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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랑

요한일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37 추천 수 0 2018.02.10 22: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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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서4:7-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7.6.26 춘천 성암감리교회 

하나님과 사랑

요1서4:7-12

 

요한서에는 중대한 선언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오직 형제와 사랑하는 데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4:7-8, 12). 그리고 다음에 그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종교를 다음과 같이 부정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12절). 이는 사람이 기도든지 고행이든지 함으로써 어떤 몰아경에 몰입해서 그 영이 하늘로 올라가서 신과 그 세계를 경험한다는 당시의 영지주의를 거부할 뿐 아니라 구약 해석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구약에는 여러 자료들이 있습니다. 가장 낡은 자료에는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과 접촉하고 그 다음은 간접으로 꿈, 환상, 또는 천사 같은 것을 통해서 사람에게 보입니다. 그리고 좀 더 후기로 내려와서는 제사를 지내는 그 순간에만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계열이 성전 중심의 종교, 즉 의식 종교가 되었던 거죠.

 

그러나 이 요한의 편지에서는 저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같은 많은 족장들이 하나님과 대화했다는 것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함은 저들이 하나님을 객체로 본 것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즉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상 구약, 족장들의 신앙은 어떤 신비주의도 사변도 아니고 삶 자체였습니다.

 

요한서의 저자는 유다 율법주의도 부정하고 있습니다. 유다 율법주의는 계명과만 마주서고 하나님은 사실상 사람의 영역 밖으로 멀리 후퇴한 피안적인 하나의 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들이 직접 마주 선 것은 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것이 중추를 이루고 있고 벌로 협박하는 율법이었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율법으로 바꾸어 가지는 한 역사적인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만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지배해야 참 하나님이 아닙니까?

 

기존에 내려오는 대중의 하나님 관(觀)을 부정한 이 편지의 주인공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다’(8절).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떤 뜻을 가지는 걸까요?

 

첫째, 하나님은 ‘하지 말라’가 중추를 이루는 율법을 내세우고 벌로 협박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를 사람에게 내맡기는, 사람의 삶에 대한 긍정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9절에 나타나죠. 그는 우리를 사랑해서 그의 독생자(즉 그 자신)를 내 맡겼다고 하는 그 구절 말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사랑이라 함은 피안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떤 객체가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분이라 말입니다. ‘사랑-그것은 나와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지 독립된 어떤 실체는 아니다.’ 즉 나와 너, 즉 “우리”라는 범주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지 유아독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시편 42편에서는 ‘너희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며 그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원수들의 힐난에 대답할 길이 없어 호소합니다. 요한복음에 빌립이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는 그래서 그 빌립의 요구가 부당한 것을 지적하면서 ‘네가 나와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느냐? 나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보았을 텐데’라고 말하죠? 즉 예수는 지금의 삶을 떠나서 어떤 객체를 찾는 그런 사고를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할 때에는 빌립과 같은 대중의 요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 것은 어떤 사변적, 우주론적인 원리의 파악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생애, 무엇보다도 그의 십자가의 사실에서 계시되었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렷한 어떤 인간의 행위입니다. 그러니 이 예수의 사건은 객관화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계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만 알려지는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행위에서 나(자신)을 보았습니다. 그의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의 부활에서 자신들의 새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이 전체 사건에서 내가 하나님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피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 차안(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것이죠.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는 이 편지는 그 대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길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실존적인 이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 길은 12절에 나오는 대로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리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어떤 신비한 매개물인가요? 여기서는 어떤 사랑, 어떻게 하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다. 또 리비도가 아니다’라고 사랑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정의한 것이 있다면 18절에 나오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려움, 공포의 반대라는 거죠. 이 말은 사랑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사랑! 그것에는 과감해라. 사랑에서는 두려워 말라’라는 말입니다.

 

결국 사랑이란 것은 사람들에게 이미 자명한 것임을 전제합니다. 누구나 이미 하고 있고, 원하고 있고,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신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랑에 대한 언어적인 규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사랑하려고 할 때 또 사랑할 때 스스로 참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자명한 몇 가지 현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어떤 경우, 어떤 장소에서 나를 요구하고 어떤 경우에야 내게 요구되는 분이라면 그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나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는 전체로서의 나를 요구하고 나도 하나님을 내 삶 전체와 관련된 전체로서 요구하여야 참 산 하나님입니다.

 

사랑도 그런 것 아닙니까? 사람의 삶 전체를 언제나 어느 장소에서나 끝없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은 하나의 오락처럼 심심풀이로 시작할 수 있죠. 그러나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것은 내 삶 전체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사랑, 그것이 곧 내 실존의 다른 표현인 것을 우리는 경험하지 않습니까?

 

둘째, 사랑은 객관화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관계적인 것입니다. 또 사랑은 나와 유리해서 중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홀로 있는 어떤 개념이 아닙니다. 사랑은 관계에서 이루지는 그 무엇입니다.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서 내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느껴본 사람은 압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소유 할 수 없다고 해서 정지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내가 사랑하려는 욕구나 받으려는 욕구는 내 한계, 즉 내 영역 밖에 있습니다. 이 사랑의 요구는 이만하면 족하다가 없죠. 받으면 받을수록 더, 더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사랑은 마침내 내 한계성을 뛰어 넘어서 내가 해체될 듯 한 상황에 나를 몰아 넣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리라.’

 

요한복음에도 ‘나를 보았으면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보지 않느냐?’고 하죠.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를 통해서 본 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를 ‘내 피와 내 살을 먹으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 하나님은 어떤 피안에 도사리고 있고 내게 어떤 계율을 주어 벌과 상을 어느 때에 주는 이가 아니라 그 자신을 우리와 관련지어 우리에게 내맡김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하나님임을 말하는 거죠. 요한복음에서는 우리가 찾아 올라가서 만날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관계를 갖고 사랑을 하려고, 받으려고 하면서도 내 안에서 사랑에 굶주림을 느낄 때, 즉 사랑하면서 비로소 경험하는 사랑에 대한 굶주림 속에 찾아와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바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예수를 통해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일직선을 긋는 사랑을 믿는 이들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버려도 이 사랑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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