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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하는 것이 이룬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44 추천 수 0 2016.05.22 15: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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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19-25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1장 19절-25절: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매양 저물매.’ 날마다 해가 지고 저문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아는 거고 우리는 성령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이다. 일반 자연법칙이나 존재들이나 사건들을 들어서 그 속에 영적 이치를 넣어 우리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영적 이치 이게 실상이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없어진다. 자기도 없어질 수 있고, 세상이 없어질 수도 있다. 없어질 그 속에 실상을 넣어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지혜롭게 도덕성적으로 잘 입고 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영능의 실력을 쌓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양 저물매’ 하는 것은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다. 강도들의 소굴은 강도짓을 해서 그 안에서 나누는 게 소굴이다. 그리고 이들이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장사라는 말은 물질 이해타산적으로 들어간 신앙이라 그 말이다. 당시로는 염소도 팔고 양도 팔고 하는 거지만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려는 것은 각자 자기 속에 물질적 이해타산을 가지고 믿는 것을 말한다.


표현을 하자면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잘 믿는 것이냐?’ ‘이렇게 이렇게 충성봉사하고 활동하면 축복 받고 잘 믿는 거다’ 하는 게 장사다. ‘별미축복’ 운운하는 게 장사다. 세상적 물질적 이해타산과 소원 목적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전부는 장사꾼이요, 나쁘게 말하면 강도들이다.


교인들에게 그런 정신을 집어넣어주니 교인들은 부자 되고 축복 받으려고 물질적 개념으로 막 나가게 된다. 이러면 교인들의 노력봉사는 사는 쪽이 아닌 사망계 쪽으로 흐르게 되니 이렇게 되면 살아나는 게 없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입어지는 게 없이 전부는 사망성이요 세상성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인데,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해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는 구원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시는 주님을 자꾸 죽이려고 하고 있다. 구원이신 예수라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성도들이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죽인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죽인다는 의미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세계 각국에서 외치는 목사님들의, 종들의, 도를 가르치는 분들의 말을 분석해야 한다. 이건 교만이 아니다. 말씀의 이치를 가지고 ‘옳은가, 그른가? 영의 말씀인가, 육의 말씀인가? 임시성의 말씀인가, 영원히 가는 건가? 살리는 건가, 죽이는 건가? 세상생각을 넣어주는 것인가, 천국생각을 넣어주는 것인가?’를 분석해야 한다.


육적 세상적 임시적인 것을 가르치는 사상 정신 그 흐름의 날은 점점 어두워진다. 그런 교훈을 받으면 그 사람은 이치가 밝아져서 올라오는 게 아니라 매양 점점 자꾸 어두워진다.


어두워질 때는 성 밖으로 탈출을 해야 한다. 본문에 보니 매양 저물매 저희가 예수님을 따라서 성 밖으로 나간다. 어두워질 때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따라서 나가야 한다. 어두워지는 그 정신 사상에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서 탈출을 하라. 물질 축복주의, 구복주의, 사회주의 등 거기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 교회가 물질축복 중심으로 돌아가고 물질 만능주의로 돌아가는 건 세상주의요 인본주의다. 교회에서 왜 인본주의를 쓰는 거냐? 물질욕심 때문이다.


인본주의로 세상주의로 물질축복 중심주의로 돌아가면 거기는 사람을 죽이는 곳이다. 사람을 죽이는 게 연장을 가지고, 총칼을 가지고 죽이는 것만을 생각하지 말아라. 공부 잘하는 아이를 공부 못하는 아이가 날마다 들판으로 데리고 다니면 그 아이는 아는 면에서 죽이는 거다. 나쁜 정신을 넣어주면 그 사람을 죽이는 거다.


자자기 자기 스스로를 죽이기도 하고 영리하게도 만들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빛 된 자녀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젊었을 때 많이 아는 게 좋다. 늙으면 자기 집도 못 찾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하나님의 살리는 말씀을, 정신이 늙지 않는 말씀을 잔뜩 채워 놔라. 세상주의, 인본주의, 물질축복 중심주의, 이룰구원의 이치가 아닌 곳에는 사람이 점점 어두워진다. 고쳐지지 못하고 깨달음도 없다.


성경을 창:부터 계:까지 암송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육의 사람이 될까, 영의 사람이 될까? 암송을 하려면 가만히 있으면 암송이 되느냐? 암송을 하려면 얼마나 힘을 써야 되겠느냐? 이러면 사람이 못쓰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는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할 테지만 그러나 사람이 하나도 안 만들어졌다. 왜 그러냐?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은 성경 속의 알맹이 뜻을 맛을 봐야 내 모습도 보이고 다른 사람 모습도 보이게 돼서 자기를 고치고 만들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0절-25절: 20절로 보면 무화과나무를 언제 저주했느냐? 어제 했느냐, 그제 했느냐 한 십 년 전에 했느냐? 12절-14절을 보면 어제 저주를 했다. 베드로가 아침에 어제 저주 받은 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주님이 저주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라고 했다.


그러면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를 해놓고 밤새도록 ‘그 나무가 말라야 할 텐데. 진짜 말랐을까?’ 그랬을까? 그 나무를 만드신 이가 주님이시요, 저주하신 이도 바로 그 분이시다. 주님이 저주를 해서 죽었는데 우리가 가서 물을 주면 살아날까?


세상이 생긴 이후로 그 어떤 인간도 그런 능력을 가진 자는 없다. 주님의 저주는 무서운 거다.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없는 가운데서 만들기도 하시고, 있는 것도 순간적으로 없애기도 하신다. 이걸 요술처럼 생각지 말아라.


주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방편이야 부정모혈로 어머니 태에서 태어난 거지만 그건 나를 만드신 매개물이다. 없는 가운데서 어떻게 태어났느냐? 늘 말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머리로 다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다만 있는 것만 가지고 ‘이치가 이렇구나. 과학의 법칙이 이렇구나’ 하고 알 뿐이지 그 법칙을 왜 만들어 놨는지 그건 알 길이 없다. 성경으로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깨닫게 해 주려고 하늘의 별들도 산의 나무도 만들어 놨다. 그래서 세상 모든 물질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깨닫게 해 주려고 신앙의 법칙대로 들어가 있다. 고로 이걸 거스르면 안 된다. 거스르면 손해고 고통이고 죽는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구했는데 열매가 없으니 이 무화과나무가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열매를 맺을 줄은 모르고 잎사귀만 무성하니 사람을 속인 그 나무는 저주를 받았다. 물론 주님이야 다 아신다. 이 무화과나무를 그 분이 만들었고, 그 분이 저주를 하니 무화과나무가 말랐다. 그런데 이렇게 하심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열매가 없는데 왜 사람을 속이느냐? 왜 ‘체’ 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 있는 체, 아는 체 하느냐? 열매도 없으면서 멀리서 보니까 잎이 무성해서 열매가 많은 것처럼 하고 있으니 저주가 들어간 것이다.


규모가 작은 교회는 성령님이 역사를 안 하고, 규모가 큰 교회는 성령님이 크게 역사하느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안 믿는 사람들처럼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본다. 그런데 속지 말라고 이걸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로는 백성들을 가르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율법주의자들에게 하는 말씀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성령의 열매가 없는 기독교, 성령의 열매가 없는 각 교회, 성령의 열매가 없는 각 가정, 성령의 열매가 없는 각 교인을 말씀하심이다. 열매가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온전의 성품을 한 이치라도 아는 사람으로 되라는 말씀이다.


많이 알면 어디를 가던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품행도 아름답고 말도 지혜롭고 이러면 주님께 덕이 된다. 영광이 된다. 열매가 없으면 그 맛이 안 나온다.


복숭아가 막 익을 때 비가 오고 나면 그 빗물을 먹고 나온 복숭아는 보기는 크게 보이고 탐스럽게 보이고 맛있게 보인다. 보기가 좋으니 비싸게 판다. 장사한테 물으면 맛있다고 하며 판다. 그러나 그걸 사서 먹으면 싱겁다. 맛이 없으면 먹는 사람이 주인을 생각을 하게 되느냐, 안 하게 되느냐? 맛이 없으면 아무리 커도 비싸게나 팔지를 말지. 성령의 열매가 없는 기독교인, 가정, 교회.


뿌리까지 말랐다는 것은 근원부터가 저주라는 것이다. 네가 가지고 있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근원부터가 저주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잘못된 근원을 가지고 이상한 바닥을 깔고 이 말씀을 들으면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의 이성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무슨 행동을 잘 해라. 뭘 어찌하면 복을 받는다. 물질을 어떻게 바쳐라’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난다고 했으니 마음부터 하나님 앞에 바로 만들어 놔야 한다. 마음이 비뚤어지면 어디 가서 사람구실을 하겠으며, 사회에 그런 사람이 필요 하겠느냐?


자기의 신앙에 열매가 없으면 그 자기에게서 나오는 사고방식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근원부터 저주다. 진리생명의 이치가 그에게는 밤이 된다. 왜? 매양 어두우니까. 밤이 된 신앙에서는, 깨닫지 못한 신앙에서는 그의 미래가 보이지를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걸 깨달으라고 본문에 아침에 일찍이 주님과 함께 나가서 밝은 눈으로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을 보게 하신 것이다.


근원을 모르는 지식은 어둡다. 안 보인다. 주님이 저주해 버린다. 그 사람의 일생이 저주받는 생애가 될 수 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게 날마다 아프고 하는 것마다 하나도 안 되고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하고 깨닫는 사고가 전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맨 세상 쪽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안 믿는 사람과 똑같다. 이룰구원의 지식은 허황된 지식이 아니다.


저주 받은 이 나무를, 그 사고방식의 지식을, 신앙도 아닌 하나의 종교적 지식을 자기 마음이라고 하는 정원에 심으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못 살아난다. 누구든지 물질 이해타산으로 계속 믿으면 그의 신앙은 뿌리부터 마른 것이다.


그러면 저주를 했기 때문에 마른 것이냐, 아니면 저주를 받기 전에 이미 마를 수밖에 없게 되어있는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저주를 해서 마르게 해서 육신의 눈으로 보이게 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냐? 후자다. 저주받은 사상은 가지고 있어봐야 마른 사상이라고 하는 것을 저주를 해서 마르게 해서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게 영의 눈이다. 우리에게 그걸 이미 보여주셨으니 우리는 ‘저주를 받는 것은 어떤 정신으로 사는 자가 받는구나’ 하고 알아야 한다.


저주 된 자는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성령의 열매는 없다. 이런 자는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속에서 움직이지를 않는다. 항상 자기 속에서 안 믿는 사람처럼 물질 이해타산으로 자꾸 계산을 한다. 이런 상태로 잘 먹고 잘 살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영적 진리사상적 인격적 성품의 열매는 없다. 예수는 오래 믿었어도 성격 성질 하나 못 고치고, 가는 곳곳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그 어디 되겠느냐?


21절-23절에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라고 하셨다. 주님의 말씀은 믿어야 한다. 왜 믿어야 하느냐? 자기 마음과 생각에 안 맞아도 믿어야 하는 거냐?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긍정이던 부정이던 그대로 이뤄진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절대다. 빈틈이 없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그 분이 출생의 목적과 재세기간의 존재목적을 알게 해 주셨고, 우리를 말씀을 가지고 보호 감찰하시고, 성령 하나님의 신으로 우리를 감동 감화시키시고,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하나님처럼 속성이 되게 하고자 하신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그 동안에 무엇을 하고 갈 것이냐? 그리고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서 자기를 지배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짐승은 이런 걸 생각을 못한다. 무엇이 내 속에 있어서 내 영양가를 다 빨아먹느냐? 내 속에 신앙이라고 하는 그 신앙이 나를 지배하면서 내 노력과 마음과 소원과 목적을 다 빼먹고 사망계로 나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인간 속에 뽕나무뿌리처럼 지독하게 안 뽑히는 게 있느냐? 자신 속에 산처럼 떡 버티고 있는 게 있느냐? 영의 눈으로 그 세계를 잘 봐야 한다. 이게 다 천국의 철학이다.


23절: ‘누구든지.’ 이 말은 믿는 사람보고 말씀하는 것이냐, 이방인보고 하는 말씀이냐? 믿는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룬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누구든지’ 하는 건 믿는 사람을 말하는 거다. 안 믿는 사람이 산을 보고 ‘바다에 던지우라’ 하겠느냐? 저 높은 산은 불도저로 밀면 바다로 들어간다. 물질의 것 전부는 사람의 머리로 웬만하면 다 한다. 그런데 기계로도 안 되는 게 있다. 제일 안 고쳐지고 안 되는 게 어디 있느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다.


왜 자기 마음인데 자기 마음대로 안 될까? 살다보면 제 생각으로 했는데 제 마음대로 안 돼서 고민하는 게 있다. 왜 자기 마음인데 자기 마음대로 안 될까? 고민하는 건 뭐며,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하는 그건 누구냐? 누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무를 뽑듯이 뽑혀나가도록 하겠느냐?


천지창조 때 ‘물과 뭍이 나뉘어라’ 하고 말씀하실 때 산이 생겼다. 과학자들은 화산이 터져서 산이 됐다고 하겠지만 어찌됐던 하나님의 방편은 그런 방편을 써서 육지가 솟아나고 바다가 생기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폭발을 하고 산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전부는 살아계신 생명과 능력의 말씀 그대로 이뤄졌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는 이 세상 전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저주 받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도 그 능력의 말씀대로 된 것이다. 귀신이 나가고 병자가 고쳐진 것도, 바다 위로 걸으신 것도, 풍랑을 잔잔케 하심도 창조 때의 그 말씀 그 능력이다. 질이 같다. 큰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넣는 것도 바로 그 분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살아있고, 그 분의 말씀은 헛되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잎만 무성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요란만 떠는 당시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교인들이 주님으로부터 외식자들이라고 저주를 받았다. 이들은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서 교권과 세권으로 뭉쳐지고 세도를 부리며 신처럼 버티고 있는 교만자들이다. 산 숲속에는 사람을 해치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듯이 그들의 가르침 전부는 예수님의 의사성과는 대적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훼방하고 예수님을 헐뜯고 죽이려고 기회만 보고 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룬 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은 부정이던 긍정이던 자기에게 이루시는 말씀이다. 헛된 게 없다. 무(無)로 돌아가는 게 없다. 이게 지금 자기에게 해당되고 있는 거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하는 건 주님의 약속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의심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자기 육에 속한 것을 구하니까 의심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구하느냐,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느냐? 할 수 없는 걸 구한다. 그리고 영에 속한 거냐, 육에 속한 거냐? 육에 속한 것은 자기가 노력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있으나 영에 속한 것은 자기 힘으로, 자기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성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육에 속한 것, 물질에 속한 것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다 만들어 놨다. 그러니 인간이 지혜 것 노력 것 움직이는 것만큼 갖도록 돼 있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지를 못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것을 주시려고 인간 되어 오셨다.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것을 받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그대로 된다. 왜? 주님이 이루실 일이니까. 그러면 주님이 이루실 일은 영에 속한 것이냐, 육에 속한 것이냐? 영에 속한 것이다. 그러면 자기에게 영에 속한 것이 무엇이냐? 돈이냐, 밥이냐, 집이냐? 내 속에 이루시는 대로 나는 순종만 하면 교만도 빠지고 성령의 열매도 맺히고 하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이게 안 믿어진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라고 말씀하신 이 분은 차원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인데, 이런 분이 ‘무엇이든지’ 라고 말씀하심은 천국에 속한 차원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지, 땅에 속한 불타고 썩을 것을 아무 거나 구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니 얼마나 존귀 영광자시냐? 이런 분이 말씀하신 것을 ‘땅의 것을 아무 거나 구해봐라’ 그런 식으로 알아듣느냐?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어린 아기가 벌벌 기어 다니며 방바닥에 있는 거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자기 입에 집어넣듯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하신 말씀을 왜 물질에 관한 것으로 생각을 할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너희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걸 구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했는데 왜 이방인들이 구하는 걸 구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옳은 지혜지식, 하나님의 옳은 도덕성, 하나님의 옳은 능력성을 구하라. 그러면 거기에서 말씀으로 인한 모든 지혜가 나가고, 활동도 나가고, 덕을 끼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하신다.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하신다’고 하니까 돈을 생각하느냐? 열매가 없고 교만한 사람은 아무 거나 땅에 속한 썩고 불타질 것을 구한다.


사람이 무엇을 구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귀 영광성이 정해진다. 어린아이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 나이를 먹어도 치매가 있으면 역시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 학박사인데도 먹을 것을 달라고 한다면 배운 가치가 뭐며, 나이 먹은 가치가 뭐냐? 사람의 존재가치가 어디서 나오는 거냐?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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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2 요한복음 성전 청결 요2:12-25  강종수 목사  2018-04-22 209
15011 마태복음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마25:14-23  김경형 목사  2018-04-22 291
15010 요한복음 선한 목자와 양 요10:11-18  강승호 목사  2018-04-19 593
15009 시편 응답하소서 시4:1-8  강승호 목사  2018-04-17 475
15008 마태복음 천국은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마25:1-13  김경형 목사  2018-04-15 461
15007 요한복음 물로 된 포도주 요2:1-11  강종수 목사  2018-04-15 441
15006 신명기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라 신26:1-3  이한규 목사  2018-04-12 824
15005 이사야 참된 음성을 분별하라 사42:18-22  이한규 목사  2018-04-12 516
15004 요한복음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랑 요1:14  이한규 목사  2018-04-12 672
15003 이사야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알라 사36:4-10  이한규 목사  2018-04-12 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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