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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명(解明)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64 추천 수 0 2019.05.05 08:4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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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4: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8.9.10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해명(解明)이 필요합니다.

4:12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412절 본문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구원의 배타성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전거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는 베드로의 이 말은 그리스도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는 구원이 없으며,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과 동일시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물음이 제기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죽었던 사람들, 지금도 예수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착하고 선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구원의 대상이 아닌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구절은 해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서 안에는 진리에 대한 배타성과 다원성이 서로 모순적으로 각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라함이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상수리나무 옆에 제단을 쌓으면서 타종교와 공생의 길을 간 전통이 있는가 하면(12,6-7),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간 사이에 금송아지로 우상을 섬긴 일이 발생하죠. 주께서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는 일이 발생합니다(32). 즉 가나안이라는 종교다원주의적 상황에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는 모습이 성서에는 있고, 반면 그런 경향을 반대하는 전통이 성서에는 또한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구한말에 척화파와 개화파가 있었듯이, 성경이 쓰여 질 당시에도 이방의 종교를 포용하느냐 배척하느냐를 두고 성경 저자들 사이에 입장이 달랐다는 것으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 우주의 주님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인간세계만이 아니라,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모든 것의 신이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4,6). 이렇듯 신은 우주적 하느님으로 그려지다가도 동시에 하느님은 땅 위의 많은 백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당파적인 하나님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7,6). 이방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의 시체를 너희가 섬기는 그 우상들의 시체 위에다 쌓아놓을 것이다. 나는 도저히 너희를 불쌍히 여길 수 없다”(26,30)고 말씀하시는 무서운 하느님은 다른 한 편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라고(3:17) 말하는 그런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한 증언,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4,12)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성령강림사건 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해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임했고, 사도들의 말을 듣고 수 천 명이 예수를 믿는 일이 발생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에 격분한 제사장들과 성전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는 일이 발생했고 다음 날 제자들을 향한 문책이 이어집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이런 일은 구체적으로백성을 가르치는 것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는 일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언비어 유포, 집시법, 사기 등등의 죄목으로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가 말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 여러분,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4:9-10).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4.11-12)

 

베드로가 이 말을 한 후에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놀랐다고 적혀있습니다(4:13). 왜 놀란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았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을까요. 나사렛 예수가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것 때문에 놀랐을까요. 하루 밤새 수 천 명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에 놀랐을까요? 모두 아닙니다. 그들이 놀랐던 이유는 베드로와 요한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4.13)라고 적혀있습니다.

 

당시에 예수와 같았던 사람들, 세례 요한과 같았던 사람들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처럼 귀신들린 사람을 쫒아내는 사람들 많았고, 예수처럼 병든 사람 고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가히 기적이 난무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적을 일으키고 무슨 요술을 부르는 것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근거로, 즉 어떤 이름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행하느냐 입니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들을 가두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는 누구입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율법을 하찮게 여기면서 신성모독을 일삼았던 죄인입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도 능란한 언변과 기적을 행하면서 민심을 얻고 있는 예수가 골치 아픈 존재였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는 유대 지도자과 로마제국 앞잡이들의 음모, 조직되고 동원된 대중들의 광기어린 선택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렇게 제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과 베드로가 병자들을 치유하고,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더니 수 천 명씩 예수의 메시지에 동의를 하고 있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제는 죽어 사라진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 자신들과 당당하게 맞 짱을 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척 그들에게는 경악스러웠던 것이죠. 이것이 지금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라는 발언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2천년이 지난 후에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구절에서 다른 종교의 구원의 유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그런 의도도 없습니다. 내가 믿는 신, 내가 믿는 신을 향한 구도의 길을 따라가기도 힘겨운 마당에 다른 종교의 구원을 논할 오지랖을 펼칠 정도의 한가함과 여유가 제자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특별히 종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모두 인간의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다만 그 방식과 내용이 다를 뿐이지요. 이웃 종교의 구원논의를 적대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들이 역사적 교회 안에서는 있어왔고, 그 역사는 광기와 폭력의 역사였습니다. 한국 개신교도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예수 밖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이나, 그리스도교만이 갖는 구원의 배타적 독권을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부와 권력에 기대어 살아갔던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선동에 넘어가 동원된 대중에게 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구원은 율법에 대한 기계적이고 엄격한 준수에 의해 얻어지거나, 아니면 현실의 권력을 쥐고 있는 로마황제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처형은 유대율법과 로마제국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던 세력들과 예수와 단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민중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환호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십자가 처형으로부터 도망가거나 회피했던 추종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자신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모든 억압되었던 것은 귀환하기 마련입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울부짖고 있었을 때 내가 뭘 하고 있었던 거지이것이 바로 그들이 던졌던 기억의 내용입니다. 어쩌면 성령강림 사건은 억압된 트라우마를 지우고 현실로 귀환하게 하여 다시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들은 변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예수의 추종자자들은 다양한 민중적 메시아 운동들 통하여, 유대-로마 전쟁에서, 회당시스템에서 축출당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지난 시절 예수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굴욕적인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을 휘감는 고통을 속에서도 예수의 고통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 순간을 견디며 예수를 전승하였습니다. 예수를 기억하면서 현실에서 자신들에게 닥치는 불의와 고난에 맞섭니다. 이런 예수 전승의 활성화가 결국 지금 이곳에서의 저항과 이곳에서의 부활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 아닐까.

 

그렇게 예수의 이야기는 주변의 제자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순환되고 전승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제자들이 지금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하늘 아래에서 구원을 약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많습니까. 춘천만 하더라도, 중도에 레고랜드라는 놀이동산을 만들면 금방이라도 춘천의 경제적 형편이 나아져서 잘 살 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춘천 서울 고속도로만 생기면, 아파트를 몇 채 더 지으면 얼마나 발전 하겠느냐고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권력과 자본이라고 단순화 시켜 말 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실로 신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고 실제로 그 힘으로 누군가는 구원을 이루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함으로써, 권력과 자본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4:12). 이 말은 그 누구도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어떤 무엇인가로 지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자본으로 지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하늘 아래 있는 세상을 돈과 권력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고백은 자본과 권력만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향한 대항담론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공격성,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이웃 종교인들에 대한 저주의 언어가 절대 아닙니다.

 

이 말은 또한 제도와 법을 가지고 세상을 가르는 사람들, 그 기준으로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의 말이기도 합니다. 국경을 경계로 자국민과 난민을 가르고, 21세기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계약직과 정규직을 가르고, 창조의 섭리란 이름으로 남자와 여자를 가르고, 흑인과 백인을 나누면서, 그러한 차이를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고, 다름을 배제의 매카니즘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향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름 아래서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다.”(4:28)고 선언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제자들의 발언은 세상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이름과 논리에 대한 저항이고 반대이지, 이웃 종교에 대한 배타적 독선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제나 차별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세가들을 향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 하라는 경고의 구절이고, 민중들에게는 세상에 쫄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는 격려의 구절이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어 지금까지 전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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