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예슈아로 말미암은 성령의 약속

갈라디아 류공석 목사............... 조회 수 460 추천 수 0 2016.05.13 23:57:30
.........
성경본문 : 갈3:15-25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예슈아로 말미암은 성령의 약속"
2011년 6월 11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갈라디아서 3:15-25 (갈라디아서 강해 11)

   유대교 문헌 중에 피르케이 아봇이라는 책이 있다. 주후 220년경에 편찬된 유대교 최초의 성문법인 미쉬나 4부에 수록되어 있는데, 선조(조상)들의 어록이란 뜻으로, 주전 300여년부터 주후 200년까지 60여명의 유대교 현자들이 남긴 교훈을 모은 책이다. 지금도 많이 읽혀지고 있고 회당에서 낭독되기에 별로의 책으로 출간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세상은 세 가지 위에 서 있다. 토라 위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비를 한껏 행하는 일에’

  그리고 피르케이 아봇 서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세에 한몫을 갖는다.’

  이 두 가지는 바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 유대교의 율법관에 대해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세상은 세 가지 위에 서 있다, 즉 세상을 떠받드는 기초가 셋이라는 말인데, 그 중에 첫째가 바로 토라라는 것이다.

  물론 토라가 무엇이냐라고 했을 때는, 율법 조항을 의미하기도 하고 모세 오경을 말하기도 하고 성경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가장 광의적인 의미로는 사회 규범과 종교관습을 총괄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토라를 단순히 율법으로 번역하기에는 그 개념이 넓다. 피르케이 아봇에서 토라는 율법이나 성경(구약성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읽어보면 율법을 지키고 연구하는 것을 많이 강조하기에 율법으로 읽을 수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토라 역시 율법 조항을 말한다. 유대교 랍비들은 토라, 즉 율법이 세상을 받치는 기초 중에 첫째이고, 이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세에서 한몫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율법을 구원의 조건을 말하는 내용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데서 온 잘못이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세상을 떠받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 둘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셋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면 맞다. 유대교에서는 세상을 떠받드는 것이 토라, 율법이라고 하지만 세상을 떠받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일 뿐이다.

  즉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을 준수함으로 내세에서 한몫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은혜이다. 바로 이신칭의의 은혜이다.

  아브라함이 그 예이다. 이미 지난주에 나누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그가 온전히 믿었기에 그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신 것이다. 할례가 먼저가 아니고 믿음이 먼저이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15절에서 바울은 이 언약이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음을 사람들 간의 언약과 비교하고 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약속을 밥 먹듯이 바꾸는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에게는 해당되는 말이 아니겠지만, 이 말은 당시 근동문화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 간의 약속을 말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사람들 간의 중요한 약속을 맺을 때는 짐승을 반으로 잘라서 양쪽에 놓고 그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지나가면서 계약의 내용을 선포했다.

  이 계약은 짐승을 반으로 쪼갰기에 다시 붙일 수 없는 것처럼 그 내용을 바꿀 수 없으며, 그 계약을 어길 시에는 짐승이 반으로 쪼개진 것처럼 그러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계약을 맺었다.

  조금은 섬뜩한 계약의식인데, 그만큼 계약은 성실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장면이 창세기에 나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계약을 체결할 때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하셨다. 이는 당시 고대 근동의 계약 문화에 익숙한 아브라함을 배려해서 아브라함이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 하신 것이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계약을 염두에 두고 1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맺은 언약도 이처럼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맺은 언약을 그 누가, 그 무엇이 폐하거나 더하거나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할례와 율법을 통해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고 의롭게 된다고 하지만, 만일 그 주장이 맞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폐하는 것과 같은 주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폐하거나 더하거나 할 수 없으며 율법과 상관없이 영원히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 것이다. 즉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까지도 복을 받는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둘 다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범세계적인 믿음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 언약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16절을 보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약속들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다. 바울은 여기서 강조하기를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자손’이라고 했다. 여러 후손이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을 통해서 이 약속들이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한 사람 자손이 누구인가? 바로 그리스도시다.

  여기서 번역된 자손을 히브리어로 하면 ‘제라’(זרע)이다. 씨, 씨앗이란 뜻이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읽을 수 있다. 유대교에서 씨를 뜻하는 ‘제라’는 메시아를 지칭하는 이름 중에 하나다. 바울은 지금 이러한 유대교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유대교 문헌에는 메시아를 통해 언약이 이루어질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만 그들은 그 언약의 범위를 유대인들에게만 국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으로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언약의 범위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언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슈아를 믿음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고, 함께 언약 백성이 되고,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며 섭리시다.

  그러기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구주로 믿어야 한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예슈아를 믿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여겨주시고, 아브라함의 후손, 언약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생명과 의를 베푸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하시고, 더불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유대인 선교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믿음으로써만 유대인 역시 진정한 언약 백성이 될 수 있고 생명과 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슈아를 통해 구원받은 이방인들과 함께 한 새 사람임을 확인하고 함께 새 이스라엘, 새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거듭해서 말하고 있다. 할례를 통해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통해 생명과 의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생명과 의를 받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보다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것임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와 그 율법의 효력이 언제까지인지를 말하고 있다. 19절을 보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을 왜 주어졌는가? 범법하므로 더하여 진 것이다. 율법 역시 하나님의 계시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그 자체는 선하고 거룩하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의 한 부분이기에 죄를 비추어 드러나게 하고 들추어낸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무엇이 죄인지 조차도 몰랐으나 율법이 주어짐으로 죄가 드러나고 들추어진다. 또한 율법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이 죄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삼가도록 하는데 있다. 또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을 행하지 않을 때 죄인이 된다. 율법을 다 행하였다 하여도 그것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범법하므로 주어졌고, 율법을 통해 더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셨다고 했다. 이는 유대교 전승에 따른 것인데,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천사들이 그 율법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난 주중에 샤부옷, 즉 칠칠절, 오순절이 있었는데, 유대교에서는 첫 곡식, 즉 봄밀을 수확하는 맥추절이면서 동시에 이 날을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로 기념하고 있다.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천사들이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유대교 전승을 사도 바울이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언약의 경우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인 반면에 율법은 천사를 통해 한 중보자, 즉 모세를 통해 주신 것이기에 율법은 언약에 비해 열등하고 간접적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약이 율법보다 앞섬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율법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율법은 유효한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이다. 약속하신 자손은 메시아를 뜻한다. 메시아가 오시기전까지 율법은 유효하다는 것이다.

  유대교 내에 보면 율법의 효력에 대한 견해가 있다. 일부에서는 율법은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이 견해는 유대교 미드라쉬 등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 전에 토라, 율법을 만드셨다고 랍비들의 해석에 따른 것으로, 율법은 선재했고 그래서 그 효력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유대교 다른 한편에서는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면 율법의 시대는 끝난다고 말한다. 메시아가 오시기까지만 율법은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후자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율법의 효력이 메시아가 오시기까지로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율법의 효력은 생명과 의를 주는 효력이 아니다. 21절 하반절에서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만일’이라는 말을 쓴 까닭은 율법이 살게 하는 율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율법이 살게 하는 율법, 즉 구원의 생명을 주는 것이었다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율법의 효력은 생명과 의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은 생명과 의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율법은 단지 죄를 지적하고 드러나게 하는 효력이며, 그 율법 아래에서는 누구나 죄인이 되는 저주의 효력이다. 안 지키면 그 자체로 죄인이고, 지켜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고 지킨다한들 그 자체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율법이다.

  또한 율법으로 인해 이방인들 역시 저주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 효력이 이제는 메시아이신 예슈아의 십자가 보혈로 끝났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8:1-2에서 감격적인 어조로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메시아이신 예슈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에 우리가 그 정죄 아래 놓이지만 예슈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 보혈로 말미암아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슈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고, 참된 복음이고 이 복음을 붙잡는 사람들이 되라는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세계 역사를 삼단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혼돈의 시대, 율법의 시대, 메시아 시대로 구분하는데, 만일 바울이 이러한 유대교적인 견해를 반영했다고 한다면, 이제 율법의 시대는 지났고, 메시아의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시대는 율법의 행위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은혜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과 같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역성경에는 몽학선생으로, 개역개정에는 초등교사로 번역되어 있다. 둘 다 그리 정확한 의미를 전달해주는 번역은 아니다.

  이 단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선생이 아니다. 이 사람들은 보통 노예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주인의 어린 자녀들을 교육하는 일을 맡은 것이 아니라 보호하고 훈계하고 통제하는 일을 맡았다. 예를 들어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이나 사고나 불량배들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이것이 몽학선생, 또는 초등교사로 번역된 단어의 의미인데, 율법의 기능이 바로 이것에서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준비를 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저주 아래 있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율법에 열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열심은 그를 의롭게 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다. 율법의 열심이라 생각하여 예슈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막는 심각한 죄악이었던 것이다. 율법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이러한 결과에 다다른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단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에 불과하며,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는 더 이상 그 아래 있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논지는 아주 분명하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그 개념 자체가 생소해서 어렵게 느껴지지만 논지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다. 우리에게 생명과 의를 주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들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약속을 14절에서 ‘성령의 약속’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곧 성령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왜 성령의 약속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약속이었고,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슈아를 메시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임한 사건이 있다. 무엇인가?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

  샤브옷 때 성령께서 강림하셨는데, 이는 갑작스런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약속이고, 요엘서 등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하신 약속이다. 그날에, 즉 메시아께서 오실 때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왜? 메시아께서 오실 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가?

  첫째는 예슈아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한 몸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에베소서 2:14-18을 보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기 때문에 알 것이다. 이 둘은 원수였는데 하나님의 뜻은 예슈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슈아께서 샬롬이 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했는데, 이는 율법이 폐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유대인도 이방인도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서로 원수가 되는 그러한 율법의 저주를 폐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십자가로 이 둘, 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슈아께서 하신 일인데, 이 일을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이다.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로 말미암아, 예슈아로 말미암아 우리 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이시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예슈아를 믿는 성도들이 하나가 되었다. 성령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다. 예슈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예슈아 안에서 성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다. 그래서 성령의 약속이라고 한 것이다.

  내일 나사렛에서 국제기도의 날 행사가 열린다. 메시아닉 유대인들과 아랍 크리스천들과 외국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행사이다. 서로 손을 잡고, 부둥켜안으면서 기도하며 한 몸, 한 지체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과 모든 이방인들이 예슈아 안에서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슈아 안에서 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떤 사람들이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슈아를 믿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자이다. 용납하는 자이고 용서하는 사람이고 피스 메이커이다. 샬롬의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소망한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하나 되는 교회이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슈아 안에서 한 성령으로 하나 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길 소망하고, 특별히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두 번째 이유는 요엘 2:28-29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약속이다.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만민이라 하셨다. 이 말은 메시아께서 오시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인데, 이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왜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인가?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인데, 무슨 뜻인가? 무슨 점쟁이처럼 앞날을 맞추게 하기 위해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래 일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꿈과 이상은 하나님 나라의 꿈과 이상이다.

  예슈아를 그 가슴에 품은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빅뱅, 소녀시대, 이런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만 말하던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꿈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노인들도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젊은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상, 비전(חזון)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런 소망 없이 잔소리나 하고 청년들 책이나 잡는 노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열정 있는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청년들의 경우 젊지만 인생의 비전도 없이 이력서에 그저 스펙 하나 넣기 위해 대학가고 대학 다니고 취업하고, 폼생폼사, 폼 나게 살다 폼 나게 죽는 것이 인생의 꿈이 되는 그런 젊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비전으로 삼고 그 나라를 위해 인생을 거는 열정의 청년이 된다는 말이다.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들이 예슈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뿐만 아니라 성령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인생에서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인생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장차 누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며 이루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이고 그래서 성령의 약속이라 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면 꿈이 생긴다. 하나님 나라의 꿈이 생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게 된다. 성령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이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꿈꾸며 무엇을 구하며 사는지 말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이시다. 단순히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만족하면 안 된다. 성령 충만을 구하라.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열정의 사람, 비전의 사람,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사람이 되라.

  지난 주 제자훈련 때 자신의 기도생활에 있어 문제점에 대해 잠시 나누었다. 몇 분이 그랬다. 간절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솔직한 대답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많은 분들이 그렇진 않은가?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님은 믿는데 열정이 없다. 간절함이 부족하다. 사모함이 부족하지는 않은가? 간절함도 사모함도 열정도 부족하다면 우리의 신앙은 진보가 없다. 성장이 없다는 말이 된다.

  사모하라. 간절함을 가지고 구하라. 예수 믿는데 만족하지 말고, 더 좋은 것을 사모하라. 구하라.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셨다. 그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 성령이시다. 성령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다.

  성령을 사모하라. 간구하라. 성령 충만에 사모함을 가지고 구하라. 그래서 열정이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하나님 나라를 이상으로 삼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통해 사람들이 도전받고 변화되고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권한다. 예슈아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더욱 더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구하길 바란다. 그래서 예슈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는데 힘쓰는 사람이 되고,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꿈꾸고 이상으로 품을 수 있는 열정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사람들 다 되시기를 유대인과 이방인 우리 모두의 메시아이신 예슈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기도제목

1. 예슈아 안에서 성령의 약속을 받은 자로서 더욱 더 성령의 능력과 충만함을 사모하여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2. 예슈아 안에서 하나 되는데 힘쓰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우리 교회가 예슈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3. 예슈아 안에서 성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게 하소서.

4. 예슈아 안에서 성령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를 품게 하시고,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하고, 노인과 부모들이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고, 청년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갖게 하소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sort 조회 수
14302 누가복음 내게도 게네사렛 호수가의 일이 일어나야 한다 눅5:1-11  안창천 목사  2017-06-07 354
14301 누가복음 영광은 주님께 돌리고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눅5:12-16  안창천 목사  2017-06-07 315
14300 누가복음 중풍병의 치유를 통해 주의 음성을 듣다 눅5:17-26  안창천 목사  2017-06-07 315
14299 하박국 이런 것도 감사해보세요 합3:17-18  안창천 목사  2017-06-07 776
14298 누가복음 성령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눅6:1-11  안창천 목사  2017-06-07 410
14297 시편 하루 일곱 번씩 찬양 시119:164  강승호 목사  2017-06-07 484
14296 누가복음 예배,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눅2:40-52  안창천 목사  2017-06-05 477
14295 누가복음 주님께서 통치하시기에 합당한가요? 눅3:1-6  안창천 목사  2017-06-05 223
14294 누가복음 임박한 심판을 피해야 합니다 눅3:7-14  안창천 목사  2017-06-05 151
14293 누가복음 소망을 주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눅3:15-20  안창천 목사  2017-06-05 643
14292 누가복음 무엇을 구할 것인가 눅3:21-22  안창천 목사  2017-06-05 263
14291 누가복음 예수님의 족보로 주의 음성을 듣다 눅3:23-38  안창천 목사  2017-06-05 228
14290 누가복음 시험을 이기는 비법이 있습니다. 눅4:1-13  안창천 목사  2017-06-05 381
14289 누가복음 성령으로 제자 삼으라 눅4:14-15  안창천 목사  2017-06-05 245
14288 역대하 사죄 기도의 응답 대하6:29-30  강종수 목사  2017-06-04 193
14287 요한계시 두 가지 추수 계14:14-20  강종수 목사  2017-06-04 225
14286 열왕기하 진실한 신앙심 왕하5:9-19  지희수 목사  2017-06-04 314
14285 마태복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마12:38-45  김경형 목사  2017-06-04 367
14284 마태복음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를 받으리라. 마12:35-37  김경형 목사  2017-06-04 359
14283 고린도전 은사로 유익하게 하라 고전12:3-13  강승호 목사  2017-06-03 249
14282 사무엘하 하나님의 축복 여디디야 삼하12:7-25  전원준 목사  2017-06-03 670
14281 누가복음 마리아에게 믿음을 배운다 눅1:26-38  안창천 목사  2017-06-02 296
14280 누가복음 말씀이 믿음을 키웁니다 눅1:39-56  안창천 목사  2017-06-02 390
14279 사도행전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십니까 행5:42  안창천 목사  2017-06-02 353
14278 누가복음 엘리사벳에게 통큰 믿음을 배운다 눅1:57-66  안창천 목사  2017-06-02 293
14277 누가복음 구원에 관해 좀 더 알아야 합니다 눅1:67~80  안창천 목사  2017-06-02 204
14276 누가복음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다 눅2:1-20  안창천 목사  2017-06-02 383
14275 누가복음 할례와 정결예식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다 눅2:21-24  안창천 목사  2017-06-02 549
14274 누가복음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합시다 눅2:25-35  안창천 목사  2017-06-02 296
14273 출애굽기 위기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출15:22-27  안창천 목사  2017-06-01 422
14272 사무엘상 다윗에게 승리의 비법을 배운다 삼상17:38-49  안창천 목사  2017-06-01 623
14271 룻기 축복은 회개와 순종과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룻4:12-22  안창천 목사  2017-06-01 381
14270 히브리서 주님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9:27  안창천 목사  2017-06-01 324
14269 베드로전 고난 주간에 좋은 고난을 선택하다 벧전2:19-21  안창천 목사  2017-06-01 739
14268 마태복음 부활절에 주님의 음성을 듣다 마28:1-10  안창천 목사  2017-06-01 396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