 달리 구해 봤다가 암만 구해도 주시지 않고 일을 박두하여 정 할 수 없으면 요렇게 라도 해야지 하는 그것이 없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것이 없이 완전히 배수진을 치고 서 있는 사람보다 요령을 가지고 지혜를 구하면 그것은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도 무엇을 얻으려 생각하느냐?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인데 그렇다면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 구하면서 안 되면 내가 생각한 쪽으로 가겠다는 식으로 어떤 것이 좀 더 유리하냐를 따지며 사는 것은 안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로서 현실상 효과 있게 역사 하려면 먼저 그러한 위치, 그런 자리에 내가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높이 올라서 있거든 내려와서,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기력이 없이 낮은 곳에 넘어져 있으면 거기서 올라와 서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혹시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나는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어떤 길을 보이시려고 할 때는, 그 길이 무엇이다, 왜 그렇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사람인 까닭에,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자녀답게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지, 눈 딱 감고 있더라도 이리 가자 저리 가자하고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이해할만한 기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고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합니다. 자녀라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식 활동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자녀가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정당한 위치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말씀에 의해서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과 말씀이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부지런히 알려고 않고 자꾸 뚱딴지같이 덮어놓고 자기의 길만 인도해 주십시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경영하다가 안 되니까 주님 앞에 맡기고 유리한 것을 택하겠다는 그런 사곡한 욕심과 탐욕을 가지고는 도저히 주님의 거룩하신 순결한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인도하시려고 할 때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바른 마음자리에 서야 하고, 겸손한 자리에 늘 있어야 하고,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하여야 합니다.

 

9. 적용

1)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야 인도함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더딜지라도 신앙의 장성이 있어야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신자는 보편적인 교회에서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4)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인도하심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김홍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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