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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죽을 때 하나님도 따라 죽었다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89 추천 수 0 2016.04.27 23: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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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5:6-15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6.3.27 부활절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예수가 죽을 때 하나님도 따라 죽었다.
막15:6-15
2016.3.27 부활절


예수님이 세상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 그리고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터무니없이 죽었다가 삼일 만에 기적적으로 부활을 했다. 이는 역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초유의 사건으로 기독교만의 특징을 짓는 진리의 가치 표상이다.

이렇게만 하고 부활절을 맞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이미 이런 교리수준을 벗어났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그러다보니 조금 집중해서 들어야 될 거 같습니다. 오늘 부활절 설교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성서 본문 막15장에는 빌라도 법정에서 일어난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폭동 중에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살릴 것인가, 고 군중들에게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9). 그러자 군중은 뭐라고 소리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를 바라바 대신 매달아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군중들을 ‘만족시키려고’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의 처형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전해지는 이야기라고 해도 이건 좀 푸석푸석하지 않습니까? 질서도 원칙도 없이 소리치면 다 되는 그런 어리숙한 빌라도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로마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야야기 자체는 역사적인 개연성이 없습니다. 즉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길거리를 오고가는 사람들이 법정의 판결에 개입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습니다. 빌라도에 관한 성서 밖의 다른 문서들도 빌라도의 인물 됨됨이는 유대 백성들이 소리친다고 거기 마음이 움직이고 다수의 압력에 굴복당하는 그런 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더욱이 폭동을 일으킨 반란혐의자를 석방하고 종교적인 모독 혐의에 의해 끌려온 예수와 바라바를 바꿔치기 한다는 것도 상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는 왜 어디서 생산이 된 걸까요? 이것은 아마도 법정 안에서 벌어진 예수의 재판에 관한 일을 도무지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 이야기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인데,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가 어처구니없이 처형을 당하게 된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생산해 낸 이들이 전하려는 진짜 이야기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훗날 바라바와 예수가 뒤바뀌는 이야기를 들으며 진짜 이야기 하나를 읽어냈을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군중을 만족시키려고’입니다. 다른 장면들은 사실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건 진짜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한 것은 ‘군중을 만족 시키려’는 것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가슴 아프게 되뇌이며 이 이야기를 퍼뜨렸던 사람들은, 예수에게 환호했던 자들이 도리어 그를 죽이라고 소리친 것을, 그의 주검 앞에서 퍼붓던 그들의 야유를, 그 가슴 아픈 배신감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그 나라를 기꺼이 쟁취하겠다고 열광하던, 집도 처자식도 다 버리고 따라다니던 바로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랬던 그들이 도리어 그 나라를, 그 나라의 장본인인 예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선동자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것을 바로 이 장면이 그려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지 처형 장면을 사실대로 증언하려는 것이 아니었던 말이죠.

예수를 바라바와 바꾸라고 말한 그들은 지난 시간 메시아가 일으킨 변혁의 불을 함께 지핀 공범들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먹고 마셨든 그렇지 않고 따라다니기만 했든 어떻든 그들은 모두 예수의 공범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느 순간 화재경보기에 놀라 도망치듯이 그렇게 예수의 주변에서 몸과 마음을 감추기 시작합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변혁의 무대에서 흩어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들 중에 누구도 성전의 억압의 장치들을 불질러 태워버려야 한다는 ‘불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울려대는 화재경보기에 놀라서 몸을 움츠리고, 거센 물결을 내뿜는 소방차의 물 호스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찍이 몸을 피해 버렸습니다. 공생에 3년 동안 예수께서 쏟아내신 ‘불의 호소’만이 허공 속에서 춤추고 있었을 뿐입니다. 모든 게 무로 돌아간 상황이었습니다. 그저 예수의 가르침만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욕설을 퍼붓고, 추종자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멀찍이서 침묵 속에 관망하는 가운데, 처절하게 찢겨지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예수는 죽어갑니다. 이때 하나님도 철저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그토록 마지막 절규로 구원을 호소하지만 하나님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잔혹극의 가학성(억울하게 죽어가는 걸 잔혹극이라 하고, 그런데도 누구하나 그를 편들어 주지 않을 때 가학성이라 함), 권력과 대중이 공모 속에 벌어지는 역사의 가학성에 하나님도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겁니다. 그러나 이때 죽은 하나님은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하는 하나님이 죽었던 겁니다. 좀 어렵죠? 만약 예수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며 죽게 되었어요.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이놈들 왜 이 죄 없는 이를 이리 고통을 가해서 죽게 하느냐’하면서 예수를 학대하는 사람들, 그걸 지켜보며 공모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벌을 준다고 할 때, 그것을 가학성을 가학성으로 보복한다고 하는 겁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못된 인간들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예수에게 가학을 해도 아무소리 않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도 예수의 살해 현장에서 살해를 당하셨다는 말인 거예요. 바로 그 현장, 하나님마저 침묵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변혁 행위의 주체인 하나님도 함께 죽은 겁니다.  

그러면 이때 하나님이 영원히 죽은 겁니까? 나쁜 놈들이 착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일 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하나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죽은 것이냐 말이죠. 그러나 확실히 예수에게 벌어지는 가학에 대해 침묵하던 하나님도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영원히 죽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권력과 대중의 가학성 속에 목 베인 하나님은 바로 피학성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학에 가학으로 갚지 않고 그 가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이 죽음으로 가학을 넘어서고 있다는 말입니다. 순환하는 가학의 고리를 끊은 겁니다. 인간의 가학성에 도살당하는 고난의 담지자가 됨으로, 새로운 가학성의 주체가 되는 변환의 순환 도식, 윤회의 수레바퀴(돌고 도는)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곧 예수는 죽임을 당함으로써 비로소 도살당한 해탈의 하나님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억울해 하며 탄원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예수를 살리고 예수를 엿 먹이는 이들에게 예수가 당한 것처럼 보복을 했더라면 예수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탈한 하나님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가 가학을 당할 때 함께 가학을 당하고 죽은 하나님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의 전말이고 본질입니다. 이게 진정한 부활, 예수도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고, 하나님도 해탈한 하나님이 되는 진정한 부활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권력과 대중에게서 가학을 당하여 죽지 않고, 죽을 때 하나님의 대리 보복이 있어 죽지 않게 되었다면, 그 악순환, 가학성이 피학성으로 바뀌는 그 장엄한 인류역사의 단절 고리가 생성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도살당함으로 함께 가학의 죽임을 넘어선 하나님과 만난 것입니다.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었던 뜻은 그것입니다. 이게 모든 하나님 나라 사건의 원 사건입니다.

몇 편, T.V에서 방영되는 육룡이 나르샤를 보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변혁의 성공은 승리의 환호를 가져오지만 성공과 함께 또 다시 가학성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세상의 악순환입니다. 그런데 도살당한 하나님의 사건은, 인간사의 메저키즘을 끊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계보가 꿈틀 탄생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임 당한 곳에서 하나님 사건은 해방 전통이라는 불수레를 타고 다시 부활하는 것입니다. 예수 사건은 바로 그 자신의 죽임 당함에서 절정을 이루는 겁니다. 3년의 그의 행적은 이 하나의 사건에 무엇으로도 견주지 못합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하여 예수는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사건은 해방사건의 원 사건이고, 동시에 가학으로 죽임을 당했지만 피학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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