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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644 추천 수 0 2016.04.11 09:2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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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23-31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0장 23절-31절: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자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에 놀랐을까? 이건 인간 상상 외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알고 있기로는 유대 종교인들은 부자이면서도 천국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또한 유대관원들 중에도 부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친척 중에도 부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아니라 구약에 보면 자신들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부자였다. 그러니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부자 되기를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걸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때 가룟유다의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을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렵다고 하느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안 된다’가 아니라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비고 들어가면 들어갈 수가 있다는 건가? 약은 수를 쓰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천국의 문지기가 ‘당신 부자가 아니냐’ 하면 ‘아, 내가 얼마나 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해서 입장료를 지불하면 들어갈 수 있다는 거냐?


26-27절: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실 일이 있느냐?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고, 우주 천체의 법칙과 만물의 생태계 법칙을 정하기도 하시고, 당신 스스로 이적기사를 일으키려면 자연법칙을 거스려서 일으키기도 하시고, 신령계에 속한 것이 아닌 물질계에 속한 것도 안 보이게 만든 것도 있다. 그러니 땅위의 모든 것을 만드는 게 뭐가 어렵겠느냐?


하나님께서 우주의 천체를 만들어서 실이 없이 공중에 매달아 놓는 게 힘이 들까, 인간 자기 하나를 주님의 온전의 성품으로 만드시는 그 면이 더 힘들까? 나 하나 만들기가 더 힘들다. 왜 그렇게 힘이 들까? 뭐가 들어서냐? 인간을 당신을 닮을 수 있는 인격자로 만드셨는데 인격자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인격과 자유성으로 인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 열심 것 성품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게 만드셨고, 힘을 쓰는 것만큼 여기에서 하나님을 닮은 양에 격차가 나는 것이다. 노력한 만큼 격차가 나는 게 하나님의 공의성이다. 하나님을 닮는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다 똑같이 만들면 안 된다.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두뇌의 세포조직을 만드는 것과, 그 두뇌로 오각과 오감성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과 어느 것을 만드는 게 더 어렵겠느냐? 풀 한 포기도 생명이 있는 건데 그 생명은 눈에 안 보인다. 우리 인간은 피를 다 쏟으면 죽는다. 그래서 피는 생명이라고 했다. 피는 생명의 상징이다.


이성 또는 마음은 사람의 눈에 안 보이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없다. 활동으로만 그 존재성을 나타내 보여줄 수 있다. 그러니 육신을 만드는 것보다 이성 또는 마음을 만들기가 얼마나 더 힘이 들겠느냐? 그러나 실은 전능자이신 하나님에게는 둘 다 힘이 안 든다.


경수가 마른 할머니에게 아기가 생기게 하는 게 더 어려울까, 처녀에게 남자가 없이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케 하는 게 더 어려울까?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못하시랴!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격적으로 믿고 들어가는 거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를 못하니 자꾸 인간의 생각으로 자기 일생의 수를 놓는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하실까마는 인간 편에서 생각을 할 때 못하시는 것이 있어야 만이 하나님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게 되면 하나님이 안 된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못하신다. 또 하나님 당신 자신이 죽을 수가 없다. 하나님 당신이 죽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인간 자기 자신도, 물질세상도 다 없어진다. 또 우리의 자유의지를 나뭇가지 꺾듯이 꺾지를 못하신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당신이 강권적으로 꺾으면 이룰구원이 안 되고, 교훈도 깨달음도 시련 연단도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 당신에게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에는 불가능이 없다. 불가능이 없으시다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하실 것을 미래적으로 훤히 다 아신다는 말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안 된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 당신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가르쳐 줘도 인간이 생각하는 자유의지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땅에서 생산된 지식으로는 불가능이고 오직 믿음의 세계에서만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거는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개념으로 말씀하심이다.


하나님 당신이 모든 것을 생각하시는데 당신 스스로가 ‘이거는 영적 생각이고, 이거는 육적 생각이고’ 그런 거냐? 예수 믿는 사람은 ‘이건 하나님의 뜻이고, 이건 세상 뜻이지’ 하고 이 쪽 저쪽을 선택을 하고 행할 수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이건 육의 생각이다. 이건 영의 생각이다’ 하는 게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생각은 인간 보기에는 육의 생각처럼 보일지라도 그게 육의 생각이 아니다. 인간이 볼 때는 하나님께서 꼭 인간생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절대 정확한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영의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생각을 가지고 만물을 다 지었다. 영의 생각 영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육신도 지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 속에서 육의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 자기 삶의 노정을 정확하게 하나님 쪽으로 놓고 그 다음 것은 옆으로 놓고 살아야 한다. 인간 것은 그 어떤 것도 부활 때 다 꺾이고 쳐지는 거다.


제재소에 가면 큰 톱이 돌아가는데 그 옆에 얇고 두껍고 한 걸 재는 자가 붙어있는데 나무를 그 자에 대고서 톱으로 밀어버리면 그 척도 안에 든 것은 다 통과이고 그 밖의 것은 다 나가 떨어져 버린다. 그런 것처럼 부활 때 이질적인 것은 다 잘린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


자기 일생에 있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척도가 아닌 잘릴 것으로 정신 사상이 많이 되어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선악과 따먹은 비진리적 주격적 사상을 가지고 살면 평생 고통을 면할 길은 없다. 항상 ‘뭘 먹고 어떻게 사나’ 날마다 그 생각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아무렴 믿지 않는 자들보다 사람 됨됨이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영특하니까 말하자면 어느 회사나 어느 공장에서건 어느 곳에서건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도둑놈의 세상일수록 도둑질을 더 잘하는 사람을 원하느냐, 정직한 사람을 원하느냐? 도둑놈을 원한다. 캄캄한 세상일수록 더 캄캄한 것을 원하느냐, ‘누가 빛을 들고 있나’ 하고 빛을 찾기를 원하느냐? 빛을 찾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수 있다 함은 하나님은 불가능은 없으신 분임을 전제로 하고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면 불가능이 가능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부자는 영생을 얻으러 왔지만 물질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부자 자기는 영생을 원했는데 자기가 부자를 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냐, 자기 속에서 부자를 내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느냐?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말하기를 부자가 영생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물질이 부자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한 것으로 말을 한다.


물질이 사람을 잡고 있느냐, 자기가 물질을 잡고 있느냐? 자기가 물질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물질은 인격이 없다. 인간 자기는 인격이 있다. 물질을 잡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게 인간 자기다. 성경에 보면 ‘부자 되기를 힘쓰지 말라’고 했다. 부자가 되고자 애를 쓰면 다 부자가 되느냐, 죽을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는 것이냐?


예수 믿는 자가 게으르게 살면 안 된다. 왜 그러냐? 삶속에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자타의 구원의 일을 하면서 사람이 만들어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자기의 집이 만들어져야 하고, 장롱이 만들어져야 한다. 세상은 그래야 한다. 우리는 그런 걸 만들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건 전부가 매개물이니 만들되 정확하게 만들고 튼튼하게 만들고. 이게 믿음의 사람의 양심이다. 그러다 보면 ‘당신 회사 물건이 참 좋습니다. 진짜입니다’ 하게 되고, 한 이치도 틀리지 않게 만들어 주니까 외국에서도 ‘우리에게 물품을 보내주세요’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부자는 글자적 문자적으로는 계명을 잘 지켰는지 모르지만 영생은 문자적으로 지키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영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이 됐더라면 위로부터 영생이 주어졌을 텐데, 그리고 영생뿐 아니라 천국의 보화도 얻었을 텐데 참 답답하다.


이치를 알지 못하고 믿는 사람을 보면 참 답답하다. 가시 채가 자꾸 자기 밭길로 들어가는데 자기 입장에서 그 가시를 치우려고만 하고 있으니 그게 되느냐? 오는 사건마다 오는 존재마다 부딪히고 대립을 일으키고 충돌 마찰을 일으키는데 그게 되겠느냐 그 말이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미련하고 지혜롭지 못한 성격 성질을 먼저 고쳐야 할 것이 아니냐?


예수님을 떠나간 부자가 그 재물을 가지고 기쁘게 영생처럼 살았을까, 예수님을 만난 후로부터 날마다 근심 속에 살았을까? 근심 속에 살았을 것이다. 참 어리석다.


28절-31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라고 말을 하니까 주님께서 이 말씀을 했다. 어느 쪽이 더 이익이냐?


그렇다면 이 말씀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것이 구원목적에서 원칙이라는 말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버려야 참 옳은 종교라는 말인지? 아니면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인지? 아니면 부모도 직업도 물질도, 자기 생명도, 자기 세상의 부요성도, 자기 세상의 누림성도 모두 버렸다는 말인지? 아니면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처럼 모든 것을 버렸다는 말인지? 오늘날로 말하면 물질선 인정선 생명선 모두를 버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약속 땅으로 간 아브라함과 같다는 것인지?


‘나와 및 복음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백배나 받되.’ 그러면 자기가 버린 것보다 백배나 더 받고 싶으냐? 이치도 모르고 이해타산 평가성도 모르는 그 부모를 버리고 이해타산 평가성이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는 부모를 받고 싶으냐? 이걸 물질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욥기도 비유적 사건인데, 욥이 배나 더 축복을 받았다. 잘한 거냐, 못한 거냐? 잘한 거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를 욥의 자리에 갖다놓고 자기가 그냥 현재 받은 걸로 만족하며 살고 싶은지, 아니면 두 배나 더 받고 싶은지? 여기서 두 배라는 게 육덩이 욕심을 말하는 거냐? 욥에게 두 배만이 아니라 일곱 배라도 더 죽고 싶은 하나님의 마음이 거기서 보이느냐? 오늘날 자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의 소원 목적을 놓지를 못하고 있다. 놓는다고 해서 달아나는 게 아닌데 자기 속에서 그 야단을 치고 있다. 의부증이나 의처증은 자기 속에서 되는 거다. 이러면 사람을 달달 볶는다. 그러면 상대가 도망을 가게 된다. 자기 속에서 그 모양이다. 큰 시험이다.


‘금세에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걸 생각해 보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그러니까 그런 걸 가지고 있어도 소원 목적적으로 자기의 세상에서의 미래의 꿈이나 행복을 버린 자는 누구에게 핍박을 받을까? 자기를 알지 못하는 멀리 있는 자겠느냐, 부모형제 아비 자식이 되겠느냐? 누가 핍박을 주는 거냐? 남이 아니다. 멀리 있는 자가 아니다. 기독교의 핍박자는 남이 아니라 제일 가까이 있는 자다. 가까이 있는 자가, 나를 잘 아는 자가 팔아먹고 핍박을 주고 결탁을 한다.


이 말씀이 일반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방 종교인들이 이해가 되는 말이냐? ‘세상축복’ 운운하는 목사들이 이 말씀이 이해가 되는 말이냐? 이 말이 어떤 특정한 종교인이 되려면 현실을 떠나서 산중이나 다른 데 처박혀서 살아야 된다는 말이냐?


본문을 보면 ‘복음을 위하여 버린 자’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보다 복음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하신 말씀 아니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복음이었고, 우주만물의 창조목적이 복음이었고,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종말이 복음이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위해 사는 그 사람의 기준 척도 그 지혜지식이 하나님 앞에 정확한 거냐, 아니면 그걸 내버리고 세상 부요 쪽으로 자꾸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에 정확한 삶이냐? 그걸 봐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청교도가 미국에 들어가서 먼저 길을 내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나중에 집을 짓고 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길도 없는데 집부터 먼저 지어놓고 그 다음에 싸우고 난리다. 지금은 아파트를 세우려면 먼저 부지를 평지로 닦아놓고 집을 세운다. 이게 원칙이다. 우리의 신앙에도 원칙이 있는 거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인간을 출생시켜 존재케 한 목적이 복음이다. 그런데 인간의 출생목적 재세기간의 목적을 알지 못하던 이방종교를 가지고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놓는다. 성경을 놓고 볼 때 이건 사람을 죽이고 있는 거다.


집회(주-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되는 김경형목사님의 신학강의)에 나오는 목사님들이 그 전에는 가정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하는 것이 없었는데 이 진리를 받고 깨달아서 부엌에 들어가서 밥그릇도 씻고 한다. 사람이 사는 것은 복음 안에서 되는 거다. 창조의 목적도 그렇고, 자기 삶의 목적도 그렇다.


이 복음을 위해서 제일 먼저 우선 첫째는 부모님이 살아 계셔도 복음을 알지 못하면 말씀을 들려주고,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읍시다’ 하는 거고, 우리 입장에서는 복음이라는 여기는 분명한 가치판단의 옳은 교훈이 들어가는 건데 오늘날 기독교가 무당식이니 이게 문제다. 이건 복음이 아니다. 예수이름을 빙자한 예수무당들이다.


복음 안에는 사람에 대한 교훈이 들어있다. 애고 어른이고 처녀고 총각이고 인간이 알아야 할 교훈이 들어있다. 그래서 복음이라면 흉잡을 게 없고, 복음 안에서는 모든 것이 지혜고 깨닫고 유익이 되는 거다.


이 복음을 위해서 가정의 부모형제 처와 자식과 일가친척과 이웃들과 나라들이 있는 것이고, 이 복음을 위해서 토지도 건물도 전답도 있는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다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근본 원칙적인 말이다. ‘종교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복음은 인간의 근본이다.


그런데 인간 타락 후로 썩고 불타지고 변질되고 변동되고 바람에 날아갈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복음보다 우선시 되었고, 하나님 자리에 세상의 부요성이 앉아버렸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는 ‘복음을 먼저 선택하고 가지라’는 이 말씀이 자신들의 소원 목적과는 정 반대가 되니까 원수처럼 들린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정 반대이니 원수처럼 들리는 것이다.


‘버린 자는 금세에 백배나 받되.’ 그러니까 못 버리면 못 받고, 안 버리며 못 받는 것이다. 받는다고 하는 것은 복음의 목적에 적중이 되니까 받는 거다. 이러면 달라고 안 해도 주신다. 그런데 복음에 적중되지 못한 신앙자가 많다는 점이다. 이런 자는 모두는 이용당하고 빼앗기고 형벌과 멸망이다.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 누가 핍박을 한다는 말이나? 외국 사람인가, 멀리 있는 사람인가, 가까이 있는 사람인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가, 잘 아는 사람인가? 같은 교인도 될 수 있고, 같이 있는 식구도 될 수 있다.


그러면 왜 핍박을 하는 것일까? 자신들은 세상을 우상처럼 만들고 세상이 자기를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는 줄 알고 그 소원 목적으로 살고 있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사람으로서 천국복음대로 순종하여 경건하고 살고자 모든 이해타산을 가지니까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핍박을 하는 거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과는 항상 반대다.


핍박에는 여러 가지 모양새가 있다. 대립적 대립이 있고, 유혹 미혹적 대립이 있다. 세상 사람과 물질성에 넘어가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물질에 코가 꿰이게 된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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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63 로마서 위정자에 대한 선의의 복종 롬12:1-5  강종수 목사  2018-01-28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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