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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499 추천 수 0 2016.05.15 15: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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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12-19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11장 12절-19절: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12절-14절: 베다니는 ‘대추야자의 집’이라는 뜻이다. 그 동네에는 나사로의 집이 있고, 또 문둥병자였던 시몬의 집이 있다. 예수님께서 누구의 집에서 주무셨는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어떤 뜻을 알게 해 주시려고 아침식사도 안 하시고 베다니에서 나오셨는데 매우 시장하셨던 모양이다. 예수님께서 주무신 집에서 ‘내가 식사 좀 하고 나간다’ 하면 그 집 식구들이 식사준비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찍 몰래 나오셨는지 어쨌든 아침 일찍 나오셨다.


마침 멀리서 봤을 때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하려고 그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들춰보면서 아무리 찾아봐도 열매를 구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열매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를 해버렸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했다.


사람들을 보면 흔히 빠지기 쉬운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뭐가 되지 않으면 발로 차버리는 심보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도 그런 거냐? 배는 고파 죽겠는데 열매가 없으니 화가 나서 저주를 해버린 거냐?


그런데 이상한 것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했으니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님에도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구한 것이다.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기 때문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건데 왜 저주가 들어갔을까? 한 마디로 예수님은 성도의 마음속에 열리는 열매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때 당시로 왜 저주가 들어갔느냐? 그 저주의 말을 제자들도 들었다.


그러면 그 무화과나무를 누가 만들었느냐? 주님께서 선재적 그리스도로 계실 때 주님 당신이 만들었다. 당신이 무화과나무의 일생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때 열매가 없을 것임을 그 분이 더 잘 아신다.


세상만사 모든 존재나 역사적 진행이나 일 년 열두 달 사시사철 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비켜나서 만들어진 것은 없다. 전부는 우리의 이룰구원의 깨달음이 다 들어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무화과나무를 들어서 우리의 구원의 이치와 도리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 무화과나무는 창조 때 정해놓은 자연법칙을 따라서 살도록 하신 것이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해지도록 되어 있다. 무화과나무는 계시적으로 유대백성들의 신앙 면을 비유로 잘 쓰신다. 성경이 계시로 되어 있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필요대로 열매가 없으니까 인간들의 감정처럼 저주해버리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성경의 모든 역사는 계시를 넣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표면적으로 역사적으로 나타난 선한 인물들이나 나쁜 인물들을 보고 ‘그 사람의 신앙이 좋네. 나쁘네’로만 보면 안 된다. 그걸 왜 나에게 보여주느냐? ‘너에게도 그런 요소가 없느냐, 그런 성질이 없느냐’ 하고 나에게 묻는 것이다.


성경을 계시가 없이 보게 되면 ‘그 사람의 신앙이 좋네. 나쁘네’ 하게 되는데, 이렇게만 보면 자기가 현재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자신을 보고 고치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 기준의 머리를 가지고 ‘이건 이렇게 하면 좋을 걸. 저건 저렇게 하면 좋을 걸’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수준도 모르고 자기의 신분도 모른 채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말해버리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한다. 자기 위에서 자기를 달아보는 분이 있는 건데 그걸 모를 수가 있다.


자기 옆에 누가 있는지, 자기 위에는 누가 계시는지가 있는 건데, 또한 신분이 있고, 위치가 있고, 말할 상황이 있고 안 할 상황이 있는 건데 그냥 말을 하게 되면 ‘그 사람 못 쓰겠구나’ 이렇게 들어간다. 아무리 예수를 오래 믿고 목사니 장로니 집사니 해도 그런 게 들어있을 수 있다.


지구상에 문제가 왜 나는 거냐? 나무나 풀들이 자기들끼리 싸워서 그런 거냐, 짐승 자기들끼리 싸워서 그런 거냐? 사람들끼리 싸워서 지구상에 문제가 생기는 거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백성들의 신앙은 외식신앙이다. 오늘날도 예수 믿으면서 외식신앙이 참 많다. 외식신앙은 껍데기 운동, 껍데기 강조다. 알맹이가 익어지는 게 아니라 껍데기 쪽으로 커지고, 역시 사람을 보는 것도 껍데기로 본다. 이건 100% 실패다. 물건을 사더라도 어떻게 껍데기만 보고 사느냐? 하물며 사람을 어떻게 껍데기만 볼 수 있느냐?


겉으로 볼 때는 모든 의식과 생활과 활동이 율법의 문자대로 격식을 찾아서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온전한 인격과 성품이 없는 하나의 종교생활, 종교적인 사역목적으로 되어있다면 이는 외식신앙이 된다. 외식신앙에서는 종교활동 프로그램으로 장식이 된다. 그런 곳에서는 개인적인 신앙도 외부적인 어떤 활동을 가지고 자꾸 자기를 장식을 한다. 우리는 속사람 장식이다. 지금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이걸 보여준다. 무화과는 속에서 꽃이 피고 속에서 꿀이 생긴다. 다 익으면 벌어진다.


외식신앙자들은 멀리서 보면 꼭 성령의 신앙의 사람처럼 보인다. 마침 바람이 지날 적마다 나뭇잎이 나부끼듯이 외형적 활동은 참 보기가 좋다. 그러면 바람이 불 때 나무가 나부끼는 것은 열매냐, 열매가 아니냐?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바람에 나부끼면 떨어진다. 세상은 유행바람, 종교적 바람, 정치적 바람, 물가바람, 전쟁바람 등 바람이 많다. 외식신앙자들은 선 과실이 바람에 다 떨어지듯이 그 바람에 우수수 떨어진다.


당시 유대나라는 이방 로마나라에 속국이 되어 지배를 당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종교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아야 할지를 알아야 했다. 외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그 지배를 받기 이전에 이미 속에서부터 세상 아래로 들어간 거다.


기독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들인데 수준적 신분적 실력적 그 위치가 낮으면 세상이라고 하는 것에 둘러씌워진다. 원리가 그렇다. 물의 흐름의 이치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그런 것처럼 자기 신앙의 질적 이치가 낮아지면 세상이라고 하는 로마 밑으로 들어가게 돼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이치를 빨리 알고 하나님 앞으로 올라오면 내적으로 충실해지면서 외부적으로 들어갈 텐데 내적으로 없으니 그게 안 된다.


해가 어두워지고 산짐승 소리가 나면 아이들이 밖에서 놀다가도 집안으로 들어오듯이 옳은 성도라면 교회들의 흐름, 신앙의 흐름, 자기 집안의 흐름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다면 수준이 올라와야 한다. 자기의 인격 성품 신앙의 수준이 다 올라와야 한다. 올라와야 산다. 안 그러면 세상 밑으로 들어가서 이리 밟히고 저리 밟히게 된다. 그게 자기 평생 갈 수도 있다. 이러면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하늘에서 구름이 덮이고 번개가 치면 비를 피하는 게 원칙인데,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부터 이방을 따라갔고, 제사장들이 가이사 황제를 ‘우리의 왕’이라고 했으니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러면서도 종교의식은 율법대로 한다고 거창하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열매 없는 나무와 같아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된, 성령으로 된 열매는 없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성경을 보고 듣고 자기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열려야 한다. 창조의 목적관에 든 사람이 돼야지 없으면 그게 뭐냐?


사실은 주님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해버린 것이다. 열매가 없으니 저주를 한 이 저주성은 그 때뿐만이 아니고 그 전에도 그런 성질이 들어있는 자에게는 저주성이고, 현재로도 마찬가지고, 미래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에 ‘이후로 네게서 영원토록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한 것이다. 건물과 사람숫자, 헌금과 종교적 활동과 종교적인 명예가 아무리 훌륭하고 거창해도 그런 위주와 목적으로 나가는 신앙정신과 사상에는 영원히 성령의 열매는 없다는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일생동안 살면서 자기가 어떤 정신 어떤 소원 목적을 가지고 살았느냐에 따라 자기 속에 그런 정신이 여물어지는 것이다. 그냥 산다가 아니다.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여물어지고, 알곡은 알곡대로 여물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게 들어있다. 하나님은 이걸 보신다. 속 중심을 보신다.


15절-19절: 예루살렘 안에서 되어진 일들을 보면 재앙들이다. 그걸 또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의 옛 이름은 ‘살렘’이었다. 구약시대로 올라가면 창:에 처음의 살렘 왕은 멜기세댁이었다. 당시 4대 연합군과 5대 연합군의 전쟁이 있었는데 이 전쟁에서 4대 연합군이 승리를 해서 조카 롯이 4대 연합군에게 끌려갔는데 아브라함이 가군 318명을 데리고 가서 4대 연합군을 멸하고 롯을 구원하여 돌아왔다. 이때에 살렘 왕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하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그곳에 거주했고, 이삭도 야곱도 그곳에 거주했다.


그런데 야곱의 식솔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400년을 지나는 동안에 누가 이 예루살렘에서 왕을 해 먹고 있었느냐 하면 아모리 족속 아도니세댁이 ‘나는 공의의 주시라’ 하며 왕으로 교만하게 살다가 여호수아에 패해서 죽임을 당했다.


‘멜기세댁, 아도니세댁’ 또 ‘이스라엘, 이스마엘’ 이름이 비슷하다. 아도니세덱과 멜기세덱은 형제가 아니다. 피가 다르고 족속이 다르다. 이스마엘과 이스라엘은 형제다.


그러면 아도니세댁과 멜기세댁 중에 누가 가짜 왕이냐? 아도니세댁이 가짜다. 그런데도 자기 스스로가 ‘나는 공의의 주시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교만이요 자칭이요 가짜요 이질이다.


그들의 잔당들은 다윗 때에 가서 다윗에게 완전히 멸절이 되었고,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해서 다윗성이라고도 했다. 그 후에 솔로몬 왕의 범죄로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북조 이스라엘은 열 지파로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으로 시작하여 나라가 패망할 때까지 19명의 왕을 거쳐서 호세아 왕을 끝으로 주전 700년경에 앗수르 나라에게 멸망을 당했다.


남조는 두 지파로서 국호가 유다로 되었고, 르호보암 왕으로 시작하여 20명의 왕을 거쳐서 시드기야 왕을 끝으로 주전 580년경에 바벨론 나라에게 멸망을 당하여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고, 황폐된 성전이 재건되면서 예루살렘 성읍도 다시 재건이 되었고, 그 후로도 로마나라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분봉 왕 헤롯이 46년간을 성전을 뜯어고쳤다. 이럴 즈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루살렘에서 많은 이적을 행했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예루살렘의 숫한 사연은 수도 없이 많다. 어쨌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 시온성, 거룩한 성, 의의 성읍, 진리의 성읍, 큰 왕의 성’ 등등의 이름이 많다.


이제 본문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앞에 말한 여러 가지 사건으로 구약 때 전쟁 통에 이방 땅에 잡혀가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절기 때가 되면 고향인 예루살렘을 찾아온다. 고향을 찾아오는 그들의 긍지는 대단하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은 성전이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간다. 이 지성소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선택된 거룩한 백성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역사의 증거를 가진 백성이다’ 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방백성은 그런 게 전혀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은 지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긍지가 대단했다.


이걸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 붙여서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기본구원의 터를 닦아주셨고, 더 나아가 말씀의 이치로써 이룰구원의 보이지 않는 영적 성전이 내 속에, 교회 전체에게 이뤄져가는 것이니 이것은 지구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신앙의 질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다니는 긍지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 긍지는 하나님께서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긍지인 것이다.


이건 말로만이 아니고, 또한 ‘우리교회 크다. 뭐가 어떻다. 재미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갈 때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긍지이니 우리 입장에서도 그 긍지를 가져야지 왜 그 긍지를 하찮게 여기느냐? 그러면 네 수준이 어떻게 되겠느냐?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섭리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보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기가 막히다. 성전이 짐승들을 매매하는 장소로 돼버렸다. 돈 바꾸는 곳이 돼버렸다. 외국에 사는 자들이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올 때 외국에서 쓰던 돈을 성전에서 쓰는 돈으로 바꿔야 했고, 바꿀 때는 그냥 바꿔주지 않고 이윤을 남기고 바꿔줬다. 그래서 장사꾼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제물 될 짐승을 사고팔기도 했는데 파는 자는 이윤을 남겼다. 짐승의 값도 ‘율법사가 기른 짐승은 얼마, 서기관이 기른 것은 얼마, 장로들이 기른 것은 얼마, 제사장이 기른 것은 얼마’ 하고 기른 사람의 직위에 따라 값이 차이가 난다. 이렇게 한 것은 먼 외국에서 예루살렘까지 짐승을 끌고 오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오는 교인들의 편리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그렇게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고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에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성전 안에는 어떤 자들이 들어가느냐?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제사장이 들어가고, 직무적으로 보면 레위인과 성전 종사자들이 출입을 한다. 성전에 놓여진 기구들도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걸 장사하는데 편리하도록 아무나 들어가서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버렸다. 이건 말하자면 귀히 여길 줄 모르고 경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말을 함부로 하고, 행동이 불량하고, 단정하지 못하고, 위아래가 없고, 남녀 구분을 못하고 저질스럽다.


성전은 성역을 이루는 곳인데 이곳에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듯이 세상 마지막 때는 밥 먹고 돈 벌기 위한 거짓된 목사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 앞에 쓰는 성호가 남발이 되고 있다. 얼마나 남발이 됐느냐? 석가와 예수가 만났다는 등의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가만 두지 않을 거다. 일반 도덕성 개념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주님이 일반 도덕적인 개념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 도덕성의 차원도 못 올라가면 그와 같은 처지에 놓여지게 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둘러보시고 내쫓는 이것은 진노의 심판이다. 세상 마지막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교회의 예배의 모든 수단이 흥행위주로 되어 있다며 이것도 거짓 종들의 장사의 수단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수단적으로 믿는 자가 많다. 계:에서 이런 자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게 된다고 했다. 그동안 장사를 잘 해 왔는데 그 모든 게 무너지고 불타버리니 ‘아이고, 이제 큰일 났다’ 하는 거다. 유형교회를 자기의 장사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은 이런 심판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진노의 심판이 올 수 있다. 하나님이 둘러엎으면 어떻게 할 거냐? 만능의 능력자 하나님이 자기에게 뭘 못하시겠느냐? 그걸 생각하면 하나님이 무서운데 바늘귀로 약대가 통과하는 건 안 믿어지느냐?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성역이 아닌 세상에 속한 것으로 잔뜩 들어있다면 우리 자신들에게도 징계의 역사가 있게 된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곳이다. 자기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으로 자기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이 성전에서 이뤄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이뤄질 곳은 없다.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우리 속에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연적으로 자기가 힘쓴 만큼 이뤄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으로 사람이 만들어지지 못하면 만들어질 곳은 없다. 교회에서 성역이 없으면 이는 진노의 형벌과 심판으로 들어간다. 자기 속에 성역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계속)


*************************

성도가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구원의 의사를 좇아서 신앙을 해야만이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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