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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목하라!

고린도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813 추천 수 0 2016.04.14 21:4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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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5:16-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86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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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6-21, 사순절 넷째 주일, 2016년 3월6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예수 믿고서 달라진 게 있으신지요? 각자 답이 다를 겁니다. 달라진 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무엇을 달라진 거로 봐야 하느냐에 따라서도 답이 또 달라집니다. 흔히 말하듯이 예수 믿고 거칠었던 언행이 세련되게 달라졌다는 분들도 있고, 마음이 훨씬 더 평화로워졌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건 예수 믿지 않아도 나타날 수 있는 변화입니다. 손에 잡히는 게 없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거나, 또는 단순히 인간관계나 교회활동 자체에 흥미를 느껴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다가 그런 것들이 시들해지거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교회를 그만 두기도 합니다.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교회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것도 예수 믿은 뒤의 변화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은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어려서가 아니라 30대에 들어서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인데, 그는 예수 믿은 뒤에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오늘 설교 본문인 고후 5:17절에서 아주 강렬한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놀라운 표현이지요?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아주 간단한 겁니다.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니까요. 공동번역은 ‘새 사람’이라고 번역했고, 루터는 ‘eine neue Kreatur’(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모양이 달라진 게 아니라 근본이 달라진 것입니다. 겉모양의 변화도 중요하긴 합니다. 성격이 괴팍하다가 온순해지면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가 좋습니다. 큰 병을 앓고 난 후나 사업 실패 후, 또는 실연당한 후에 사람이 더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달라지는 걸 말합니다. 이런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신가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지요?

 

현대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가리키는 종교경험을 하기 어렵습니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지만 현대는 상황이 더 어렵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종교적이기보다는 세속적인 것에 관심이 높습니다. 세속화는 현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몰두하는 겁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그런 세속의 삶이 소중하지만, 그런 것의 과잉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삶의 차원은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현대인들은 대체 종교에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예능이 그들에게는 종교입니다. 감정 과잉으로 치닫는 티브이 일일 드라마도 현대인들에게 일종의 대체 종교 역할을 합니다. 이런 것에 삶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현대인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고린도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은 현대인들과 달리 종교심이 두드러진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종교심이 강한데, 바울은 그중에서도 유별났습니다. 빌 3:5절 이하에 따르면 그는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정통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이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실제 삶으로 구현해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교회생활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즉 성수주일은 물론이고 십일조 헌금, 새벽기도와 해외선교, 구제와 봉사에 앞장 서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빌 3: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유대교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행 22: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한 마디로 바울은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세속적이라는 말과 반대로서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폴 틸리히는 이를 ‘ultimate concer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관심이 없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바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아닌지를 보십시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떤지를 보십시오.

 

궁극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잘 분간이 안 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도 주변에서 그런 차이를 느낄 겁니다. 부부가 서로 다를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인격이나 교양의 문제가 영적인 문제입니다. 궁극적이라는 말과 영적이라는 말은 사실 똑같습니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본래적으로는 다 궁극적인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배부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까지 추구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대는 모든 게 돈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고, 따라서 영적으로 생각하며 살기 힘듭니다.

 

가장 궁극적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와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아주 실질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 블랙홀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있다고 합시다.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세계입니다. 그 모든 것이 창조와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이나 파키스탄에 비해서 우리는 지금 경제적으로 10배는 더 잘 살고 있습니다. 100년 후에 이런 상황이 거꾸로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 최고 기업의 대표 후손이 50년 후에 노숙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통치하는 분이 바로 창조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세계와 역사의 궁극적인 토대가 하나님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은 공중에 뜬 게 아니라 바로 가장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에게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고 말했습니다. 천지의 모든 것, 인간 실존의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라서 바울은 고후 5:17(후)절에서 과감하고 간절하게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 구절은 루터 번역이 뛰어납니다. ‘Siehe, es ist alles neu geworden.’(보라, 모든 것이 새로워졌노라.) 도대체 바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이런 경험을 세상살이에서도 가끔 경험하긴 합니다.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눈에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봄비, 햇살, 바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다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에게는 이전의 시각이 다 없어지고 전혀 새로운 시각이 열립니다. 그의 영혼이 기쁨과 평화로 가득하게 됩니다. 존재론적 기쁨이자 평화입니다. 어떤 것을 소유했느냐에 의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근원에서부터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경험했는데, 지금은 놓친 건 아닌가요? 이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런 일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즉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에서 시작됩니다. 고후 5:10(후)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보통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요즘 화목이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은 화해하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카탈라게’는 하나님과 프랜드십(friendship with God)을 맺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과 화목, 화해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암시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왜곡, 또는 단절된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오늘 제3 독서인 눅 15:11-32절이 하나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자기의 유산 상속분을 아버지에게서 받아들고 가출합니다. 모든 걸 탕진했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어 돼지 농장 일꾼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비정규직입니다. 돼지 먹이로 겨우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벌어진 운명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죄로 인해서 벌어진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런 말을 현대인들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지금 자신은 아주 고상하게 살고 있는데, 돼지 농장 운운하지 말라, 그걸로 겁주지 말라고 말입니다. 정말 현대인들은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고 있을까요? 그건 단순히 포장된 포즈에 불과하고 실제는 돼지 농장에서 꿀꿀거리면서 먹이를 다투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현대인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자기 성취를 위해서 몸부림 치고, 끊임없이 다른 이를 공격합니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학에 빠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노력으로 인격 수양을 쌓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남에게 인색하지 않게 대하고, 존경받기도 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스스로 이런 정도로 살면 만족해, 아쉬운 거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세련되게 보이는 것과 실제의 삶은 다릅니다. 무언가를 더 채우려고 노심초사합니다. 기쁨과 평화가 아니라 불평불만과 욕망, 온각 걱정거리가 현대인의 영혼 속에 휴화산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튀어나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어떤지를 보십시오. 돼지농장에서 먹이를 두고 돼지와 다투는 탕자의 모습과 다를 게 없습니다. 저는 세상이 타락했고 교회만 깨끗하다거나, 다른 사람은 천박하지만 나만 고상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된 인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종교적인 낭만으로, 순전히 관념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생명을 얻는다고 절규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실제로 가능한 걸까요?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하다는 건가요? 바울은 21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말이 된다고 믿는 사람은 기독교인이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겠지요.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인정하기가 쉽지 않는 주장입니다. 일단 교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앞에서 죄와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삶을 가리켜 먹을거리로 다투는 돼지 농장처럼 끝없는 욕망, 갈망, 자기연민 등등으로 인한 만족 없는 삶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다음에도 이런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뉴스를 듣기가 민망하고 겁이 날 정도로 온갖 욕망의 충돌로 세상이 살벌합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드린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세요. 예수 믿고 변한 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우리 삶에서 나타나고 있을까요? 죄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과 화해된 삶이 나타납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기 힘들 겁니다. 대답하기 힘들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과의 화해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도 접어두는 게 솔직한 게 아닐까요?

 

이 대목부터는 정말 조심스럽게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유한 예수 경험이 전제되지 않으면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유대교에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걸 걸었습니다. ‘올인’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의에서 더 멀어지는 걸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밝히 보일수록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만 더 크게 두드러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예수 추종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부활의 예수를 경험했습니다. 예수를 생명의 실체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구원 경험이며, 죄 용서 경험이며, 의 경험입니다. 바울은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다시 탕자의 비유로 가보십시오.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로 연명하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랑거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게 부끄러움뿐입니다.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뜯어말렸을지 모릅니다. 네가 그런 몰골로 집에 가면 맞아 죽는다, 아버지가 일꾼들을 시켜서 집은 고사하고 동네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할 거라고 겁을 주었을 겁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집에서 성실하게 아버지를 도와 일하던 형은 죽은 아들이 돌아왔다고 잔치를 벌인 아버지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탕자는 모든 이들에게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아버지를 신뢰했기에 아버지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 생각해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모든 이들에게서 버림받은 운명을 가리킵니다. 돼지 농장에 들어간 탕자와 같은 운명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탕자입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상황에 떨어진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죽음에는 당신 책임도 커.’(사라마구 『카인』 참조) 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에게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종말 생명의 선취입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과의 최종적인 화목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당연히 믿으실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와 죽음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현실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거듭해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탕자의 ‘귀향’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런 일이 기독교인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야 하고,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남한과 북한의 관계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의 심정으로 저도 여러분에게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돼지 농장에서 아버지 집으로 거듭해서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의를, 즉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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