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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505 추천 수 0 2016.08.14 17: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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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3:3-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3장 3절-13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전은 건물인데 제자들이 그 건물을 자랑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언제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물었다.


5절-6절: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하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다.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안 맞는 것 같다. 동문서답 같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이라고 말씀하신 뜻은 몸을 전으로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게 사람에게 들어가 있다.


제자들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언제 무너지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동문서답 같으나 실은 그 속에 사상적으로 연결이 돼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사람이 신앙심에서 넘어가 버리면 그 때 당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식으로 빠져버리니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 장소마저 없애버리는 것처럼 그런 신앙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이방에게로 다 잡혀가게 되면 성전에서 하는 게 없어진다.


가령 집이 언제 무너지느냐 하면 사람이 잘못되면 그 집은 해체가 되게 된다. 가정이 의사단일이 안 되면 그 집은 해체가 돼버린다. 주님은 꼭 동문서답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이치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언제 무너지겠습니까?’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 ‘건물이 언제 무너지겠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건 지금 교회에 이룰구원으로 주시는 말씀이다. ‘사람이 넘어지면 다 넘어진다. 사람이 망가지면 다 망가진다. 사람이 중요하다’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 어떤 미혹이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즉, 예수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로라. 내가 예수다. 내가 구원이다’” 하며 자기를 내세운다.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하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는 말이다. ‘내가 그로라’ 하는 것은 ‘내가 예수다’ 라는 말인데 이건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자를 꼭 이단자로만 생각을 말고 교회에서 인도자들의 세계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거. ‘내가 제일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을 여러 가지 종교적 제도로, 종교적 사업적으로 나타내는 면에서 ‘내로라’ 하는 것이고, 또 ‘교인이 제일 많다. 건물이 제일 크다’ 하는 ‘내로라’. 오늘날 자기가 구원자처럼 그런 ‘내로라’가 많다.


성경을 내용 면에서 풀어내는 것보다도 어떤 일을 크게 많이 했으면 구세주처럼 들어가는 그게 ‘내로라’다. 입으로 ‘내가 예수다’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어떤 면을 가지고 ‘나에게 와야 산다’ 하는 거.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눈에 보이는 조건을 갖고 와서 자랑하는 것 전부는 사람을 미혹하는 거다.


이 미혹에는 이질적 교훈이 있다. 이질적 교훈은 천국복음이 아닌 세상 땅의 복음이다. 땅의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거. ‘크니까, 많이 모이니까 진짜가 아니냐’ 하는 건 사람이 깨달음에 들어있는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걸 기준을 삼아서 ‘내로라. 제일이다’ 하는 거다.


우리 집 앞에 있는 교회 입구에도 붙여놓은 것 같은데 ‘신천지는 입장금지’라고 써놓은 게 있는데, 신천지가 얼마나 겁이 났으면 교회 입구에 부적처럼 그렇게 붙여놨을까?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우리는 귀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 집에는 귀신은 들어오지 마십시오’ 하면 귀신이 안 들어오느냐? ‘우리 집은 도둑을 안 받습니다’ 하면 도둑이 안 들어오느냐? 말하자면 그런 소리와 똑같다. 왜 그렇게 어리석으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은 겁이 난다는 말이고, 들어오면 못 이긴다는 말이고, 자기는 신천지에 넘어간다는 말이 된다. 그런 의미가 그 안에 다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까 ‘신천지보다 우리는 더 약합니다’ 하는 표현이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봐라’ 해야 강한 건데 ‘들어오지 말라’ 하는 건 신천지가 무서워서 쩔쩔 매는 격이다.


말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그런 걸 붙여놓는다. 실력을 부지런히 키워놓으면 왔다가도 도망을 간다. 성경에 원수가 한 길로 와서 일곱 길로 도망간다고 했다. 이건 와서 다 깨진다는 말이다. 흩어진다 그 말이다.


예수님 앞에 별의 별 이단자들이 다 있다. 당신을 잡아 죽이려는 사람도 있고, 늘 시험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들을 다 이기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실력만 잘 연마해서 있으면 누가 들어와도 문제가 안 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나 잡고 싸워도 이겨야 한다. 그런 자신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분명하게 깨닫고 있어야 한다. 이기는 건 말씀의 이치밖에 없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 들을 때에.’ 그러니까 미혹이 많이 나오니까, 미혹이 되니까 난리가 나는 거다.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끝은 아직 아니라고 하니까 지금 일어나는 시초를 말한다.


8절: ‘난리가 일어나는데, 나라가 나라끼리 민족이 민족끼리 싸운다.’ 성전이 무너지는데 왜 이 말씀을 하시나? 같은 민족끼리, 또 다른 나라끼리 싸운다는 이게 예루살렘의 성전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관계지어서 말하는 것을 보니 이걸 영의 눈으로 안으로 들여다보면 속에서 일어난 것이 확장 확장 확장이 되는 것이 들어있다. 사람의 속에서 일어나는 사상들이 확장이 되어가는 것이 들어있구나.


서로가 틀리면서 안 맞으니까 일어나고, 하나는 진리인데 또 하나는 비진리가 되니까 또 일어나고. 다르니 일어난다. 사람의 속에서 정신의 상태로 그런 장면이 일어나는 것을 봐라. 그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방세상에서 어떤 목표를 두고 단합대회를 잘 하는데 이방 불신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단합이 없다. 즉 단합이 안 되는 거다. 그러면 뭘 놓고 단합을 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걸 가지고 ‘뭘 이루자’ 할 때 단합이 되는 거고, 이뤄진 후에는 헤쳐지고 한다.


진정한 단합은 모든 사람이 주님의 기준에서 진리로 실상화 되는 게 단합이다. 이건 의사단일의 단합이다. 이게 아닌 것은 의사단일이 아니고 단합도 안 되는 거다. 원리상 사상적으로 안 되는 거다. 온 교회가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간다면 그 질 자체가 단합 결합이 되는 거다. 그게 아닌 것은 아무리 ‘뭉치자. 하나가 되자. 교파 초월하자’ 해도 단합이 안 되는 거다.


사회적으로 보면 집 짓는 일을 놓고 ‘야, 우리 단합하자’ 한다. 무슨 단합? ‘집을 빨리 짓고 돈을 많이 벌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끝나면 헤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일을 놓고 그렇게 하는 거다. 그러나 교회는 일을 놓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을 기준 중심하고 너도 나도 모두가 주님처럼 되면 진리지식의 사람이 되고, 신적 도덕성의 사람이 되고, 능력성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주님과 같이 질이 나가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지혜가 생기고 바로 보고 바로 처리하게 된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원망 불평이 없는 거다.


원망 불평은 왜 나오느냐? 무엇이건 현실에 만족이 안 돼서이다. 무슨 일이든지 사람간이라든지 불평불만은 현실에 만족이 안 돼서 나온다 그 말이다.


우리는 일은 조금 그르쳤더라도 바로 하려고 하는 중에 그렇게 됐으면 일은 그르쳤지만 이미 경험적으로 깨달음이 들어간 것이니 속사람이 깨달아지고 자라고 커진 것으로 돼 있으면 그게 만족이다. 이방 불신세상은 일이 안 되면 야단법석이고 미워하고 원수 삼고 하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런 게 아니다. 세상만사 모두는 그 누가 어떻게 하더라도 절대 완전은 없다.


재난의 시작은 먼저 ‘원인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걸 보면 금방 정답은 나온다. 정신세계에서 보는 원인은 똑같으니까 그렇다. 정신세계에서 모든 흐름을 보려면 영의 눈으로 보는 거다. 주님 기준에서 보는 거다. 그런데 세상은 전부가 이성적으로 어떻게 해야 일이 성공되고 안 되고로 들어가 있다. 이건 하나님의 속성과는 관계가 없다.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말세에는 미혹의 영을 받은 자들이 많다. 기독교 안에 함정이 많다. 사회주의 구국주의 구복주의 신비주의 은둔주의 외식주의 등은 다 미혹의 영이다. 미혹은 가르치는 것으로 들어온다. 그러니까 성경을 가지고 비진리요 세상에 속한 것을 예수이름으로 이루라는 게 미혹의 영이다. 미혹의 영은 목사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미혹은 가르치는 교훈으로 들어가 있고, 유혹은 물질로 들어온다.


교회 안에는 유혹 미혹이 다 들어있다. 미혹의 영을 받은 자들이 수없이 많다는 거다. 은사주의 신비주의 보았네 들었네 하는 게 전부 미혹의 영들이다. 교회 안에 미혹의 영을 받은 자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 심각하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이다.


스스로 조심을 하려면 보고 듣고 하는 면에서 영적 실력배양이 돼야 한다. 보고 듣고 하는 면에서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생각하는 거. 식별력이 없으면 안 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라서 식별력이 있어야 한다.


옳은 말씀은 이치라서 이방 불신 세상에도 맞는 거고 교회 안에서도 맞는 거다. 그리고 창세 때로 올라가도 맞는 거고 세상 끝 말세의 사람들에게도 맞는 거다. 맞아야 한다. 틀리면 안 된다. 현재에서 내리는 답이 죽음의 세계를 넘어가서도 맞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예수 믿어 부자 되고’ 하는 건 다 미혹의 영이다. 교회마다 목사님들마다 미혹의 영이 많다.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은 온전하고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기준으로서 하나님의 것을 다 가졌고, 우리에게도 예수님 당신이 기준이고 기본이고 근원이시고 근본이다. 모든 인격과 성품 면에서 능력적인 면에서 지식적인 면에서 도덕성적인 면에서 전부는 주님이 바로 근원이고 기본이고 제일이고 첫째고 먼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당신처럼 온전케 하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를 알아도 어디 하나 모자라는 그런 게 아니라 반듯하게 옳게 영원히 옳음으로 알아야 한다. 이 온전에 관한 속성 혹은 실상 성품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갖고 말하는 게 아니다.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것이 실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가견적이고 현상적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기초하고 나오는가 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다 나온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당신의 의중에 있는 것으로 다 나온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아도 사물의 이치가 관계성적인 면으로 다 물려있다. 인간이 사는 생활 생태도 그렇다. 정말 광범위하고 넓다. 잠:에서 솔로몬이 많이 얘기했다.


하나님의 온전은 모두가 우리 속에서 이뤄가는 건데 이건 가견적이거나 현상적이거나 허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걸 가견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하는 건 신앙이 아니다. 신령천국에까지,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영원히 효력이 있는 실상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실상이다.


사람을 볼 때, 사람을 논할 때 사람의 외모 외형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그걸 보고 사람을 말하는 거다. 눈에 보이고 가견적이고 어떻게 생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속에 든 걸 놓고 그 사람을 말하는 거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세상은 그것은 없고 모르고 볼 줄 모르고 알지도 못하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기 때문에 ‘사람의 키가 어떻니, 모양이 어떻니, 날씬하니’ 그런 걸 본다. 믿는 사람은 그런 것에 기준을 맞추면 안 된다. 그건 이미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 불려간 것이다.


그런데 ‘내 자유다’ 하며 내 마음대로 하는 건 자유라고 하는 걸 모르는 거다. 아무리 내 자유라지만 남을 범죄케 하면 안 된다. 정치세계도 나라의 법 테두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거다. 벗어나면 아무리 자유라도 안 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미혹을 주의하라고 했으니 기독교 안에서 성경을 가지고 가르칠 때 말씀하는 자는 이질이거나 비진리는 안 된다. 아무리 자기 자유로 말한다고 해도 그건 용납이 안 된다. 아무 말이라도 자유로 할 수 있다고 해도 기독교 안에서 함부로 이단소리 할 수 있는 거냐?


세상에서도 자기 나라와 원수가 된 나라를 찬양하는 건 아무리 자유라도 안 되는 거다. 왜? 자기 말하는 것에 대해 사람마다 감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도 은연중에 감염이 돼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까 다른 사람도 자기 말에 감염이 되는 거다. 이치를 벗어나면 안 되는 거다. 아무 말이라도 자유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자기 혼자 산에서 산다면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는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영적 식별력이 있으려면 절대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 절대 정확한 기준은 세상만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처소에서도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그 기준은 움직이지 않아야 하고, 그 기준은 영원히 천국에까지 가야 하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거다. 모든 성품 인격의 기준은 주님밖에 없다. 그것으로 기준을 삼으면 모든 것은 다 분별이 된다. 자기가 그걸 가져야 한다. 그게 자기의 실상이 되는 거다.


내가 이 온전한 참 실상을 가졌다면 오늘날 이 시대의 거짓된 목사들의 설교는 다 분별이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어떤 영들이 활동을 하고 있는지 그 영들의 활동이 다 분별이 된다.


영과 육의 분별도 못하고, 영원히 가는 것과 임시적인 것도 분별도 못하고, 또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도 분별을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거다. 그 자체가 문제가 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자기라면 ‘조심해야지’ 한다고 해서 바로 되는 게 아니다. 행동조심 이전에 갖고 있는 정신 사상이 벌써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뭘 한다고 할 때 뭐가 되고 안 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비뚤어진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뭘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주님의 기준에 반듯하게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뭘 해도 반듯한 게 나온다. 자기가 비뚤어져 있고 넘어져 있다면 아무리 바로 한다고 해도 그건 안 되는 거다.


자기가 옳은 것을 모르면 다른 사람을 바로 못 세운다. 뭘 알아야 조심이고 뭐고 되는 거지 아무 것도 모른다면 조심이고 뭐고 없는 거다. 그저 용감한 것뿐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뭘 해도 자기 죽는 것밖에 없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공회는 어떤 곳이냐? 유대종교 최고의 지도자들의 모임이다. 어떤 자들이 공회에 모이느냐? 모이는 자들은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장로들 원로들 바리새교인들 등등이 모인다. 어떤 때 모이느냐? 유대종교와 국가에 사회상의 문제가 있을 때 모인다. 여기서 재판도 하고 정죄도 하는 권한이 있다.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고, 장로들이 다스리고 앉는 자리의 구별도 있고, 출교제도가 있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말씀강론도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회당 안에서 이적도 행하셨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붙잡아 공회에 넘기느냐? 또 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공회에 넘기느냐?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정확한 정로를 모르면 자기가 곁길로 가면서 정로로 가는 사람을 보고 미혹자라고 하게 된다. 사실은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 면에서 보실 때 그들이 미혹자들이다.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고.’ 공회는 회당보다 규모가 크고 신분이 높은 자들이 많다. 공회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가진다. 무슨 말이냐? 종교적인 지위가 높고, 큰 것을 알아준다는 말이요, 교권과 세권을 가진 자들이 정죄를 하면 백성들이 그만 그것이 옳은 것으로 알고 따른다는 말이다.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임금과 권세자들에게 서게 될 것인데 그런 일을 만날 적마다 그들에게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말이 있다. 왜? 심판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변명을 못하게 하려고.


‘잡혀갈 때마다 성령이 말을 할 것이다.’ ‘너만 늘 평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라. 그러면 네가 잡혀갈 때는 성령이 말할 것이다.’ 평소에 진리생명의 말씀을 목숨보다 귀하게 지켜온 성도에게 하는 말씀이다.


회당에서 매질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바쳐 충성봉사를 안 한다고 강조를 하는 것은 채찍질이란 말이다. 교회가 깨달음이 없이 모여진다면 그 목적이 사역목적이 될 수밖에 없으니 ‘충성봉사 왜 안 하느냐? 충성봉사를 하면 복을 많이 받을 텐데, 부자가 될 텐데’ 하게 되니 이것은 억압이요 강압이고 강권의 말이니 이게 채찍질이라는 것이다.


깨닫게 해주는 것은 권고요 권면이요, 그러나 충성봉사를 안한다고 야단치는 것은 공갈이요 협박이요 채찍이다. 공회에서는 정죄를 하고, 회당에서는 채찍질하고 매질을 하고.


12절-13절: 식구들과 가족들끼리 대립과 마찰과 충돌이다. 아니, ‘성전이 언제 무너집니까’ 했는데 왜 이렇게 사람들끼리 야단법석이냐? 어떻게 한 집안 식구끼리 이런 장면이 벌어질까? 식구들과 가족들끼리 대립과 마찰과 충돌이다. 식구들 안에서도 여당이 있고 야당이 있다. 이게 붙어놓으면 ‘진통당’이 되는 거다.


이게 과연 세상 일반 도덕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일까? 하기야 간간히 일어나기도 한다. 심하지는 않지만 일어나긴 일어난다. 또 기독교를 박해하는 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상 일반적으로 흔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보면 현재에도 얼마든지 집집마다 일어나고 있다.

 

이걸 확실히 알려면 먼저 우리가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구원에 대해서 정확히 알면 이건 그냥 보인다. 그러니 ‘말 한마디 한 마디 하는 게 자기를 지은 인간창조의 목적에서 적중이 아니고 빗나가고 있구나’ 하는 그런 걸 보란 말이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온전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되어 오신 것이고, 33년의 생애와 부활 승천을 보여주었고, 또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이고, 그리고 천국에서 실력대로 그 천국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아닌 불탈 것과 썩어질 세상 것을 가르치면서 그 면으로 인도와 양육을 하는 것은 영적 면에서 영원히 죽이는 결과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살인이다.


세상은 영적 살인을 모른다. 육적 살인만 안다. 교회에서는 영적 살인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일반세상은 영적 살인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인격적 살인을 알아야 하는데 그 면도 잘 모른다. 영적 살인을 아는 사람은 그건 다 알고 들어간다.


영적 살인을 모르면 다 죽이는 셈이 된다. 무슨 말이냐? 창조의 목적관에서 영인성장 면에서 지팡이에 꽃이 피어나듯이 피어나도록 해 주어야 하는데 영적 살인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남을 위해준다고 할지라도 그 면을 막아놓는다. 그 면을 막아놓은 상태로 육적으로 잘 해주면 그건 죽는다.


육은 임시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 같아도 순간이다. 그리고 자기 소원 목적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영적 면을 두고 영인성장 면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역사도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걸 모르고 육적으로만 가르치면 교이들을 다 죽이는 거다. 이건 신앙사상 면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이건 영생과 생명이 아니고 사망과 죽음이다. 모든 이단자들과 거짓 종들의 가르침은 죽이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때 마리아가 나드 향 300데나리온을 예수님께 부을 때 어떤 사람이 ‘저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했는데, 다른 데 보면 그게 가룟유다인데, 이 가룟유다가 그 돈을 훔쳐가려고 한 말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너희들과 항상 같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물질로 돕는 것은 언제 돕든지 수시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작 해봐야 3년 전도하고 부활하실 건데, 계시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전부가 영원히 살리는 일이다. 그 살리는 일을 하시는 분께 나드 30데나리온의 향을 부은 것인데 어떤 사람이 ‘그걸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면 좋다’고 했는데 일반세상으로는 일리 있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물질을 쓰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세상을 구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걸 좋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너희들이 수시로 할 수 있다. 나는 너희들과 영원히 같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여자가 하는 일은 선한 일이다. 그러니 그대로 둬라. 내 장례를 위해 준비를 했다’고 말씀을 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인데 300데나리온이라면 열 달을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여자의 하루하루의 노동시간이나 사는 삶이 전부는 예수님의 만족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향유를 예수님께서 만족하게 받으셨으니까.


‘내 장례를 위해 준비했다’는 말의 의미는 바꿔서 말을 하면 ‘가만 둬라. 그건 선한 일이다’ 하는 뜻이다. 무슨 선한 일이냐? 인간의 말로 표현을 한다면 ‘이 여자는 내가 좋아하는, 내가 원하는 신앙사상을 가지고 살았으니 그런 신앙이라면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지금이라도 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하는 표현과 같다.


부모가 죽을 때 자식이 부모 눈앞에 바로 돼 있다면 ‘내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믿고 쾌히 눈을 감을 수 있겠구나’ 한다. 그런데 병든 자녀가 있다면 그 자식이 비록 어른일지라도 부모가 죽을 때 눈을 못 감고 죽는다.


‘저가 나의 장례를 위해서 준비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성경에 가는 곳에는 그 여자가 한 일을 기념할 것이다.’ 그러니 ‘신앙이라는 게 어떤 성질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라.


모든 이단자들과 거짓 종들의 가르침은 죽이는 일이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으면 영적 면에서 성장이 안 된다. 죽은 것처럼 자라지 않는다.


세상 육적 옛사람 부패성적 이질적 마귀적인 그런 곳에서 예수 믿으라고 인도하고 끌고 가는 것은 온 가족이 서로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온 가정이 교회를 나가도 모든 인격과 성품 면에서, 지혜지식이나 도덕성적인 면에서 활활 피어나는 교회로 나가야지 어떻게 이상한 죽이는 곳으로 나가겠느냐? 이거는 죽이는 거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이런 면에 더 따질 줄 알고 이해타산이 명확하게 나와야 하는데 세상만도 더 못하니 어떻게 가정이 평안하고 사람이 바로 서길 바라겠느냐? 사람이 바로 못 선 채 나이가 들면 이상한 짓이 다 나온다.


사람이 정상적인 생각을 갖도록 서로 도와야 한다. 그러면 가정도 정상적이고 모든 면에서 정상적이 된다. 모든 고통을 이길 수가 있다. 사회적으로 그런 말도 있지 않느냐? 사랑은 죽음도 이긴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온전으로 들어가는 건데 예수 믿으면서 왜 죽이는 일을 할까? 이게 마지막 시대의 현상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남의 교인을 뺏어온다는 말이 아니라 옳은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구덩이에 빠져있는 부모나 형제를 빨리 구해내야 한다. 이건 옳은 거다. 이건 미혹이 아니다. 살리는 생명적인 일이다. 신앙노선은 진리로 적중성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교회에서는 다른 짓을 하면 안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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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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