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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누가복음 궁극이............... 조회 수 347 추천 수 0 2021.04.14 10: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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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9:37-43 
설교자 : 김경형목사 
참고 : 궁극교회 주일예배 

937-43: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쌔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이제 장면 상황이 바뀐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은 산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산기도 하면서 신비스런 장면을 보고서 내려와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구원의 주님을 만나는 것은 꼭 산에서 만나야 된다는 법은 없다. 여기서 산이란 주님을 오롯이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높은 경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방 종교인들은 선악과 먹은 자기 기준에서 정신수양을 하다가 무엇을 보았다거나 신비스런 어떤 체험을 했다면 그런 것을 신성시해서 도를 설파한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알려주고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살면 하나님의 고상한 성품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는 신의 능력의 사람으로 실력화된 것만큼 신령천국에서 누림성이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세상에 있는 이방사람이나 이방우상의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제 주님이 세 제자와 함께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니까 소란스런 큰 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온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

 

38-39: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내 외아들이니 고쳐달라는 이 말 속에 이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희망이 걸려있고, 소망이 걸려있고, 큰 기대감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한 인생이 나그네로 살다가 가는 보람이 이 아들에게 들어있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아들이겠느냐?

 

그런데 아들자식이던 딸자식이던 귀신이 들어놓으면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 그 자체이다. 귀신에게 붙들리게 되면 아무 곳에서나 경련을 일으켜 넘어지게 하고,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지고, 거품을 뿜어내면서 한참 동안 푸드덕 푸드덕 하는데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 놓고 나서야 겨우 떠나간다. 아주 떠나가면 좋겠는데 이 귀신이 심심하면 와서 그렇게 한다.

 

사람이 늘 그렇게 되면 얼굴은 핏기도 없어지고, 눈동자는 흐릿하고, 얼굴은 땅에 비벼져서 상처가 나서 있고, 아무 데고 사람을 넘어지게 하니까 머리는 터져서 피가 말라서 머리카락이 서로 엉켜있고, 머리에는 솥 구멍을 때운 것처럼 여기저기 상처가 많다. 늘 눈의 동공이 풀어져 있고, 늘 잠이 부족한 사람처럼 멍하다. 길가에 앉아있고, 친구도 없다. 이런 자식을 보는 다른 부모들은 무엇을 생각을 할까?

 

보통 자기 자식 자랑을 어느 때 잘 하느냐? 보통 때도 잘 하지만 더 잘 할 때는 세상 명절 때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눌 때, 그리고 자식들의 혼기가 찼을 때 부모의 위세를 세우고자 자식 자랑을 잔뜩 늘어놓는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직장 좋고, 집이 있고,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인물 좋으면 그 부모는 은근히 자랑하고 큰소리를 친다. 다른 부모들도 그런 자식을 은근히 부러워한다. 반대로 돈 못 벌고 놀고 있거나, 사회적 직위가 낮거나, 애를 먹이거나 하면 자기 자식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 부모의 체면, 자식의 체면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안 한다.

 

예수 믿는 가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식이 교회에 잘 다니면 부모의 마음이 밝아 보이고, 게을리 나오면 부모의 근심걱정이 되고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영적 신앙 면에서 자식이 머릿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정신작용을 하고 있는 건지 그 면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한다.

 

자식의 머릿속에서 신비적 체험적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구복적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사회 체험적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은둔주의적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초절주의적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극기 극복적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제 마음대로 하고픈 색체를 띠고 있는 건지?

 

머릿속에서 그 정신이 어떻게 굴러가나?’ 하는 그 면에서는 부모들이 생각을 잘 못하고 생각을 잘 안 한다. 그래서 자식이 지금 어떤 색채를 띤 영에 붙들려서 무엇이 머릿속에서 슬슬 커지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에 잘 나오고 열심히만 하면 신앙이 참 좋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머릿속에는 벌레가 일고 있기 때문에.

 

성경 본문에서는 아버지의 체면이고 자식의 체면이고 체면을 차릴 것 없이 외아들의 중한 병을 예수님께 숨김없이 그대로 큰소리로 말씀을 드렸다. 사실 무리들과 모든 이웃사람들은 이 아들이 귀신이 들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먼저 다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계실 때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을 안 따라가고 산 밑에서 귀신들린 외독자 아들에게 안수해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씨름을 했을 테니까.

 

이 아홉 제자가 예수님을 안 따라가고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놓고 안수를 안 했겠느냐? 돌아가며 합심기도도 하고, 대표기도도 하고, 안수도 돌아가면서도 했을 것이다. 귀신을 내어 쫓으려고 별별 수단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외독자 아들에게 귀신이 들어갔을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를 많이 붙여야 한다. 외독자 아들이니 아버지가 얼마나 잘 가르치고, 좋은 것을 먹이고, 자식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며 애지중지 길렀을 것이다. 매를 한 번이라고 댔을까? 꾸중을 한 번이라도 했을까? 자식을 그렇게 키우는 부모가 많다.

 

오늘날 부모들이 자식사랑에 눈이 어두워서 자기 자식이 무엇이든 다 잘하는 줄로만 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가면 12등이 없이 모두가 다 잘한다. 하지만 사람교육이 안 돼서 말하자면 버릇이 없는 자식이 많다.

 

귀신이 들어가는 것은 돈 많은 부자나 돈 없는 가난뱅이나, 남자이던 여자이던 나이에 관계없이 들어간다. 귀신이 들어가는 것은 정신과 성격과 성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어릴 때부터 성경을 가르치라고 하는 거다. 딴 생각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 전에, 귀신들리는 짓을 하기 전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잘 다듬어지도록 하라. 여기는 꾸중도 들어가기도 하고 체벌도 들어가기도 하는 거다.

 

어린아이도 아담의 타락된 유전 죄를 물려받은 고로 누가 안 가르쳐줘도 어릴 때부터 젖이 안 나오면 엄마 젖을 확 깨문다. 안 가르쳐줘도 이상하게 심술궂고 나쁜 짓은 잘 한다. 이런 것을 어릴 때부터 슬슬 잡아줘야 한다. 어릴 때는 말귀는 못 알아들어도, 말은 할 줄은 몰라도 사람인고로 느낌은 갖고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게 야단을 크게 세게 치면 그만 울어버린다. 그러니 그럴 때가 되면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듬어지지 못하면 귀신이 들어갈 수 있는 성분으로 돼 있다. 귀신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리이다. 질이 그렇게 되어진다.

 

우리 모두 인간 나는 영육 결합체로 이뤄진 존재다. 영은 신령한 존재라서 신령세계에 들어갈 존재요, 육신은 물질계에 속한 것이라서 자타의 이룰구원의 병기로 쓰일 몸이다. 그런데 세상 것이 자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사람은 귀신의 장난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고속도로처럼 길이 열린다. 이러면 그 사람에게 신경이 예민해지는 사건이 하나 생기면 고쳐지지 못하고 다듬어지지 못한 그 성질이 올라와서 자기의 체면이 구겨지던 말던 일을 저질러 놓게 되고, 결국은 얼굴을 들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아예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외아들에게 왜 귀신이 들어갔을까? 이 아이는 아마도 10세에서 15세가 되는 듯한데 이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이라고 불렀을까? 부르는 것으로 본다면 외독자 아버지가 예수님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예수님을 주여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또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하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왜 여기서 선생님이라고 불렀을까?

 

보통 선생님하는 말의 의미는 가르치는 교육자보고 말한다. 그런데 그냥 부르기 좋게 선생님이라고 부른 건가? 그 말의 의미가 우리 아들을 내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잘못 길렀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아들을 좀 봐 주십시오. 보시고 고쳐주십시오.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의미가 다 들어있다.

 

“‘선생님하는 그 말 한 마디 속에서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 하고 계시적으로 터득을 해 보는 거다. 신앙 사상적 영의 눈으로 보면 아버지가 외독자 아들에게 귀신이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세상교육만 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참 인간교육은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 바로 된 데서 공부가 되면 그 공부가 빛이 나겠는데 사람이 안 된 데서 공부를 하게 되면 그 공부가 칼이 돼서 나쁜 짓은 다 해 먹는다. 왜 그런 건지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런 건 모르고 돈만 많이 벌고 높이 앉아있으면 그걸 높이 쳐다본다. 높이 쳐다보는 그 눈도, 그 정신 사상도 귀신들린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허락이 되면 귀신이 그냥 들어가 버린다.

 

자녀들에게 하는 교육이 또는 목사님들의 교육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참 교육이 아니면 사람이 바로 못 된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바로 되는 교육의 중요성은 모르고 거의가 세상 부요성에 소원성이 들어있다. 자기의 목적달성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확신이 생기면 기회를 놓칠 새라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말하자면 죽을 줄도 모르고 덤벼든다.

 

40-43: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보고 내려오는 동안 산 아래서는 아홉 제자가 더러운 귀신들린 외독자 아들을 낫게 하느라고 믿사오니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안수를 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 41절의 말씀은 누구들을 보고 하는 말씀인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하심은 누구들을 보고 하는 말씀이냐? ‘세대여라고 하심은 그 시대 그 당시의 사람만이 아니라 그런 종류의 믿음을 가진 창세 이후 세상 마지막까지 모든 사람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계시적으로 그렇게 들어가는 거다. 거기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종류의 정신 사상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에 들어가는 거다.

 

믿음이 없고하는 거기에 아홉 제자들이 믿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없었다. 자기 기준에서 제자들보고 믿음 있네. 없네그렇게 묻는 게 아니라 성경대로 보면 그렇다. 그러면 외독자 아들의 아버지는 믿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없었다. 그러면 무리들은 믿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없었다. 그러니까 모두가 믿음이 없었다.

 

그러면 무슨 믿음이 없었느냐? 인간이 타락을 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타락한 것이냐, 생명과를 안 먹었기 때문에 타락한 것이냐? 생명과를 안 먹으면 필연적으로 선악과를 먹게 된다. 사람은 먹는 존재다. 사람으로 났다 하면 생명과가 아니면 선악과를 먹게 돼 있다. 그런데 보통 보면 아담과 하와가 왜 생명과를 안 먹었을까?’ 하는 그 쪽보다는 왜 선악과를 먹었나?’를 많이 생각을 한다.

 

그러면 아홉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했는데, 아홉 제자들이 그 아이를 못 고쳤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믿음이 없다는 것이냐? 아홉 제자들이 그 아이를 고치려고 하는 그 마음 심보보다 말하자면 그 아이를 누구에게 데리고 와야 하는 것이냐?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야 그게 믿음이다. 그런데 아홉 제자는 그러지 않았고, 지금 교회도 안 그렇다. 병자가 교회에 오면 서로 안수해서 낫게 하겠다고 하니 그게 믿음이냐?

 

보혜사 성령님은 지금도 교회에 계시느냐? 그 때만 말씀하시고 떠나버렸느냐? 지금 우리의 눈에 예수님은 안 보여도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는 있는 거다. 성령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한다. 나에게 말씀의 깨달음이 들어온다면 이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다. 성령님의 역사는 목사님의 설교가 좋다. 나쁘다거기에 매인 게 아니라, 물론 목사님의 설교가 본질로 들어가 있으면 역사는 성령님이 하신다.

 

아홉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산에 계신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야 했다. 도의 봉우리로 데리고 올라가야 했다. 아이의 아버지도 산으로 올라가기 힘들어도 아이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올라가야 했다. 무리들도 합심하여 예수님을 찾아야 그게 믿음이다.

 

사람이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중요성은 자기 속의 신앙의 향방이다. 자기 정신에 의해서 자기 일생의 노선이 좌우된다. 자기 삶이 좌우된다. 잘못 예수 믿고 잘못 생각하고 이상한 데 가서 이상한 짓이나 하면 자기의 평생을 망치는 거고 가정파괴가 되고 만다. 왜 그렇게 되느냐? 정신이 바로 못 들어가고 거짓 것들에게 휘말려서이다.

 

그런데 아이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제자들이 고쳐주겠거니하고 아이를 아홉 제자에게 맡겼을 것이고, 무리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를 제자들에게 인도했을 것 같다. 오늘날 교회가 하는 꼴을 보니 그렇다. 지금처럼 말을 한다면 제자들 역시 오늘날 거짓 목사들이 하듯이 모든 병자들은 다 나에게 오라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런 건방진 목사가 많다. 이건 자기가 하나님이 돼 있는 거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들 중에 하늘나라를 볼 자도 있으리라한 그 말씀이 뭘 의미하는지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인데 아홉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서 산으로 올라가지 않은 걸 보니 그걸 무시한 걸로 보여진다. 아무렴 열두 제자 모두가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아홉 제자에게는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 산 밑으로 차버렸겠느냐?

 

예수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지 않은 아홉 제자들은 산 아래서 예수님이 안 계신 틈에 우리도 병자 한 번 고쳐보자하는 마음이 들어갔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냈을 때 그들이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한 경험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능력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주님이 빼앗아 가면 그렇게 못 하는 거다. 그런데 아홉 제자들은 이미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 그게 그만 자기들이 실력이 있어서 그렇게 했던 것으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홉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어 쫓는 걸 봤으니 귀신들린 아이를 붙잡고 그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을 주님이 더 잘 아신다. 그래서 아마 아홉 제자들에게서 그런 능력을 거둬 가신 것 같다.

 

아홉 제자가 더러운 귀신이 들린 아이를 빙 둘러싸고 너 몇 살이냐? 너 어디서 왔느냐? 언제부터 귀신이 들어갔느냐?’ 하고 물은 뒤에 귀신에게 썩 나가거라하니까 귀신이 안 나가련다하며 귀신들린 아이가 힐힐 웃는다. 아홉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에게 안수를 하려고 하니까 그 아이가 아홉 제자들의 손을 탁 치고 이리저리 피하며 귀신들린 아이가 오히려 제자들에게 안수를 하려고 하니 실랑이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아홉 제자들이 , 이것 봐라?’ 하면서 귀신들린 아이에게 떼로 달려드니 귀신들린 아이가 예수의 제자들이 사람을 죽인다고 소리를 친다. 그러니까 이제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의 놀림감이 됐다. 위치가 바껴져 버렸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안 계셨다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되신 예수가 없는 기도라는 의미요, 이것이 없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요, 하나님의 온전에 대한 구원이 아닌 곳엔 예수님은 안 계심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아홉이나 되는데 그곳에 예수가 없다. 구원이 없다. 사람의 온전이 없다.

 

패역한 세대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이룰구원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시려고 그 사건을 주심인데 패역자들은 그것을 육신을 위해 주신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그 증거는 오늘날 육신의 모든 병자를 불러들여서 예수이름으로 고쳐주겠다고 주장을 하고 장담을 하고 떠들더라. 이게 패역한 짓이다.

 

주님께서는 영인성장을 위해서 영 잘 되라고 하는 건데 자기는 속은 마귀속이 되어서 육신의 병을 고치겠다고 하니 그렇게 해서 고치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이 더 악해진다. 어떻게 더 악해지느냐? 그런 사람들이 병 나았다고 간증하며 돌아다니는 것이 참 악한 것이다. 사람을 깨닫게 하기는커녕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리는 장면이다.

 

그러면 병은 꼭 안수를 해야 만이 낫는 것이냐? 안수를 안 하면 안 낫는 것이냐? 그러니 산 밑의 아홉 제자와 같은 그런 발상 그런 사람들은 패역한 세대 중에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팔일 전에 너희들 중에 하늘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다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에게 그 장면을 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아홉 제자들에게는 스스로가 안 볼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주님은 아신다. 말하자면 이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을 볼 욕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안 계실 때 자기들이 병을 고쳐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졌으니 이게 어떻게 믿음이냐? 그리고 육신의 개념으로 병자를 고쳤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에서 보면 믿음이 아닌 패역이다.

 

이런 자들은 신앙 사상적인 면에서 교훈적으로 보면 사람을 진리 생명적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하고 세상 쪽으로 더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니 결국은 하나님과는 더 악화가 되고 마는 것이다.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에 욕심이 없다는 것이고,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못 봐주겠구나.

 

네 아들을 이리로 데려오라.’ 누구 앞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구원이신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오라. 이제 이 성경을 볼 때 무엇이 믿음인지 계시적으로 알겠느냐? 안수해 주는 사람 앞으로 데려가야 하는 것이냐? 주님 앞으로 즉, 주님의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갖게 하는 게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거다. 신앙 믿음의 이치를 어기게 되면 패역한 세대 중에 자기가 들어간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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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1 요한복음 영광을 얻을 때 요12:20-33  강승호목사  2021-03-17 202
17070 누가복음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9:29  김경형목사  2021-03-17 195
17069 마태복음 죽음 그리고 나 (사순절) 마25:1-13  김기성 목사  2021-03-16 361
17068 창세기 나뭇잎 치마와 가죽옷(사순절 설교) 창세기 1:26; 3:1-7,21절  서한수 목사  2021-03-16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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