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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높이가 믿음의 높이입니다.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36 추천 수 0 2017.05.22 23: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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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5:29-39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03-12 춘천 성암감리교회 

시선의 높이가 믿음의 높이입니다.

막15:29-39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 혹은 믿음이 얼마나 높은지 궁금해 본적은 없습니까? ‘높이’라는 말 속에는 믿음에 대한 모든 걸 포함하고 있다는 전제 안에서, 교회 안에서의 직분이 믿음의 높이를 말해주는 건 아닙니다. 교회 다닌 햇수로 믿음의 높이를 규정 할 수도 없죠. ‘믿음의 높이’라는 말은 믿음의 견고성, 믿음의 실천성, 믿음의 진실성, 신과의 합일성을 두루 포함하는 언어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믿음의 전체적인 진실성을 가늠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네가 그리스도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도 믿겠다”고 하면서 예수를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는 묵묵히 있을 뿐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지 않았죠. 결국 예수는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애써 이 사실과 상황을 눈감아 버리려고 합니다. 늘 전지하고 전능한 하나님의 아들만 말하고 그것만이 우리들 삶에 작동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로서는, 그동안 날고뛰었던 능력자 예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겁니다. 이걸 부조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예수의 십자가 사건만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살이도 모두 이치에 맞는 건 아닙니다. 부조리한 게 하나둘이 아니고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인생은 삽니다. 바로 이 지점, 이치에 딱딱 맞아떨어지던 예수가 마지막 십자가에서 자신을 이치에 맞지 않게 자리매김합니다. 바로 이 ‘이치에 맞지 않는 예수의 상황’이, 항상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과 만나는 지점이 됩니다. 만약 예수는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 존재이고, 우리는 늘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인데 어느 지점에 그와 우리가 만날 수 있겠어요? 만약 이렇게 되면 예수는 하늘에만 있고 우리는 늘 땅에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거예요. 이 지점이 바로 ‘십자가상에서의 부조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미를 추구합니다. 의미가 있는 한에서 희망이 있고 고생도 참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좋게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위로를 받고 일어서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기원전 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의미를 물을 수 없는 사건이나 상황’이 인간 삶에 늘 등장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찰스 다윈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무능력하게 혹은 부조리하게 예수가 죽었다는 이 이야기도 의미를 찾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원하는 그런 미신 같은 의미는 없습니다. 욥의 이야기가 그렇고, 또 아우슈비츠가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절규하셨듯이, 욥도,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절규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희망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절망 속에서는 당연히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삶은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이며, 의미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을 한 번 보세요. 눈여겨보셔야 합니다. 과거와 같은 시선으로 보면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하고 말하였다”(37-39절).

 

사람들은 성전 휘장이 찢어진 기적 때문에 백부장이 이런 고백을 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39절에는 분명히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그런 고백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일은 십자가와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백부장은 그것을 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아마도 나중에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무슨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을 보고서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은 기적을 보고 예수에게 고백을 한 게 아니라, 이치에 맞지 않게 죽는 그 모습, 부조리한 그 죽음의 현장, 의미 없을 것 같은 죽음을 보고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경꾼의 입장이지만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부조리하게 죽는 예수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변절하거나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조롱하는 사람들과 보통 사람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이치에 맞지 않게 평범한 한 사람처럼 죽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의 예수와는 이치에 맞지 않는 최후를 보고, 그는 감화를 받은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이 백부장의 시선은 뭐였을까요? 백부장의 인생은 늘 부조리했습니다. 이치에 맞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도 자신과 같이 부조리하게 죽었던 것입니다. 그걸 보고 백부장은 알았습니다. 아, 이 양반이 나와 다르지 않구나! 이 양반은 인간 위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존재로구나. 그래서 그가 말했던 겁니다. ‘이분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다’ 부조리한 예수의 죽음과 이치에 맞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했던 백부장의 시선이 예수와 만나는 지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은 목적이 있는 의미 있는 것’이라 했고, 다윈은 ‘인생은 목적도 의미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구석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로 이런 ‘목적’지향적인 인생의 너머로 닥쳐오는 부조리한 것들을 세상의 모든 민생들과 일치 시키면서 저들로 하여금 희망 없고 고통스러운 인생들에게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사는 새로운 인간성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도가 희망인 거고,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조리하게 죽고’ 그걸 백부장처럼, 갈릴리 사람들처럼, 희망 없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신과 일치시키며 살 때 기독교가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보통 사람들과 시선의 높이가 달랐습니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같은 사물이나 상황이 다르게 느껴지는 예는 무척 많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운동장은 하늘처럼 넓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그 운동장에 서 보면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이고 느껴집니다. 왜 이럴까요?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요? 운동장이 진짜 줄어든 것일까요? 아닙니다. 내 시선의 높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저의 집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안방, 사랑방, 윗방, 부엌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유리문이 있거나 하지 않고 한데 있었기 때문에 먼지가 늘 쌓여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루의 먼지를 걸레로 닦는 일은 제 몫이었습니다. 저 밖에는 큰 아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걸레를 빨아 죽죽 밀면서 마루를 걸레질 했죠. 내 깐에는 엉덩이를 쳐들고 힘들여 마루 전체를 닦느라고 닦았지만 어머니는 늘 이게 걸레질은 한 거냐고 야단만 맞았습니다. 그때는 참 이해가 안 되었죠. 그러나 제가 어른이 되고 아이들에게 같은 일을 시켜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런 차이가 모두 시선의 높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어른이 되고 내 위치가 되어보면 알게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사장의 시선과 사원의 시선의 높이는 다릅니다. 사장의 시선과 사원의 시선도 그 높이가 다릅니다. 이렇게 시선의 높이는 그 존재를 전체적이게 하고, 올바르게 하고, 진실 되게 하고, 완성도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예수 믿음에 완성도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흔들리지 않는 믿음, 높은 믿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믿음, 하늘의 뜻을 이뤄드리는 믿음이 되려면 뭐가 달라야 할까요? 바로 믿는 자의 시선입니다. 남들처럼 보고, 느끼고, 남들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은 맨날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탁월한 시선이 있어야 시를 쓰고, 탁월한 시선을 가져야 정치를 합니다. 그리고 탁월한 시선이 있어야만 기업도, 식당도, 사업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들이 ‘탁월한 시선’즉 ‘남다른 시선’, 시선의 높이를 달리하지 않고서야 어찌 하늘의 소리를 듣겠으며, 그 뜻을 실행할 수 있겠어요.

 

예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의 시선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보통의 시선일 때, 그들은 예수와 함께 기적을 체험하고 빵과 떡을 먹었지만 그 바탕에 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를 배신하거나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난 다음에 그들의 시선이 높아졌습니다. 더 이상 기적을 체험하지도 않고 빵을 먹지도 않았으며 물 위를 걷는 신비를 보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따르기 시작했고, 목숨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그들의 시선이 높아졌을 때 가능했던 것이지 기적을 보고, 병자를 치유하는 걸 보거나, 몇 개의 빵으로 수 천 명이 먹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백부장의 시선을 가졌습니까? 그만큼 높습니까? 다들 기적을 바라고 그걸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 할 때, 무능력하게 죽어가는 예수를 보고 ‘당신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가졌습니까?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높이, 시선을 가진 사람은 허접한 것들에 유혹당하지 않습니다. 이리 저러한 일들에 삐지거나,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을 진리처럼 고집하지 않습니다. 감정과 물질을 씀에 있어서 인색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목숨까지 내던져 진리를 위해 삽니다. 이것이 높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시선이 높은 신앙입니다.

 

백부장이 성서 본문 속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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