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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김홍전 목사............... 조회 수 726 추천 수 0 2017.08.06 0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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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3-16 
설교자 : 김홍전 목사 
참고 : 성약교회 

성경: 마5:13-16절/고전10:23-33절/롬14:1-23절
제목: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 산 위에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
오늘은 우리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말씀을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빛에 대하여 말씀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나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4:21-22). 누가복음 8:16-18절에서도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등불 혹은 빛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친다]는 말씀이 있고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 나타난 빛과 연결해서 산 위에 있는 도시 혹은 도성이 숨기우지 못한다는 것과 그 다음에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는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불을 켰든지 안 켰든지 사람들의 눈에 현저하게 보입니다. 이처럼 너희들도 현저하게 남의 눈에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사람들인데 현저하게 남의 눈에 무엇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냐 하면 빛을 나타내야 할 것이지 추한 것과 암매를 드러내서는 아니 된다. 너희들은 산 위에 세운 성과 같다. 너희가 빛이라는 것은 마치 산 위에 세운 동네와 같이 현저해서 증인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너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하나가 그렇다는 말보다는 {너희}라고 하셔서 집단인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땅 위에 구현해 나가는 거룩한 개체는 사람으로 볼 때는 많은 사람이 종합해서 구성된 것이고 사회적인 형태로 볼 때는 한 개의 조직체이지만 그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가지고 있는 생명의 표현으로 볼 때에는 한 개의 유기체입니다. 또한 이것은 “거룩한 교회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관점으로 볼 때에는 택하신 족속이고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벧전2:9). 단순히 교회라고 하는 말보다는 거룩한 나라, 이 나라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는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의 대강령을 선언하실 때에 ‘내 나라는 세상에서 빛이다. 그리고 내 나라의 구성 분자는 너희들이고 너희들은 조직체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이 거룩한 나라의 한 지체의 분자로 존재해서 빛을 비추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 빛을 비출 때에 그것이 횃불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 세운 동네와 같이 환히 빛나려면 그것은 “전체” 즉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는 땅 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로서 마치 산 위에 세운 동네와 같이 거룩”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너희들이 거룩한 교회로서 산 위에 세운 동네(성)와 같이 현저하게 나타나서 빛으로 인간의 사회 위에, 역사 위에 비추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 위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하나님 나라의 현현은 무엇보다도 빛이라는 점에서 그 특색을 가집니다. ‘너희들이 이 지상에서 세상 사람과 사회와 인류와 함께 섞여 있을 동안에는 소금으로 존재해서 자기 고유의 맛을 늘 유지하는 것이지만 너희들이 세상을 향해서 비추고, 다른 사람들이 너희들을 객관 하게 될 때에는 높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주의해라’ 그런 말씀입니다.


진실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재하되 홀로 그렇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서 빛이 못 되는 것은 아니지만 빛으로 말하자면 혼자 들고 있는 횃불입니다. 하지만 혼자 들고 있는 횃불보다 산 위에 있는 한 분자로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빛으로 존재하는 교회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2. 세상에 빛으로 존재하는 교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현저하게 빛인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한 부분인가의 여부가 분명해야 합니다.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존재해야 할 세상이 빛을 요구하는 세상이라는 것이고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할 때에는 너희를 요구하는 세상에 부패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소금이 필요하고 암매를 흩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데 너희는 과연 이 세상에서 빛으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한 분자로, 세상의 암매의 일부분으로, 세상의 암매를 그대로 현시하고 있는 소위 인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느냐 그 말입니다.’


분명히 인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독교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참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인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인류 문화 전체에 대해서 그 가치를 바로 볼 수 있도록 비춰 주는 빛으로서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는 본래 의미가 없는 것이고 여타의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빛이라 할 때에는 무엇이 빛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화의 총화와는 별다른 것”이라야 합니다. 문화적인 형태나 문화적인 내용에 대해서 참된 가치를 비출 수 있는 본질적이고 독점적인 특성과 능력을 간직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요즈음 이런 것을 떠나서 세상에 있는 사회적인, 정치적인, 문화적인 모든 운동에 기독교가 상당한 철학적인 원칙을 제시를 하는 것같이 떠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러면 ‘그런 운동이 빛으로서 취하는 행동인가 아니면 문화로 타락하고 세상에 있는 위대한 종교로 타락하고 말겠다는 것인가를 반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인류의 문화와 인류의 역사를 장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암매를 더 좋아하는 까닭에 빛을 좋아하지 아니할 때에는 정죄를 하든지 결정적으로 이 세상에서 끌어내든지 하라는 것이지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의 한 부분이 되고 세상의 영광이 되고 꽃이 되어서 존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들어오셨을 때에는 어떤 면에서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이 되셨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특이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서 인류 전체의 암매의 역사에 붙이신 일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암매에서 건져내시고자 하신 것이지 역사의 암매 가운데 한 부분이 되어서 영광이 되어서 빛을 내 주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를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찬란한 영광의 꽃의 하나로 생각한다면 기독교를 타락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류의 영광의 꽃이 아닙니다. ‘인류에 대해서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이지 인류 사회의 암매에 기쁨이 되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인류 사회에 기쁨과 평안을 주려고 존재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께서 다음의 말씀을 들으면 충분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알지 말아라. 검을 주러 왔다. 내가 주는 검은 심지어 너희 가족까지라도 서로 싸울 그런 검이다. 왜냐하면 갈라내는 싸움이니까, 구별하는 싸움이니까 그렇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간음하는 여자 같은 이 세상 사람들아, 만일 너희들이 이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면 무엇이 되는 줄 아느냐? 세상과 벗된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다. 세상의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맺는 것이다’ 라는 말씀의 요지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세상의 한 분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로는 이 세상에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분자로 있지만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분자로 있는 것으로는 특색을 가진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구별되어 있음으로써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점에서 비로소 빛이 되는 것이지 세상에 속해 있을 동안에는 암매한 세상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엄연히 객관적으로 볼 때 높이 현저하게 비치지 않느냐? 너희는 현저한 자다. 어느 구석에서 세상 속에 섞여 있어서 남이 가서 검사하고 분석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너희는 현저하게 구별되어서 따로 떨어져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집안을 비추는 등불
이어서 예수님은 이제 어떤 개인의 집안에서의 일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5). {너희}라는 전체가 땅 위에서 인류의 역사 위에서 빛 노릇 하는 것을 말씀하신 주께서 이번에는 ‘개인의 집으로 들어가 보자. 너희 집에 등불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로 덮어놓거나 침대 아래 껌껌한 속에 집어넣어 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등잔 대 위에 딱 놓아서 그 빛을 온 집안에,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교회를 이야기하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분자들인 신자들이 개인 생활이나 사생활에 있어서 마치 집안의 등경 위에 놓여 있는 등불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셔서 여기서 비로소 개인이 어떻게 빛을 비춰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면 ‘네가 바깥에 나가서 떠들기 전에 먼저 네 집안에서 등잔의 불과 같이 비춰라. 네가 참으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씨를 받아서 그것이 네 속에서 특성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집안에서도 마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다.’ 잘 믿는 사람 하나가 믿지 아니하는 집안에 있을 때에는 믿지 않는 집안에 그가 빛과 같이 비춘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 무엇이 참된 생활인지 무엇이 참된 목적인지를 그가 비로소 제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어둠 가운데 있는 이에게 이렇게 가야 한다는 것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빛이고 소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현저하고 분명하게 드러나는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그 집안에 빛을 비추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빛이므로 말속으로 들어가거나 침대 밑에 숨겨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마5:16)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숨어서 긴지 아닌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아닌 척하고 덮어쓰고 살지 말고 분명히 사람 앞에서 나를 아노라고 하고 살아라. 증거의 생활을 해라. 네 입으로나 네 생활로나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그리고 나는 죄인일지라도 그가 나를 붙드신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이지 숨어서 아닌 것같이, 이교 국가에서 소수로서 비난받기 쉽고 그 형편과 그 사회의 관습에 잘 융화되지 않으니까 그저 어디 가면 아닌 체하고 가만히 지내다가 하지 말아라. 너는 어디 가든지 신자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사과하는 태도가 아닌 떳떳한 태도를 취하는 말씀입니다.


4. 빛의 열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빛의 행실이라는 것이 물론 착한 행실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빛을 비춘다는 것이 또한 착한 행실입니다. 이렇게 해서 너희가 빛의 열매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오늘 여기서 말씀하신 두 가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빛이라고 할 때에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에서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이 세상의 인류 역사를 향해서 빛이 되어서 활동하려고 할 때에 그 빛은 인류 역사에 대해서 이 역사는 이미 정죄 받은 것이고 인류는 멸망 받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 인류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고 평화를 누릴 수 있고 앞으로는 잘 살게 되고 그렇게 해서 여기 천국이 초래한다 하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가 역사 위에 있다는 것은 전 세계의 역사를 차례차례 교화하고 그 사람들도 다 같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 가운데 그냥 거저 들어오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일 이것을 반대하고 끝까지 저항할 때에는 바윗돌에 부서지는 것같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이미 심판을 받아서 하나님이 언제 그 심판을 집행하실는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빛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로서도 그렇지만 그러면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 빛의 열매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너희는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8-9).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적 품성을 드러내고 살면 빛이 나타나는 것이지 빛 노릇을 하겠다고 무슨 사업을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인 그리스도적인 선과 의와 진실 가운데 있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착하다}는 것은 “악”에 반대되는 용어입니다. 악은 ‘결핍’을 표시합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표준 하에서 살지 못하고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완전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표준이 각 사람에게 있어서 그 시기에 그 사람은 요만큼 되어야겠다는 표준이 있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분량대로 건강한 사람으로 장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먹은 아이가 세 살 먹은 아이만큼 장성해야지 세 살 먹은 아이가 열 살이나 스무 살 먹은 사람같이 커 놓으면 무슨 병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덮어놓고 굉장한 사람, 충분한 성인의 분량을 가지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위치에서 얼마만큼 자라야겠는가 생각하고 거기에 이지러짐이 없고 불완전이 없이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에게 필요한 것과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착한 것이고 건실한 장성”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었다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 사실이 내 인격 안에서 구체화될 때 의”로 나타납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의라는 말은 ‘진실하고 거짓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적인 한 인격이 그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그의 장성으로 실증하고 나가는 이런 것이 빛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장성}이라는 것은 “굉장한 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장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해당한 대로 건실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자꾸 커 나가라’는 것입니다. ‘육신이 건강한 것과 같이 심령의 생활도 기형적이고 괴상한 것을 따라다니면서 광신적으로 변해서 떠들고 돌아다니지 말고 건실한 상식과 건실한 판단을 가지고 건강하게 자꾸 자라 나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모르지만 내일을 알고 내일 모르는 것을 모레에는 알고 이렇게 아는 것이지 한꺼번에 앉아서 기도해서 무불통지로 다 알려고 하는 그런 괴상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의 생활이 정상적이고 건강하여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건실해 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우리의 생활이 정상적이고 건강할 때 인격이 그 속에서 아주 건실하게 나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된다는 사실을 늘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렇게 “너희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에게 다 비취게 하라”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야 하지 어디에 감추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아니 나타나고 말 것이다는 것입니다. {감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새로운 생명을 묻어 둬 버리고 새로운 생명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적인 품성으로 나타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교에 들어가면 이교적인 풍속을 좇아서 행하고 살고 안 믿는 사람의 사회에 가면 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본떠서 그냥 그 사람들과 한데 섞여서 나도 당신네의 한 분자올시다 하는 태도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건실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건실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빛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혹은 석 달 열흘 기도해 가지고 성자가 되려는 그 엉뚱한 욕심을 부릴 까닭이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만치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내가 당장에 성자가 되려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남에게 줘 버리고 ‘아 이제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니까 문제없다’ 이렇게 몰상식하고 불 건실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열매는 착함입니다. 그렇게 결핍이 있는 괴상한 광신적인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건실한 인격으로 장성의 분량에 해당한대로 살아라. 예수 믿은 지 석 달밖에 안 된 사람이 성자 노릇 하려고 하지 말아라. 석 달 배웠으면 석 달 배운 만치는 생활하겠다’ 그것뿐입니다. 젖을 석 달 먹었으면 석 달 먹은 만치 크는 것이지 스물 살 먹은 사람같이 큰다면 그것은 병입니다.


이렇게 빛의 열매를 정당하게 다른 사람에게 늘 비추고 나가는 것이지 만약 다른 사람 앞에서 아닌 것같이 은폐하려고 하면, 결국은 그리스도적인 정신과 거룩한 사상이 너를 통해서 나타나려고 하는 자연적인 경향까지 인위적으로 눌러서 그 시대나 환경에 순응하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그래 가지고는 네가 무슨 빛이냐는 말씀입니다.


이교 국가나 압도적으로 저회적인 사회에 살 때에는 자칫 그 저급한 사회의 일반 기풍과 조류를 그냥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빛으로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고 세상이 다 이러니까 나도 이렇게 해야겠다는 식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말고 이미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별된 생활의 위치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것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그것을 위해서 네 속에 성령을 이미 주셔서 거하시게 하셨으면 성령을 의지해서 네 육신의 기능과 영혼의 기능에 해당하는 대로 차례차례 자꾸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번에 빛의 생명을 드러내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장성의 분량대로 조금씩 조금씩 빛을 내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즉 “장성의 분량이 고만큼이라도 빛을 나타내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스위치를 내려놓은 것과 같이 하지 말고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늘 환히 비추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등경 위에 등불을 놓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왜 말 아래 두느냐? 말 아내 둬서 어떻게 할 작정이냐? 네가 진정으로 네 속에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있으면 말 아래 들어가서는 못 견딘다. 말이 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타올라 갈 것이고 네가 만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해서 교묘하게 세상에 맞춰서 살려고 자기를 꾸밀 때에는 그 불이 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짓을 하지 말아라.’ 이것이 가르치시는 거룩한 뜻입니다.


5. 세상의 빛(고전10:23-33절)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빛 노릇을 해야 한다든지 소금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빛이면 빛답게 분명히 자기의 속성이 빛으로서 명료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5:8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하는 말씀이 있어서 여기 이 빛에 대해서는 빛이니까 빛이 잇는 자처럼 무엇을 행하라는 확실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으로 또한 하나의 해석으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성령님의 해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까, 산 위에 세운 성이니까 숨기우지 못할 것 아니냐? 그런고로 명료하게 모든 사람들이 환시할 수 있는 현저한 빛을 가져야 할 것 아니냐? 독특한 자기만의 현상, 많이 주시할 수 있는 분명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리고 두 번째 성은 그만두고 이제 한 개인의 가정에 들어가서도 너희는 빛이다. 불을 켜서 말 아래나 평상 아래 두지 않지 않느냐? 그것은 등경 위에 놔야 의미 있는 것이다. 불을 켜 놓고 곡식을 되는 말로 덮어놓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6. 빛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소금도 그렇지만 빛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면 “누가 진정으로 빛이냐 하는 문제가 먼저 있고” 둘째로 “그 빛은 어떻게 가려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의 경우에 있어서도 맛을 잃은 소금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같이 빛이 전혀 발광을 하지 아니할 때에는 빛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었을 때 소금이 아닌 것과 같이 빛을 비추지 않을 때 빛으로서 의미가 없습니다. 등불일지라도 빛을 안 비추면 빛은 없는 것입니다. 등불이 안 비춰지다니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하겠지만 무엇으로 덮어씌워서 차단해 버리면 안 비춰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속에서 빛을 내고 있을지라도 다른 것으로 캄캄하게 딱 둘러씌워 놓으면 바깥으로 비춰질 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빛이 비취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5-16).고 말씀하셔서 너희의 빛을 사람에게 비춰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 누구에게든지 다 이 빛이라는 말이 해당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착한 행실을 해서 다른 사람 앞에 비춰서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과연 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행동하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말씀은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고 하셔서 너희가 빛을 내도록 하라는 말이 아니라 있는 빛을 비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빛이니까 너희 광명을 차단하지 말고 비추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으로 빛을 발휘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비로소 그가 빛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지 광명을 발휘하고 있지 아니할 때에는 그 속에 빛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말로 덮어 씌어는지 걷어 놓고 등경 위에 놓았는지는 결국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졌는지 안 비추어졌는지에 의해서 식별되는 것입니다. 어둠에 밝음을 가져오는 것이 빛입니다.


그런고로 어둠이 그냥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내가 빛을 비추었다고 떠들어 봐도 그것은 비추지 못한 빛입니다. 만이 그 사람 속에 빛이 있다면 무엇으로 차단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처음부터 빛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빛이 아닌 사람이나 빛을 차단하고 있는 사람이나 결국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마찬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빛을 나타내지 않든지 빛이 처음부터 아니었든지 좌우간 비춰지지 않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은 식별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특별한 종교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에 빛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행동이 있기 전에 존재 자체가 빛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니까 비로소 빛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그 존재 자체가 빛이지만 단지 차단되어서 비춰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그 사람이 아무런 행동을 하기 전에는 빛으로 존재하게 하는가 하면 두말할 것 없이 참된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에게 빛이라는 호칭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이십니다. 또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5)고 하셨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9). 여기서 빛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5-36). 여기 이 말씀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빛으로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께서 내신 이러한 거룩한 방도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이 적용하신 빛이라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선지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1:8을 보면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여 온 자라] 해서 세례 요한은 그 빛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세례 요한도 빛이고 선지자도 빛이고 예수님도 빛이다’ 그런 의미로 빛이라는 말을 쓴 것이 아니고 여기에 특수한 용어를 쓴 것입니다.


따라서 이 칭호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적용할 때에도 오직 그들이 주와 더불어 주님의 빛을 세상에 같이 비출 수 있는 존재가 될 때에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셔서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내재해서 그것이 밖으로 나타날 때에 세상의 빛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광원이 되어서 빛을 낼 수 있는 능력자로 존재케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자로서 존재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2:15). 여기 {빛들}이라는 말은 원래 빛을 가리키는 말을 쓴 것이 아니고 헬라 말로는 ‘조명자’, ‘빛을 비추는 자’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이나 예수님이 당신에게 적용하시는 말씀인 “표시”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포스테르”라는 말을 썼습니다. ‘빛을 비추는 자, 조광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빛 자체가 아니라 등불의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요5:35). 여기는 헬라어로 {뤼크노스}라는 말, ‘등불’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요1:4-5/12:46)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요한일서 1:7에는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신다고 했고, 디모데전서 6:16에도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104:2).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사2:5)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약1:17)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서부터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서 빛의 아들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잘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 가운데 가담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입고 그와 동시에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실 때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하신 그 생명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새로운 생명이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로 존재하는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그 아들 하나님의 말씀인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야말로 사랑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그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이 내 안에 있은즉 내가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 이미 빛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혹은 [이기지 못하더라]. 그리고 [참 빛 곧 세상에 내려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1:9) 하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생명의 일체를 이루고 예수님의 품성을 우리의 품성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과 같이 완전하고 충만한 품성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기능 안에서 우리의 장성의 분량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기능의 한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4:6)고 했습니다. 즉 변개로 말미암아 새로운 거룩한 지적인 기능을 갖게 된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변개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고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어서 참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면 그 안에 분명히 중요한 변개가 일어나는데 그 변개에서 첫째로 중요하게 봐야 할 현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으로 비췸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빛이라는 말은 먼저 “지적인 작용, 인식의 작용”과 통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깜깜하더니 빛으로 비췸을 받았다’는 말을 씁니다. 일종의 은유인데 이것을 현실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내가 암매해서 무엇을 모르더니 이제는 알 수 있는 힘을 얻어서 깨닫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할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문제는 ‘과연 나 자신의 빛을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이고 내가 빛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도덕적인 행동 여하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본체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즉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통해서 깨닫고 확신하고 그로 말미암아 각성한 자가 당연히 갖게 되는 인격적인 결과를 얻어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이라는 말을 얼른 몇 가지 도덕적인 품성이나 도덕적인 행동으로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 악할 때 자기는 선하고 또한 남에게 관대하고 친절하고 또 다른 사람 보기에 착한 사람이고 양심적인 사람이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양심적이라든지 착한 사람이라든지 하는 말은 물론 정도의 문제이고 상대적인 용어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을 듣는 정도를 가지고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빛인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도덕군자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를 전연 알지 못하고 새로운 생명을 전혀 받지 아니한 박애주의자도 있고 인도주의자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빛이라고 해석한다면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월등하게 광명한 빛들일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도 빛이지만 너희도 빛이다’ 이런 말은 아닙니다. ‘너희야말로 빛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빛이라 할지라도 암매이다. 그것은 어둠이다.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이 광명의 지식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의 상대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설령 그가 풍성한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모르는 것이 있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려고 한다 할지라도 알아볼 능력도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영적인 사실이다. 이 영적인 사실은 육적으로는 알 수 없다. 오직 영으로서만이 가증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 사람의 생명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지 아니하는데 그것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논리의 형식과 사고의 형식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자기가 선험적으로 받은 논리의 형식이라는 것은 거기에 도저히 인식할 만한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하나님의 성령으로라야 비로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지적인 기능이 우수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지적 기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나 영적인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 점에 있어서는 전부가 암매한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 철학을 하고 아무리 훌륭히 종교학을 많이 공부했을지라도, 가령 그 사람이 신학을 많이 공부해서 신학의 모든 학설을 통달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신학의 학설의 통달이 결코 빛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학문의 체계를 가지고 학문의 내용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의 지적인 기능이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기억하기도 하고 자기의 논리 형식으로 체계도 세우고 정돈도 하고 표시도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것이 빛이냐 하면 아닌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위대한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몸을 사르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위대한 빛이냐 하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신문은 그러한 행위를 두고 위대한 광명의 빛이라고 떠들어 댈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빛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7.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 빛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내가 생명으로 일체가 되어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때 비로소 내가 세상의 빛인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이 모든 거대한 질서, 하나님이 내신 구조에 있어서 빛인 것입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비로소 우리를 통해서 인류 역사 위에서 계시하시고 구현하시는 까닭에 그때야말로 인류는 자기의 행방을 알 수 있고 자기가 가야 할 바른 목표에 대한 것을 비로소 듣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받든지 안 받든지 하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은 자기 행하는 것이 악한 고로 빛보다도 어두움을 좋아하니까 받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셨고 모든 필요한 교훈을 하셨지만 세상은 받지 않고 반대할 뿐 아니라 종교가라 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빛이 세상에 와도 반드시 사회가 빛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먼저 어떠한 사람이 빛으로 존재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참 생명, 그리스도의 그 본질적인 생명이 그에게 임했을 때에 그가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먼저 빛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그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빛으로 낳아 놓았으니 이제는 빛있는 자처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어두움이더니 행동을 잘 하고 감정을 잘 조절하고 태도를 바르게 하고 목적을 가지고 종교학을 연구했으니 이제는 빛이 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소수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는데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만큼 공부했다든지 이 세상의 과학지식이나 일반적인 원칙에 대해서 많이 안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당시 제자들은 갈릴리의 어부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런 줄 알아라.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빛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빛이니까 빛 노릇을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지 빛이 아닌데 이제 네가 행동을 그렇게 하면 혹시 그것을 빛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참된 빛이신, 빛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그리고 세상에 내려오신 참 빛인 예수님과 생명이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끊임없이 지지하셔서, 끊임없이 생명의 투사를 받아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비로소 빛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12:4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6).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빛인가 그리고 어떻게 빛의 아들이 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그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지식인이고 아무리 훌륭한 이상을 가지고 굉장하게 지혜가 있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을지라도 어둠에 속한 사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5:4-5).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빛으로 존재하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님의 생명은 그 자체가 발광체로서 빛을 발휘합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단순히 달과 같고 예수님은 해와 같아서 예수님이 빛을 비추면 우리는 그 빛을 반사한다는 그런 외면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을 반사하는 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너희 자신의 의식적이고 독립적이고 개성적이고 인격적인 생활 자체가 하나의 빛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즉 ‘기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빛의 근원인 생명, 예수님의 그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으니 그로 인하여 너희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빛이 있는 자가 되었으니 그 빛을 말로 덮어서 가리지 말라는 것이 지금 여기서 중요히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8. 빛을 잃은 교회
너희가 이 땅 위에서 소금인데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말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거룩한 속성들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같이 거룩한 교회가 교회로서의 빛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빛이라고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그 빛을 차단해서 비추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2-23). 너희 눈은 몸의 등불이다. 교회가 이 사회에 등명으로 눈 노릇을 해야 할 터인데 사회의 눈은 그만두고 사회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면서 앞서지는 못하겠으니까 사회의 악을 슬슬 뒤따가면서 어떻게 눈 노릇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앞을 보면서 새로운 광명을 제시하고 ‘이리 가면 안 된다. 저리 가면 안 된다’ 하고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 거룩한 교회의 역사적인 사명일 텐데 역사적인 사명은 그만두고 사회가 암매와 불의 가운데 빠져 들어가서 궤멸하는 상태에 빠질지라도 거기에 대해서 하등 어떠한 대책도 없고 생각도 없고 머리도 없고 빛도 없이 그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교회 안에서도 사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의를 자꾸 행하고 자기네끼리 거래하고 행동할 때에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다


사회에서 선거를 할 때 일어나는 부패가 어느새 슬슬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직분자를 선거할 때든지 교회의 무슨 행정상 투표를 할 때에도 그 부패한 의식이 횡행한다면 빛은커녕 사회의 어두움을 추종하는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빛으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권모술수를 행하고 유력한 것을 내세우고 하나님 앞에 무엇이 등명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나 신령한 상태를 불구하고 그 사람이 유력한 사람이고 돈 많은 사람이니까 뽑아 놓고 교회의 대표자로 밀고 돌아다니면 교회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빛으로 가겠습니까 아니면 어둠으로 가겠습니까? 이렇게 교회 하나가 어두우니까 사회가 자꾸 더 어두워지는 것에 대해서 책임조차 느낄 줄 모른다면 오늘날 빛으로서의 교회라는 것은 허울뿐이고 말뿐인 것입니다.


그런 만큼 빛으로서 교회의 역할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땅히 역사적인 사명을 알고 역사의 진행 방향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선행을 하고 관대하라든지 친절 하라든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에 대해서는 세상의 도덕군자들이 얼마든지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이 보지 못하는 선지자의 눈을 가지고 역사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데도 불구하고 교회라는 것이 언제까지든지 빛으로 존재하느냐? 결코 그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는 알곡보다 가라지만 가득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한번은 정통 교회였는지 모르지만 가라지만 자꾸 들어와서 모이면 나중에는 깜깜해질 것입니다. 교회 자체로는 빛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끝까지 빛인가? 그 존재 자체가 빛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말세에는 [그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다](살후2:3)고 말씀하셨습니다. ‘배교라는 것은 교회 아닌 것이 하는 것입니다.’ 참된 거룩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모여 있는 교회는 배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연결되어 있어서 생명에서 못 떠나는 것입니다. 생명은 뗐다 붙였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그리스도와 연결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는 끝까지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장을 받지 못하고 만일 배교했다면 처음부터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어떤 교회든지 그 강단이나 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오늘 빛을 가지고 능력 있게 살아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한번 위대해서 바른 개혁 신학과 개혁 신앙을 전달했던 훌륭한 신학교도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는 많은 역군들을 만들어 내는 사례를 우리가 한두 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빛인가? 빛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언제까지라도 빛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에 나는 빛으로 있는지 검토하고 주의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처음부터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항상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운 것입니다. 개인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이 참으로 빛이라면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보증에 대한 애착력이 있고 거기에 대한 민감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해하고 터득하고 각성하고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도 없고 터득도 없고 각성도 없다면 그게 뭡니까? 교회에 앉아서 교회의 정치 이야기를 하고 치리회 이야기를 하고 교회 운동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귀가 번쩍 뜨이지만 성경의 깊은 도리를 이야기할 때는 영혼이 수면 상태 가운데 빠져서 꼬박꼬박 졸고 정신이 없이 한 시간 동안 무얼 들었는지 알지 못하고 나간다면 그런 교회는 장성할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일 까닭이 없습니다.


어디에 나가서 선행을 하라든지 하는 것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른 인식론의 결과로, 바른 도리를 배워서, 성령님이 은혜의 방도로 쓰시는 그 말씀의 도리가 그 속에서 활발하게 역사 했다는 증거로서의 선행이지 덮어놓고 남 보기에 도덕적으로 이 규범에서 이 규범으로 넘어갔으니 이것은 선행이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나 그렇게 보는 것이지 하나님께서는 껍데기를 번지르르하게 해 가지고서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는 것을 선행이라고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십니다. 그 사람 속에 참 빛이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로 분명히 바른 인식과 바른 도리의 각성과 확신이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발휘하게 할 때에 그것이 조화 있는 인생, 그리스도적인 선행인 것입니다. 사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락이 있고, 희락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가 늘 깃들어 있고 거기에 양선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령의 열매라고 할 때에는 한 개의 열매에 그런 면들이 나타나는 것이지 사랑이라는 열매, 희락이라는 열매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이 면으로 볼 때는 사랑이고, 저 면으로 볼 때는 희락인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조화 있고 통일성 있는 한 개의 인격이 구체적으로 어렸을 때에는 희미하게라도 발휘되고 장성하면 크게 자꾸 발휘되어 나가는 데서 선행이 나타나고 그런 선행을 보고 ‘아 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재이다’ 하고 그의 존재가 어떤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이 남에게 자기의 재물을 흩어서 주고 구제했으니 훌륭하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그것은 ‘자기의 몸을 주어 불사를지라도 그 속에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9. 빛으로서의 생활
개인이 빛으로서의 생활을 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 안에 분명히 옛 사람적인 요소가 있어서 인간적인 지력과 도덕적인 능력과 인간적인 정서가 자기를 지배하는 일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자기를 교인답게 만들기도 하는 거기에 가짜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 빛을 은폐하는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적대적인 세력으로 나를 은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교묘하게 자기의 도덕적인 능력과 자기의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훌륭한 기독교 신자를 만들어 보려고 인조적인 성자를 꾸려 내기 시작할 때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빛을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빛 대신에 헐 수 없는 괴상한 종교인 하나가 거기 탄생하는 것입니다. 빛이라고 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하고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빛으로서의 생활을 오해케 하고 이상야릇한 형태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빛으로서의 가장 자연스러운 생활은 사람이 장성의 정도에 따라서 차례차례 장성해 가면서 자기에게 있는 만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깨달은 만큼 믿음의 분량 안에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성해 가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만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나타나야 할 것이냐 하면 일 년 전에 희미하던 그리스도의 품성이 일 년 후에는 좀 더 명료하고 십 년 후에는 아주 분명히 명료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 년이 지나도 고만해 가지고 점점 더 타락하고 점점 더 캄캄해 가지고서 정통이고 보수고 찾아야 의미 없는 일입니다. 십 년은 그만두고 오 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얼마만큼 장성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빛으로 장성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갈수록 부패가 더하고 갈수록 암매가 더해 가면서도 그런 정통을 보수하다가는 나중에 어디로 떨어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항상 오늘이라고 하는 동안에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결국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교회 전체의 역사적인 진행의 방향에서 회개해야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빛 노릇을 한다고 할 때에는 항상 시작은 내 속에 주신 영원한 생명이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역사와 힘주심으로 가장 그리스도적인 생명을 나의 영혼의 기능들을 통해서 드러내기 시작할 때에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루 열여섯 시간을 근로하지 아니하고는 먹고살 수 없는 생활을 할지라도 빛은 빛인 것입니다. 빛 노릇 한다는 것은 어떤 괴상한 종교인 노릇을 하고 시간을 많이 써서 돌아다니면서 자꾸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집에 앉아서 매일 장사하거나 온종일 농사를 짓고 혹은 공장에 다니면서 하루 열여섯 시간 일하지 아니하면 도저히 먹을 수 없어서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이외에는 공장에 붙들려 앉아서 시커멓게 기름때 묻어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은 빛 노릇을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빛으로 존재할 때에는 기계에 붙어 가지고 일하든지 사람을 만나든지 밥을 먹든지 그 빛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빛이 어디 간들 빛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빛이 아니라면 별 것을 다 해 봐도 빛은 아닌 것입니다. 거기다 아무리 꾸며도 빛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손전등 속에 전지를 넣지 않은 채 껍데기를 아무리 훌륭하게 꾸며도 결국은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 전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전지가 들어 있으면 어떤 상태에 있어도 켜면 켜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 속에 빛이 들어 있는가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매일 먹고 입고 사는 이 자자영영의 생활에서 빛 노릇을 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는 그러한 사람들로 조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교회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시간이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열여섯 시간이나 열여덟 시간을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라도 거룩한 교회로서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매일 매일 먹고사는 일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빛은 빛인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가 항다반으로 지내는 매일의 의식 생활과 우리의 생활을 위한 자자영영의 노력 가운데에서 빛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지 괴상한 선행을 하고 이상한 도덕적 행동을 해서 빛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인도주의의 그릇된 영향인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고전10:31). 먹지 말고 안 마셔야만 영광이 나타난다는 법은 없습니다. 먹기 위해서 노력하고 마시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앞으로 좀 더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의 항다반의 평이한 생활 자체가 빛으로 나타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마땅히 성경이 가르친 중요한 도리로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친 도리가 특수한 종교 행동과 종교적인 생활 태도를 취하는 데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여항간의 생활은 소홀히 하는 해석이 왕왕 우리에게 그릇된 영향을 주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가 돌아가서 집안에서 밥해 주고 아이들 뒤걷이를 하는 가정생활 하나에 여념이 없어서 성경도 제대로 볼 틈이 없고 찬송도 할 틈이 없고 기도도 할 틈이 없으니 신앙이 타락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찬송을 하는 것은 자기가 틈틈이 은혜를 받은 대로하는 것뿐입니다. 자기가 여항간에 어린아이들 뒤치다꺼리하고, 집안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해도 해도 줄지 않고 아무런 현저한 결과가 안 나는 일을 일 년 365일 끊임없이 하고 십 년을 끊임없이 하니까 도무지 빛이 안 나타난다? 그런 일없습니다.’ 그런 이들로 하나님 나라가 조직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역사 위에서 하나님 나라는 구체적으로 그런 이들로 구현되고 능력 있게 나타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수하게 종교적으로 나서서 떠들려고 하는 사람들로만 모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이나 우리의 생활의 방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어떠한 존재로서 어떠한 인격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10.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는 교회(롬14:1-23절)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네 스스로 세상의 빛으로서의 존재의 속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든지 네가 스스로 거기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너희} 라고 지칭하신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특별히 여기서는 산상보훈을 직접 듣고 있는 소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수많은 사람을 다 놓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앞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 있는 소수를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 나라의 이러한 내면적인 강렬한 그리고 현실적이면서 능력 있는 성격을 이제 배웠는데 그러한 것을 가진 너희는 땅 표면에 있는 사회와 인류에 대하여 소금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이 내신 거대한 질서에 대하여 빛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의 빛이라는 말보다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거대한 질서의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실은 어떻게 해서 발생한 것이냐 하면 내가 어떻게 노력을 한다든지 무엇에 도달하면 빛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희는 그렇게 빛으로 존재한다.’ 만일 ‘너’ 라고 하셨으면 개인이겠지만 ‘너희’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것으로 거룩히 구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질서 안에서 독특한 지위와 존재를 가지게 하신 너희, 즉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암담한 인류의 역사에서 너희들의 존재가 빛으로서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고 그런 역사를 계속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암담한 인류 전체의 행진 가운데에 너희는 빛으로서 한 사회적 형태를 취하고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게 비치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가 전신계의 암매 가운데 방황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는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너희의 갈 길을 다른 사람에게 명확히 증시 하는 빛이다.’ 빛으로서의 그의 존재는 천래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이지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조건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자기의 조건으로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을 때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하신 말씀대로 그 생명이 벌써 그 안에 빛으로 임재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들어갔을 대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의 기능의 변개를 받아서 전에 자기의 논리에 의해서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 벌써 빛을 받았다는 중요한 실레요 실증의 하나입니다.


무엇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무엇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빛이 비취었다”는 말로 상징해서 하기도 합니다. 또한 빛이란 말은 정신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깜깜한 데에서 이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없어서 방황할 때 무엇이 그릇된 것이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 식별할 수 있는 환한 광명을 이 지식의 세계, 특별히 정신의 세계에 있어서 빛이라는 말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빛이란 말을 쓰실 때에는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요12:35) 해서 무엇을 안다는 말과 늘 병행해서 쓰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든지 우리 자신을 빛이라 할 때에 그것이 단순히 기계적인 반사의 작용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사상을 주의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큰 빛이고 우리는 다만 그 빛을 반사경과 같이 반사만 한다거나 달과 같이 햇빛을 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친히 선포하셨고 동시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에게서 받은 까닭에 이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존재하시고 그 거룩한 인격이 우리 안에 계신 그의 생명이 변화된 우리 영혼이 기능을 통하여서 나타날 때에 거기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시므로 우리 또한 빛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개의 물체와 같이 저기 있는 광명을 받아서 비치는 반사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로 말미암은 영혼의 기능의 변화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적인 거룩한 인격과 생명, 즉 우리에게 주신 이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게 하셨고 필연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신 그리스도의 속성을 또한 구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체가 또한 빛을 발휘하고 있는 한 등불인 것입니다.
 
11. 인간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빛의 임무


우리 자신이 빛으로서의 본질적인 속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지라도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이 불을 켜서 상 아래나 말 아래 두지 않는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떠한 있을 수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하여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을 켜서 말 아래에 넣을 수도 있고 상 아래에 넣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소견 있고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불을 켜 가지고 말로 덮어놓거나 침상 밑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겠느냐? 불을 켜 가지고 말로 덮어놓거나 침상 밑에 집어넣는 사람이 있겠느냐? 불을 켜서는 등경 위에 놓아 가지고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추지 않느냐’고 하셨지만 말 아래 두지 못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소금의 경우에 맛을 잃은 소금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 아래나 침상 아래 평상 아래 놓아둔 불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상상하기 힘들지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맛을 잃은 소금, 즉 맛을 잃은 소금과 꼭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교회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세상에 맛을 내겠다고 들어가서 도리어 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교회로서의 거룩한 본질적인 속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기독교라는 거대한 사회적인 종교 단체로서의 행동을 시작할 때에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진 독특한 역사적인 특성을 마치 소금이 맛을 잃은 것과 같이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빛이라 할지라도 말이든지 평상이든지 그런 것을 덮어 씌워서 그 빛을 가리고 차단해 버리면 빛은 발휘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알니니안주의와 같이 자기가 노력하고 유지하려고 하지 않으면 생명을 상실하고 만다는 식의 해석이 아닙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아무도 뺏을 수 없는 것이고 자기가 스스로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빛으로서의 그 속성을 은폐할 수는 있습니다. 은폐하는 것은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금이 소금 노릇을 하겠다고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과 더불어 섞이면서 세상의 프로그램과 세상이 가지고 있는 원칙에 의해서 행동하기 시작할 때에, 정치를 하든지 사회사업을 하든지 그 여타 사회적인 인도주의 운동을 하든지 참된 거룩한 교회로서의 자기의 속성을 부지불식간에 상실하고 정치적인 단체와 정치적인 운동의 한 단체로서 움직이는 것이 오직 그들의 소득이 되는 것처럼 행하고 나가면 맛을 잃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빛 노릇을 하겠다고 세상에 들어가서 다른 종교 단체에 없는 기독교적인 독특한 성격이나 여러 가지 도덕적인 행동이나 종교적인 행동을 사회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것들이 반드시 기독교의 본질적인 속성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예배당을 짓되 불교의 절과 같이 짓지 않는 것이 본질적인 속성이냐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그 독특한 기도가 본질적인 속성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속성이란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것들이 그러한 형식을 꾸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 자체를 가지고 그것이 독특한 것이니까 기독교라 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제도와 더 많은 기독교적인 행사를 붙이게 됩니다.

기독교인이 다 일어나서 인간의 역사적인 진행을 위해서 노력하고 수많은 공헌을 한다고 해도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됐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구제하고 그 역사의 목표를 정당화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가졌다 하더라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범주 하에서 그것을 결정하는 까닭에 하나님더러 ‘최후에는 거기에 이르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존재하겠습니다’ 한다면 하나님 당신이 절대의 속성을 버리고 인간의 이상적인 규범 안으로 들어오시라는 이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아름답고 위대한 경영을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성의 분량대로 지금까지 희미하던 것과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것을 더 알고 밝히 보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 역사의 진행을 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다 알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인류는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고 한마디로 끝나게 그렇게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마다 다 알게 보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한 목표를 세우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다른 어떤 말보다 거룩하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순결하다는 말보다는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도덕적으로 순결하다 그렇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도덕규범 하에서의 순결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이다. 그건 구별된 것이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 그런 까닭에 너희들이 멋대로 나를 생각해 가지고 이것이야말로 신이고 신적인 사상이라고 하는 그따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적인 사상으로 인류의 목표를 세우고 이상을 세우고 진행하는 데에다 여러분이 나가서 피를 쏟고 땀을 쏟은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추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인류의 어리석음과 암매에 대해서 그것을 밝히 보리고 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빛으로서의 임무”입니다.


12.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함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빛 노릇을 하느냐? 맨 처음에는 먼저 “자기가 바른 것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참된 도리를 바로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가 자기 식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해석하고 따라 나갈 때에는 아직도 암중모색을 하고 방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지적 기능에 새로운 재료를 얻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적인 새로운 생명의 발휘와 성장이라는 것은 항상 총체적이고 종합적이지 부분적이지 않은 까닭에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적인 인격의 장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참으로 알았다고 하면 그것이 그만큼 그리스도적인 인격으로 장성을 했다는 말로 표현이 되도록 분명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많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 사람의 도덕적인 능력이 거기 더 따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정서의 깊이가 더 위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사람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온전하신 분이고 그리스도야말로 죄가 없으신 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표준에서 탈락한 것이 없으신 분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이냐고 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표준을 위배하든지 거기에 도달하기에 부족하든지 다 같이 죄라는 말을 쓴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에서 분명히 그 두 가지의 큰 사실을 보인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항상 탈락과 부족, 결함과 결핍이 붙어 다닙니다. 그런 까닭에 지적인 편중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정이 너무 과다해서 정을 그냥 압도당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지적으로는 튼튼하고 고집이 세지만 깨닫는데 있어서는 도무지 암매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실 때에는 그러한 편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까닭에 그렇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은 그에게 그러한 인격상 결함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분의 인격에 있어서는 무엇을 알았다는 것이 동시에 전인격이 장성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에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거룩한 새사람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를 깨달아서 갈 길을 모르던 그 사람이 갈 길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동시에 그가 갈 길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명령입니다. 성경에 있는 어떤 명령이든지 엄격하고 냉정하게 바로 관찰할 때에는 그것이 가장 쉬운 말일지라도 인간이 힘써서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경계가 아닌 것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것 누구든지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알아야 할 것이고 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에 대해서 ‘그러한 표준을 세우고 살아가라는 말은 되겠지만 그게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그저 하다가 못하게 되더라도 한번 해본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평이한 문제는 ‘아 이런 것쯤이야 내가 어떻게든지 해 본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부지런한 것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으르지 말라고 했으니까 부지런해야지’ 하고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어떻게 사랑하느냐? 이건 사랑의 지극히 높은 표준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뿐이지 우리가 거기 도달할 길은 없다. 없지만 하느라고 한번 해 보고, 하는 체라도 해보고 가다가 자빠질지언정 한번 해 보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덕적인 미미한 규범에 대해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고도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덕이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거룩한 그리스도적인 인격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사람으로는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이 제 스스로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차원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지 여기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네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하라든지,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사상을 가지고 해 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우리에게 요구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서 영혼의 기능을 통해서 나타날 때, 즉 보혜사인 성령님의 임재와 은혜로 지키심과 붙들어 주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적인 인격이 나타날 때 그 구체적인 세목으로서 ‘부지런해서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인 인격의 한 가지 표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하신 분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분이라는 것을 내 몸으로 나타내려고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과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같은 차원에서 늘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지런은 그냥 우리 위치에서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예수님이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그러한 종류의 사랑과 은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랑은 내가 예수님이 되기 전에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은 총체적으로 하나의 목표, 즉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은혜의 인격을 드러내라는 목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모든 도덕적인 요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악의 본성 하에서 발생하거나 행할 수 있다는 조건에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요구를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능에서 불가능까지 넓은 범위의 여러 가지 규범을 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상 이것 전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 속성의 위치에서 하라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혈육으로 아무리 애를 써서 굉장한 도덕적인 행위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혈육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15:20)고 하여 인간의 피와 살로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노력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상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만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욕망이나 요구하는 바가 다만 인간적인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이상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지 못할뿐더러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반항하는 일이 될 것이니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내게서 나오는 위대한 인도주의적인 생각이나 위대한 이상을 향한 갈망이나 강력한 노력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차원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생명의 요구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지 못할뿐더러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배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요구가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13.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성경은 분명히 육신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고 했지 육신의 소욕은 하나님의 성령이 요구하시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하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소욕이란 말을 여러 번 생각하여 봤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가지고 여러 가지 욕망을 표시할 때 {헬:에피쒸미아}라는 말을 썼는데 {헬:에피뒤미아}란 반드시 나쁜 욕망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욕망, 열망, 이상, 정신적인 것, 예술가 같으면 예술적인 욕망, 도덕가 같으면 도덕적인 욕망, 철인 같으면 자기의 철학적인 요구, 그리고 사업가 같으면 사업적인 요구, 이런 것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일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면 적극적으로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든지 예술적인 욕망을 갖든지 학구적인 욕망을 갖든지 무엇이든지 그것은 성령의 욕망으로 시작했든지 육신의 욕망으로 시작했든지 둘 중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요구 하에 되든지 나라는 한 인간의 요구에서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반드시 악하고 불의한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이래로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의 희미한 잔재가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속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항상 보편적인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이고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미에 대한 추구가 있고 선을 행해 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선이라는 것을 전연 포기한 것은 아니고 선에 대하여 간절한 갈망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말을 그냥 쓰고 있지 사람이 하나님 형상에서 완전히 변해서 이제는 마귀의 형상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아직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지 못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까닭에 그 속에 부패가 다 끼어들어 있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어떤 욕망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완전한 것에 대한 불완전한 욕망이고 불완전으로 완전을 대신하라는 것이 됩니다. 다만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오려고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저항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육신이 가지고 있는 열렬한 열망이나 이상이나 간절한 추구이든지 혹은 그것이 예술적이든지 도덕적이든지 종교적이든지 헌신적인 것이든지 간에 그리고 더 나아가 위대한 인도주의나 박애주의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성령의 아름답고 조화 있는 그리스도적인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을 저해하고 그 대신에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되는 까닭에 성령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일로 빛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빛을 받아서 갈 길을 알았다면 갈 길을 아는 동시에 이제 그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새로운 지각이 활용되어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은 곧 우리의 전인격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그만큼 장성하는 데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만큼 장성하지 않고는 참으로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14. 빛 노릇과 신자의 장성
 신앙의 장성은 성경을 많이 알아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알면 안 만치 그 생활이 장성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장성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장성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을 어떻게 아느냐에 있습니다. 성경은 줄줄 욀지라도 그 사람이 얼마든지 생활에 있어서는 볼품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외운다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도덕적으로 우수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성경을 주르르 외는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암송 경연 대회라는 것을 다른 여러 교회에서 하는 것을 잘 보셨겠지만 암송을 잘하는 아니가 서서 성경 가운데 편지글이든지 어떤 것 하나를 처음부터 또박또박 다 외우는 것을 보면 신통하게 보이고 굉장한 것을 한 것같이 다 칭찬을 하지만 그러나 그 아이가 성경을 전연 모르는 다른 아이보다 도덕적으로 그만치 훨씬 우수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고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어른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면 그만치 못 외우고 있는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우수하고 인격이 장성한 사람인가? 그런 것


 여기 안다는 문제, 참으로 빛을 가졌다는 것, 갈 길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성경에 있는 어떤 도리를 외우고 있다 하는 문제가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설령 성경에 있는 것을 모두 다 안다고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구원받았다고 증명할 도리는 없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원만 가지고 있지 알고 깨달은 가운데 참 빛인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알았다고 할 때 그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알았다는 것은 단순히 그 도리는 이러이러하다고 책에 있는 것이나 교사가 가르친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전연 모르는 사람이 굉장히 깨달았다면 뭘 깨달았겠습니까? 깨닫기 위한 기초적인 재료가 없는데 무얼 깨달았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 있는 것을 바로 깨닫고 그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 있는 사실들을 먼저 터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확히 하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을 안다는 것은 깨닫기 위한 재료로서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깊이 깨달아서 그의 인격이 장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마치 집에 다 고기도 사다 놓고 음식 거리를 많이 사다 놓았으니 그 사람은 건강하고 배부르고 튼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조리해서 먹고 소화가 되어서 건강을 얻어 가지고 증명을 하기까지는 아무리 재료를 많이 갖다가 부엌에 산같이 쌓아 놓고 야단을 내도 의미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종일 장만을 했어도 안 먹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이 풍부한 잔치와 같이 식료와 같이 우리에게 있을지라도 그것이 내 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고 나에게 자양이 되어서 건강하게 튼튼하게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일은 어디서 발생하느냐 하면 전인적인 활동에서만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적인 인격이 그것을 흡수해서 차례차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항상 그 사람이 조화 있게 장성하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많이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바에 대해서 확신을 하고 확신한 것이 능력으로 자기 안에서 자기의 전인적인 기능을 다 동원해서 그를 키워 올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러한 결과에 도달하게 되느냐 할 때 첫째는 “그가 그것을 믿고 의지해야 하고”, 둘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편에 서서 볼 때 성령께서 그를 전적으로 주장하셔서 그 안에 열매를 맺게 하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심히 중요합니다.


15. 주님을 의지하고 성령을 좋아 행함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두말할 것이 없이 거기에 내 전체를 내 맡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의지하고 의지할 뿐 아니라 내맡기는 것이 믿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아무리 좋은 말씀이 많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가 믿고 의지해서 자기를 거기에 다 내맡기기 전에는 그 실효가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예를 들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롬10:11) 할 때 여기 믿는다는 말은 “그에게 전부를 내 맡긴다”는 말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1:40) 하는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이 믿는다는 말에는 아무리 많은 도리가 내게 올지라도 거기에 전체를 내맡겨서 그것이 나에게 구현되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죄의 몸은 멸했다(롬6:6) 하는 사실에 대해서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그걸 믿느냐 하면 처음에 그걸 안 가르쳐 주어서 많이 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너의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생명이 너에게 들어가서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적인 새사람이 된다’고 가르치지 않고 그 사람의 공리적인 요구에 따라서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천국 갑니다.’ 하는 식으로 껍데기부터 이야기해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을지라도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으나 교회에 온 다음에는 항상 그것만 붙들고 이야기해서는 그건 형편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은 다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효가 나에게 역력하게 매일의 생활에서 역사 되려면 그 공효가 어떻게 작용되는지를 알아야 하고 알뿐만 아니라 그걸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표가 매일의 생활에서 내가 당면하는 죄악의 문제, 결핍이라는 문제, 부족이라는 문제, 암매라는 문제, 어리석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이와 같이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11) 먼저 그렇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나는 주와 더불어서 죽겠습니다’ 하고 쫓아다니면서 죽겠다고 떠들라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저를 죽이는 체하고 자기를 조금 억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죽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신뢰해라. 먼저 사실을 그렇습니다 하고 신뢰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맨 처음, 기초적인 입문의 요구입니다. 그런 다음에 참된 믿음이 되려면 자기 전체를 거기다 내맡기라는 말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극복해 보려고 그러지 말고 ‘주여 맡깁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걸 이기시옵소서’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문제가 자기 앞에 올지라도 ‘이것쯤이야 내가 넉넉히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잠깐 기다리십시오’ 이런 짓을 하지 말고 다 맡겨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이걸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승리입니다. 그런 까닭에 믿고 안 믿는다는 것은 그런 데서 현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 미미한 문제에서부터 나를 죄에서, 죄의 권세에서, 죄의 흑암에서, 죄의 노예된 데에서 해방해 주셨다는 이 사실이 나에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사람이니까 이 죄악이 왜 나를 지배하느냐고 하면서 자기 마음에 위험이 오든지 자기 마음이 불쾌하든지 불안이 오든지 할 때에 이러한 것을 스스로 억제하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자기가 애를 쓰는 것으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요컨대 ‘주요 전부를 맡깁니다. 제가 스스로 이걸 극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지극히 작은 죄같지만 이 뒤에는 세상이 있고 마귀가 있습니다. 이걸 내가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니 주께서 나를 지배하옵소서’ 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면으로 볼 때에는 성령께서 그를 전부 주장하시는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좇아서 행하라}는 말을 원문대로 보면 “성령으로써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네가 너로써 하지 말아라. 네가 이제부터 행보할 때든지 네가 행동할 때에 성령으로만, 신적으로만 이제부터는 행동해야 한다.’ 그 이야기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가지고 죄를 극복하려고 하면 죄가 극복되는 것같이 생각하지만 현저한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빛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빛이 된다}고 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신 까닭에 무엇보다도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데서 빛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나가서 인도주의적인 선행을 했으니까 빛을 비추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문에 그 사람이 빛이라고 쓸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의 평가가 성경의 평가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무어라고 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드러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우리에게서 어떻게 드러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데서 시작해서 성령께서 온전히 지배하고 성령께서 온전히 주장하시는 사실, 유기적으로 능력 있게 주장하시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유기적인 까닭에 나의 의식의 어떤 부분도 제한하거나 제압하시거나 마치 입신한 사람같이 눌러 버리고 ‘이리 가거라. 저리 가거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기적으로 하시는 동시에 동력적으로 역사 하시는 까닭에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보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고 의지할 때에 성령께서 친히 그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이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도리를 가지고 있을 때에 비로소 참된 빛으로서의 생활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한다든지 선행을 한다는 것보다 먼저 그 사람의 매일 항다반적인 생활에서 빛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16. 빛을 비추는 생활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일생 동안 열다섯 시간씩 근로를 해야만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 도무지 선행을 할 기회도 없고 그리고 밖에 나가서 종교적으로 열렬하게 활동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생활의 바쁜 이유가 빛을 비추는 생활을 제한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바쁘게 산다 하더라도 도저히 빛을 나타내지 못하느냐 하면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가 하루에 열다섯 시간을 자기의 생활터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할지라도 빛은 여전히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빛이 은폐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은폐되는 것은 자기의 생활이 바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육신의 소욕을 가지고, 자기의 이상과 자기의 계획을 가지고 성령의 빛을 가리는 데서 생기는 것이지 그 사람이 하루 열다섯 시간 밥 먹고사는 일 이외에는 다른 걸 할 재주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빛이 못 된다는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빛 노릇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조금 내어서 선행도 하고 도덕적인 행동도 하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열다섯 시간을 일할지라도 빛은 빛입니다. 빛을 은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지 않고 있으면 소금 노릇을 하는 것이고 빛은 은폐하지 않고 있으면 빛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즉 빛 노릇을 하겠다고 딴 짓을 하지 말고 예수께서 주신 것을 그대로 비추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병상에 누워서 다른 사람에게 항상 누를 끼치고 괴로움 가운데 지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종일 병상에 누워서 날마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만 되고 괴롬만 되는데 이게 무슨 빛이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어떤 사람이 정신 착란이 되어서 도저히 그대로 둘 수 없으니까 사람들이 붙들어다가 정신 병원에 집어넣었더니 일생 그 감방에 갇혀 있다가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빛이냐고 할 수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찬송가 가운데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을 알고 계시지요. 그 찬송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이 찬송가는 정신 병원에 딱 가두어 놓았던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사람의 방에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 미쳐서 아주 위험하다고 거기에 쓸어 넣었지만 죽은 후에 보니까 벽에 글을 써 놓았더란 말입니다. 이 사람은 일생 살면서 많은 일을 했다는 사람이 도저히 남기지 못할 기억할 만한 중요한 것을 후세에 남겨주어서 오늘 우리에게 커다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단 한번 빛을 발하였을지라도 명확하게 하나님 나라의 빛을 비추고 갔습니다. 병상에 있는 이 사람이 일생 동안 병석에 누웠을지라도 빛은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적인 생명이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그 도덕적인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그 거룩한 그리스도적인 성격은 하나님이 만세 전에 경영하신 거룩한 계획 가운데서 나타나게 하시는 까닭에 그 계획은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적인 사명이라는 것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항상 중요한 두 가지 문제는 먼저 새로운 생명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적인 품성, 즉 도덕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것”과 둘째로 “그 도덕적 성격의 생활의 계속으로 그리스도적인 사명을 이루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먹고 입고 사는 생활에 있어서도 빛은 빛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 먹는 것 하나 해결하기 위해 애쓸지라도 빛은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먹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그러니까 ‘먹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가르치는 것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려 하라](고전10:31)는 것입니다. 먹는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럼 어떻게 나타나느냐? 나는 먹는 것 하나 때문에 일생을 보내야 하는데 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영광이 나가서 사업을 하는 데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영광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고 전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문제는 생활 가운데서 좌우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 자자영영 노력하면 노력하는 만치 하나님의 영광을 또한 그 속에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그 속에 하나님의 영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이 그를 통해서 나타날 때에는 직장에 있든지 밥벌이를 하고 있든지 좌우간 나타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빛이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나가서 먹고살려고 애를 써도 빛은 빛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는 빛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적인 한 인격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서 장성한 신앙으로 실증하고 나감으로서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장성이라는 것은 굉장한 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장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개인에게 해당한 대로 건실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자꾸 커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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