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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가지 최상의 복 (Ⅲ)

마태복음 조용기 목사............... 조회 수 1795 추천 수 0 2009.11.10 00: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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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9~16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7년 7월 22일 주일2부 설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서론>
오늘은‘여덟 가지 최상의 복’제 3편 마지막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복있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2주째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복 있는 사람의 삶의 태도에 관하여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본론>
일곱째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전쟁과 전쟁소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TV채널을 틀어 보십시오. 거의 태반이 죽이는 역사 스토리, 전쟁하는 영화가 나옵니다. 죽이는 것을 일삼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비참하게 죽이고 죽고 피흘리는 고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화평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화 없는 평화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만 주장하고 다른 사람 생각대로만 주장하기 때문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평화를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로이엘 호우(Reuel Howe)는 그의 책 「대화의 기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에 피가 흘러야 한다면 사랑에는 대화가 흘러야 삽니다. 피가 멈추어 섰을 때 그 몸은 죽기 시작합니다. 만약 대화가 멈추어 버린다면 사랑은 죽은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분노와 증오가 잉태 됩니다. 이미 죽은 몸은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화는 이미 죽은 관계까지 회복할 능력이 있습니다. 진정 이것이 대화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오해와 미워하는 사람과 화평할 수 있고 원수도 화평으로 인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화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간의 화평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날 부부간에 알력은 말할 필요 없고 부모 자식 간에 죽이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혈족끼리도 화평이 없습니다. 그것은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족 간에 대화가 가정의 화평을 가져오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5월 15일 취업포털 커리어(career.co.kr)에서는 직장인 1천 574명을 대상으로 가족 간의 대화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절반인 47.8%는 가족과의 대화 시간이 하루에 평균 30분도 되지 못한다고 말했었습니다. 10분도 못 되는 사람이 20%였고, 30분에서 1시간 미만인 경우가 30%에 불과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과 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더욱이 대화를 할 때도 직접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대화하기 보다는 전화를 통해서 대화를 한다는 사람들이 62.2%가 되고, 인터넷이나 이메일을 통해서 가족 간에 대화한다는 경우가 20%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커리어 대표 김기태씨는 "가족 간의 대화단절은 더 많은 감정을 쌓이게 할 수 있어 가족 내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족 간에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가족 간에 대화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일가와 친척 간에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하면 많은 오해가 풀리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 간에도 무조건하고 주먹을 휘둘러서 내 개인의 이익만 내놓지 말고 대화를 통해서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이해할 것은 이해하고, 이해 못할 것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화가 있어야 평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북대화를 계속해야 된다. 햇빛 정책을 지지하는 이유는 대화를 통해서 순식간에 일어날 오해로 말미암아 살상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할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서로 대화하는 동안에는 죽이고 죽이는 살상이 일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화는 우리 인생생활에 결코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호 오해하고 미워하는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원수와의 대화가 화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인생들과 말씀을 하기 위해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우리가 서로 의논하자. 너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 같이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질 수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대화하자고 하나님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과 대화의 제의를 거부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현실인 것을 보게 될 때 안타깝기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히1:1~2에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만물을 지으신 그 아들을 통해서 오늘 하나님은 여러분과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나오면 모든 죄를 값없이 은혜로 깨끗이 정하게 해주시고 구원을 해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오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대화가 없는 사람은 금세와 내세에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면 흑암이 광명으로 무질서가 질서로 죽음이 생명으로 파괴가 건설로 추가 아름다움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카네기 공대에서는 졸업생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들을 조사하여 그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는 데 전문 지식이나 기술은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는 인간 관계였다." 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기술이 탁월해도 그것이 성공을 가져 오는 데는 15%밖에 영향력이 없다. 인간성이 좋아야 성공하는 것이 85%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방문'을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입의 방문', '손의 방문', 그리고 '발의 방문'이라고 말합니다. 입의 방문은 전화나 말로써 상대방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전화를 통해서나 혹은 인터넷을 통해서 이메일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 심방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의 비결인 것입니다.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손의 방문이라는 것은 편지를 쓰거나 이메일을 통해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서로 간에 화평케 하기 위해서는 특히 '입의 방문'이 절대로 필요한데 입의 방문이라는 것은 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서 화평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족 간에 이웃 간에 심지어 원수 간에도 대화를 통해 화평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화평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비평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대화만 할뿐 아니라 돌아서서 이웃을 비평하고 판단하면 모든 대화는 깨뜨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시내산 율법과 갈보리산 용서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셨습니다. 십계명과 율법은 사람의 잘못을 들춰내고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시내 산에서 우리가 사람들을 보면 율법을 통해서 언제나 남의 약점과 잘못된 점을 발견해서 그를 할퀴고 먹칠하고 짓밟습니다. 자기는 율법의 자로 재지 않고 이웃만 율법으로써 잘못을 지적하고 연약을 지적하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고 화평이 되지 않고 언제나 갈등과 알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보리 산에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몸찢고 피흘려 다 용서하시고 주님께서 사랑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내게로 오라고 끓어 앉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를 헐뜯고 발가벗기고 할퀴고 짓밟지 않습니다. 우리를 용서해주고 덮어주고 치료해주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우리가 대화를 하면 파탄이 오지만 갈보리 산에서 대화가 오면 화해하고 서로 끌어안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사랑으로 일치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7:1~5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안보고 이웃, 형제에게 "네 눈에 티 있지? 보기가 흉하다. 내가 뽑아주마." 자기의 결점은 말할 수 없이 많고 자기의 죄도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자기의 죄와 결점은 감춰 버리고 형제의 적은 잘못과 죄를 지적하고 비평하고 평론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평과 평론을 잘못하면은 큰 파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항상 아내를 비평하고 평론하는 남편은 아내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늘 남편을 깔보고 비평하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이해하고 동정하고 용서하고 살아가는 갈보리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화목을 가지고서 인생을 살아야 비로소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벧전4:8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하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의 죄를 들춰내지 않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율법으로 자식을 발가벗기고 할퀴고 상처 입히고 짓밟아도 부모는 자식을 덮으려고 하고 치료하려고 하고 끌어 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자동차가 달려올 때 어린 아기를 데려온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안고 뒤로 돌아서서 자동차를 막습니다. 자동차가 와서 부딪히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린 아기는 가슴에 안고 등을 뒤로 돌려서 자동차를 막는 것이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의 허다한 허물을 용서하고 덮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몸 찢고 피흘려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는 마음이 변화되어 우리도 용서와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5:38~42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는 악을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은 뭐냐면 사소한 일을 가지고서 내가 양보하지 아니하므로 화평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지고 있는 평화와 이웃 간에 화평은 뺨 한데 더 맞는 보다 중요하고 속옷과 겉옷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한 십리를 더 걸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대한 일은 모르겠지만 인생에 모든 분쟁은 사소한 일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평화를 잃을 정도 같으면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양보를 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 내가 얻고 평화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조그마한 일로 말다툼합니다. 내가 지고 가정이 평안한 것이 좋지, 내가 이기고 가정이 살얼음같이 되고 서로 긴장이 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인 것입니다. 평화가 행복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돈 많다고 행복하지 않아요. 좋은 집에 산다고 행복하지 않아요. 부귀, 영화, 공명이 있다고 행복할 것입니까? 권력이 있다고 행복합니까? 아니요, 마음에 화평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고 내 가족과 이웃 간에 화평을 가져오면 하나님이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한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살상이 아니라 사랑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화목케 하는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케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케 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도 화목을 가져오는 것이 주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서로 물고 찢고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덟째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의란 무엇인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일생의 죄악을 다 청산한 그 공로가 의로움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의롭게 되지 않습니다.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한번 과거의 생활을 헤아려 보십시오. 내가 의인이라고 어깨 펼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오십보, 백보입니다. 50보, 100보간 사람 그 차이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의라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영원히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의가 있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자랑하고 사는 것이 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자랑하지 아니하고는 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자고, 깨고,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의를 영원히 이루어 놓으셨으니 예수님을 내 가슴에 잔뜩 모시고 살아가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이 얼마나 의롭게 되느냐. 하나님처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그 죄 덩어리가 용서를 받되 철저히 용서를 받아서 하나님이 의로운 것처럼 여러분도 의로워지므로 하나님 앞에 맘 놓고 출입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의로우신 예수님을 섬기고 모시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직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사회생활에서 고통을 당하면 성경에는 말합니다. 복이 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언제나 복으로 돌아온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 먹고 핍박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면 그만큼 하늘에 복을 쌓아 놓는다는 것입니다.
마5:11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복이 있느냐.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렇게 잘 믿어서 세상 사람에게 욕을 얻어먹고 오해 당하고, 핍박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진짜로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최고의 상입니다. 세상에 인정을 받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국가에서나 사회 단체에서 인정해서 상장을 주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인정을 해주는 그러한 상은 최고의 상입니다. 핍박을 받을 때 주님 때문에 고난당할 때 최고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롬1:17에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의인이 복을 받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통 받을 때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쫓겨서 나가면 하나님이 기다렸다가 손을 펴고 품에 안아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맞을 때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고 세상의 욕을 얻어 먹을때 하나님이 칭찬해 주시고 반대급부로 세상이 아무리 쥐어 박아도 하나님은 더욱 사랑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복은 최고의 특전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받는 것도 좋고, 국가의 사랑을 받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적게 사랑받는 사람도 있고, 많이 사랑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많이 주를 위해서 고난 당하면 더 많이 사랑받고 적게 고난 당하면 적게 사랑받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이 복이 있는 것은 성령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난이 더하면 더할수록 성령의 위로도 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욕을 얻어먹거나 핍박을 받거나 감옥에 들어가거나 괴로움을 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령의 위로가 무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의 성령이 오셔서 품에 품어 주시고 엄청난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안정과 평안과 기쁨과 소망으로 들뜨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쁨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의 위로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불광동에서 목회를 할 때 18살에 과부가 된 할머니가 외딸 하나를 키워서 고등학교 선생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이 외딸이 애를 놓고 난 다음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이제 집에 들어가서 장례식을 치르라고 했습니다. 그 딸을 우리 천막교회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도 회개하고 딸도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딸이 한동안은 잘 회복되다가 하루에 너무나 감사하다고 일어나서 천막에서 춤을 너무 추어 가지고서 그만 심장에 무리가 되어서 숨이 넘어 갑니다. 그리고 그 딸이 세상을 떴습니다. 그 어머니가 집에 있고 딸은 천막교회에 있었는데 최자실 목사님과 내가 들것에 그 죽은 딸을 담아서 추운 겨울날 미끄러지면서 그 집을 방문해 갔는데 저의 마음이 처참했습니다. 과부 18살 과부에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 심장병으로 죽었는데 그 시체를 들고 들어가니 그 노인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하나님, 우리는 위로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위로하지 우리는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이 딸을 보면 그 어머니가 졸도하고 죽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딸을 들것에 들고 들어가니 "왜 내 딸을 들것이 들고 왔어?" "딸이 천국에 가셨습니다." "아이고.." 그러더니 주저앉아요. 그 딸을 방안에 들여 놓고 제가 안수하고 기도하며 함께 울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에 성령의 위로가 그 할머니 속에 오는데 그 할머니가 일흔이 넘었는데 한 찬송을 부르고 박수를 치면서 기뻐하고 조문객들이 와서 위로 하니까 "슬퍼하지 말라! 내 딸은 예수 믿고 천당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마음에 위로를 받아 평안을 가지고 기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기뻐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됩니다. 자기 딸이 죽고 이제 딸 없는 사위하고 어떻게 삽니까?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성령의 위로로 말미암아 오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살후2:16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다가 핍박을 받으면 천국 시민의 확증을 받기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요. 세상사람 같으면 세상이 자기 편이니까 끌어 안지만 세상이 볼 때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핍박한다 말입니다. 핍박을 당하는 이유는 천국시민이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천국 시민증을 흔들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당하나 하나님은 시민인 것을 확증해 주는 것입니다.
빌3:20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다가 핍박을 받을 때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을 추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욕을 얻어먹고 손가락질하면 슬퍼하고 통탄하고 괴로워할 것인데 우리 주안에서 의로운 삶을 얻은 우리들이 핍박을 받고 고난 당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춤을 추라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핍박 받았고 사도들도 핍박 받았으니 우리도 핍박 받는데 동참할 수 있는 그 특권을 생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왜, 하늘에 상이 크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희생을 당하면 하늘에서 엄청난 상을 예비하고 축복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9. 소금과 빛 된 그리스도인
그 다음에 우리 팔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 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이라고 말했습니다.
소금은 왜 소금입니까? 맛을 내기 때문에 소금인 것입니다. 삶을 맛있게 하는 양념같은 것이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 먹을 때 소금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계란도 삶아 놓으면 소금에 찍어야 맛있지 소금에 찍지 않으면 닝닝해서 맛이 없습니다. 간장도 된장도 김치도 모든 것이 소금이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보다 소금을 더 많이 먹는 것이 서양 사람들인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다른 양념이 없으니까 소금이 양념입니다. 이것은 뭐 빵에도 소금을 치지 않냐, 계란에도 소금을 치지 않냐, 뭐 고기 굽는데도 소금을 치지 않냐. 전부 소금을 칩니다. 소금이 들어가야 양념이 되어서 맛이 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너희는 소금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느 곳에 가나 맛을 내는 양념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예수 믿는 사람이 어느 곳에 가나 쓸개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소금이 되지 못하고 쓸개가 됩니다. 여기가도 사람이 고통을 당하게 하고, 저기가도 사람을 이간시켜 놓고 분리시키고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찌푸리고 닝닝 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나 양념 같은 사람이 되어서 그 모임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만 만나면 오늘 기분이 좋아. 마음이 즐거워." 그래야지 "저 사람은 만나면 재수가 없어. 오늘 기분 나뻐." 정말 재수 없는 사람이 있어요. 만나면 기분 나쁘고 우울하고 "에잇 오늘 별난 것 다 만났네." 만날 때마다 마음이 즐겁고 상쾌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념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소금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예수 믿는 너희는 소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만든 소금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소금이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알고 소금의 역할을 하면 어느 곳에 가나 양념 같은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 환영을 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식당에 가면 사람들이 "소금 주세요. 소금! 소금 어디에 있어요?" 하는 것처럼 "그 사람 어디 있어요? 그 사람 보내 주세요. 그 사람 만나게 해주세요." 소금 같은 남편, 아내가 얼마나 즐겁습니까? 소금 같은 아내, 남편에게 얼마나 사랑받겠습니까? 소금 같은 자녀, 소금 같은 부모, 인생을 맛있게 살게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소금은 또한 부패를 막습니다. 소금이 없이는 부패해요. 오늘날에는 얼음도 있고 냉장고도 있기 때문에 신선하게 보관하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얼음도 없고 냉장고도 없었습니다. 우리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31번지 우리 학교에 가면 시장을 지나가게 되는데 시장에 보면 그때 내 눈에 띄는 것은 갈치가 늘 눈에 띄었습니다. 완전히 소금 범벅입니다. 소금인지 칼치 인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울산에서 잡은 칼치를 언양까지 가져 오는데 소금을 절여 가지고서 소금 덩어리가 되어요. 그런데 그 칼치를 잘라 가지고서 고춧가루 넣고 찢어 놓으면 쩝. 와~ 그 국물이 짜기는 한없이 소태같이 짠데 얼마나 맛있던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내 짝궁이 하루는 오더니만 공부를 안 하고 입맛을 쭉 다시면서 "와~ 과신 맛있 드래이~" 또 있다가 "와~ 과신 맛있드래이~" "뭐가 그렇게 맛있냐?" 자기 아버지가 오랫 만에 시장에 가서 구린내 나고 소금에 절인 칼치 꼬랑지 하나 가지고 와서 그것을 찢어서 가족들이 저녁에 나눠 먹었어요. 시골에서 비린내 나는 것 입에 대볼 수가 없습니다. 1년 내내 가서.. 그런데 그것을 먹고 난 다음 너무나 좋아 가지고서 하루 종일 그 말만 하는 것입니다. "과신 맛있 드래이~" 저도 어릴 때 소금 절인 그 짠 칼치 토막을 찢어 놓은 것이 너무나 너무나 맛이 있어서 요사이도 그것을 먹어 보려고 아무리 만들어 놓아도 맛이 없어요. 그때 그렇게 맛있던 것이 왜 맛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소금은 썩는 것을 부패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어느 곳에나 부패가 꽉 들어찬 세상에서 정의를 가져오고 성경함을 가져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져오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함께 섞여서 썩어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소금이다. 나는 부패 할 수가 없고 나는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내 소금이다. 소금이 되어야 된다." 우리 오늘날 한국교회가 우리 한국사회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한국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 곳에나 문제가 생기고 부패가 생겼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소금의 역할을 다시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 맞이 않는 것입니다.
마5:13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예수 믿는 성도들이 짜게 만들지 못하면 오늘날 이 세상은 부패하고 말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국에 5만 교회, 10만 주의 종, 1,200만 성도들 둔 것은 그만치 소금을 한국에 많이 뿌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산업 모든 면에 부패하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평양100주년부흥대회가 다시 한국에 일어나려면 다른 것 구하지 말고 하나님 소금의 본연 자세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지금까지 소금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과 함께 놀아나고 부패했습니다. 회개하오니 우리 소금의 본연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소금으로 생각하고 소금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우리 개인과 사회와 국가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새롭게 나타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우리가 빛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옛날에는 마귀의 지배를 받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등대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 예수를 믿고 빛이 된 것은 이 세상이 어둡잖아요. 사람들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캄캄한 밤에 살고 있습니다. 그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부귀, 영화, 공명만 찾아서 헤매고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도살장에서 돼지를 목을 자를 때 콩을 줄줄줄 흘려 놓으면 콩 먹다가 따라 가다가 철컥 목이 날라 가고, 콩 먹다가 따라 가다가 철컥 목이 날라가는 것처럼 사람은 죽을 때까지 탐욕을 쫓아 가다가 순식간에 죽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둡고 캄캄하고 목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하나님이 빛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죄인이 예수를 믿고 의인이 되고 천국 가는 길을 밝히 보여주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등대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취지 아니하면 우리 주위에 어둠에 있는 사람들이 다 지옥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두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항상 빛을 전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길을 안내하고 진리를 말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마5:16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를 보고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망의 어두움에 빛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망이 너무나 많습니다. 재앙이 너무나 많고 고통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빛을 전하는 희망의 전도자인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그 안에서 용서와 의로움이 있다. 예수를 바라보라. 세상과 마귀에서 해방되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이 있다. 예수를 쳐다보라. 치료와 건강이 그 속에 있다. 예수를 바라보라.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도 그 속에 있다. 예수를 바라보라. 그 속에 부활, 영생, 천국이 있다. 예수님 안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길이 있다. 희망을 주는 전도자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빛은 바로 어두움에서 길을 밝혀주는 것인데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여 절망적인 사람에게 환한 희망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 빛인 것입니다. 우리가 빛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희망의 메신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골1:13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하시고 요일 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앞에 나오면 어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압니다. 희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압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길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빛이라는 것은 죽음 건너편을 비취는 빛입니다. 누가 죽음 건너편을 비췹니까? 사람은 죽으면서 종결입니다. 끝입니다. 모든 삶이 여기에서 END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건너편을 비췹니다. 요단강 건너편 그리스도의 세우신 나라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손으로 짓지 않는 영원한 집이 저곳에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죽임을 당할지라도 우리를 위해서 있을 곳을 예비하신 우리 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서 죽은 저 건너편에 우리가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달이 아무리 비춰도 달을 쳐다보지 못한 사람에게 달을 보라고 가르치는 손가락과 같은 것입니다.
벧전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죽음 건너편에 영생이 있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여러분의 빛이 된 사명인 것입니다.
계22:5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비추는 것이 우리 빛 된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복을 받고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시는 삶은 참으로 영원히 복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뿐 아니라 영원 천국까지 복으로 넘치는 삶을 여러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여, 주님께서 팔복 산에서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시고 이 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가 팔복을 생각하고 마음속에 음미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므로 정말 소금과 빛이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는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소금도 되지 못하고 빛도 되지 못했습니다. 부패하는데 함께 섞여서 썩어가고 어두운 가운데 함께 섞여서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는 우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 이 시간에 우리를 돌이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고 변화 받아 참으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소금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를 빛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도와 주시옵시고 역할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도록 보혜사 성령이여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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