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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능력과 그 반열

마가복음 권진관............... 조회 수 3892 추천 수 0 2003.07.24 21: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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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5:32-34 
설교자 : 권진관 형제 
참고 : 새길교회 

"믿음의 능력과 그 반열"

성서 본문: 마가복음서 5:32~34, 히브리서 12:12~13

 

오늘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저의 오늘의 말씀도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일찍이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면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믿음은 결국 사랑을 낳는 것이며, 또한 믿음은 소망 가운데에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은 서로 다르지만 삼위일체와 같이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믿음은 소망과 사랑을 포괄합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소망도 믿음과 사랑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깊이와 관련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러한 깊이에서 나와야 진정한 것이라고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주장했던 것입니다. 즉 사랑은 자신을 믿음에서 나오는 자기애가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궁극적인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존경받았던 신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폴 틸리히는 믿음을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Faith is a state of being ultimately concerned. 유대인들에게 궁극적으로 관심이 있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질문명 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마도 사회적 지위, 명예, 경제적 지위 등에서의 성공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궁극적인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전체적인 인격은 결정될 것입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관심을 가진 상태는 우리들의 일상적이고 제한적인 삶의 한계를 초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마가 복음서 5장에서는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온 사람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사건이 나옵니다. 옷을 잡았더니 예수로부터 능력이 나오고 여자의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여자의 몸이 낫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12년간"이라는 세월은 긴 시간을 말합니다. 12라는 숫자를 자주 쓰는데, 그것은 완전 숫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12를 유지하려고 했는데, 유다가 배반하고 죽고 난 후 12 제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마띠아를 새로 제자로 뽑은 것이라든가, 이스라엘의 12 지파 중에 레위 지파가 없어지니까 이전에는 분리되지 않았던 요셉 지파에 속했던 에브라임 지파와 므나세 지파가 각각 지파로 인정되어 12를 채웠던 것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1년을 12달로 나눈 것도 여기에 무관할 수 없습니다. 12는 기간적으로 꽉 채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여자는 그야말로 긴 12년을 혈루병으로 고생했던 것입니다. 이제 더 보탤 수 없는 고생의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병 때문에 이 여자는 천대를 받았습니다. 유대 땅에서는 여자가 월경을 하면 더럽다고 했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사람은 항상 더러운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것입니다. 이 혈루병은 여인에게는 해방되어야 할 질곡, 감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때 그녀가 발휘한 결단은 언뜻 보기에는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인물 예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기만 하면 나의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나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 여인은 분명히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녀가 한 행위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시고 누가 자신의 옷을 만졌는가 찾았습니다. 이 여인은 두려워 떨면서 예수께 나와 엎드려 사실대로 고했습니다. 두려워 떨었다는 것, 그리고 엎드렸다는 것은 이 여인이 그 사회 속에서 얼마나 천대를 많이 받았던 약자였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제 안심하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병에서 건강해 진다는 것은 이 여인에게는 둘도 없는 기쁨이며 해방이고,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는 구원을 저 세상적인 것, 초월적인 것으로 말하지 않으며, 현세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의 현재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초월시켜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과 연결된 말로 무아지경을 일컫는 ecstasy라는 말이 있는 데, 이것은 standing outside of oneself를 의미합니다. ec는 밖으로 라는 뜻이고, stasy는 stare라고 하는 stand 즉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의 바깥에 서다라는 의미를 가진 엑스타시는 결국 현재의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버리고 그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온갖 감옥과 같은 것을 깨고 나오는 것을 엑스타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 동안에 필리핀에 갔었는데, 한군데 특히 기억 남는 곳은 마닐라의 파야타스(Payatas)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이 지역에 대해서 들었었지만, 이번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원래 파야타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집단 이주했던 곳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이곳에 마닐라의 쓰레기를 모아놓기 시작했습니다. 약 2년전 이 산처럼 쌓였던 쓰레기 더미가 무너져서 여러 사람이 죽은 일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냄새가 진동하고 불결한 쓰레기 산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많은 집이 있고 가게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장사도 하고 거래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지옥과 같은 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만 직장이 없고 돈이 없어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의 삶은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건 일정한 감옥 속에 갇혀있는 삶입니다. 진짜 서울 구치소와 같은 감옥은 좁은 공간의 감옥일 뿐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좀 넓은 감옥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여행이라도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잠시동안이나마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좋은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감옥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정도가 지나치기는 하지만 성서의 그 여인이 오랜 동안 혈루병이라고 하는 테두리 속에 갇혀서 온갖 고통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어떤 테두리에 갇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히브리서도 읽었습니다마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관한 부분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서 나열된 사람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 고난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 중요할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11장 속에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믿음을 특별히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둘러싼 테두리를 벗고 새로운 땅으로 나아간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노예 생활의 감옥의 문을 박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온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현실의 테두리를 부수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테두리로부터 엑스타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엑스타시의 경험은 무아의 황홀한 감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갇혀 있는 곳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해방되어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위요,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필리핀의 부자동네를 잠시 가보았습니다. 집들이 넓어서 어떤 것은 3-4천 평은 족히 될 것 같은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앞에는 도로가 있는데, 도로에는 많은 매연을 내뿜는 디젤 삼륜차, 사륜차들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매연 때문에 우리는 코를 막을 정도인데, 부자들은 넓은 땅에 많은 수목이 우거진 깊숙한 곳에 집을 지어놓고 좋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었습니다. 대문 밖과 대문 안은 천지차이입니다. 대문 밖 길거리는 매연으로 숨쉬기가 어려운데, 대문 안에는 숲이 우거진 정원 같은 집이 있습니다. 이들도 이러한 감옥 속에 갇혀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은 욕심의 감옥 속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빈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모두 감옥 속에 갇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자의 집이 넓을수록 그들의 마음의 집은 좁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안방 드라마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의 대부분은 계급의 관점에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이 드라마의 경우는 더욱 지나치게 사회적 계급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은 대학을 못나온 사람으로서 미장원의 미용사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훤칠한 젊은 의사가 좋아합니다. 이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는 사회적인 격차가 이 여자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둘을 떼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그 남자는 의사야 의사, 그런 사람과 연애하고 만난다는 게 가능한 일이야?" 오늘날 결혼 시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회적 계급에 적합하게 짝짓기를 하는 세상 속에서 이 드라마는 이러한 통속을 깨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노력이 우리 사회의 냄새나는 곳을 건드리는 것 같아서 민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은 저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단단히 결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사회의 통속이라는 감옥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통속과 사회적 테두리를 인간적 조건, 즉 human condition이라고 해서 인간이면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조건, 혹은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도의 4성제도라고 하는 카스트제도는 분명히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제도인데도 마치 인간조건인 것처럼 인간들을 얽매고 있습니다. 모든 구조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변할 수가 없는 것처럼 체제 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결국 믿음의 인간들에 의해서 타파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12년 간 혈루병을 앓은 사람이 자신의 굴레를 타파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 여인에게 믿음의 사람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을 믿음의 반열에 세웠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반열에 세웠습니다. 믿음의 역사에 주인공이 되게 한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주의도 타파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동안 그것은 타파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고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경제 교리들도 우리를 가두는 인간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어떤 면에서 끊임없는 해체를 수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구각을 벗어버리고 나오는 일련의 과정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 엑스타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출애굽 하는 것, 즉 엑소더스(Exodus)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을 향해 가는 것입니까? 믿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믿음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하는 질문으로 풀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믿기에 우리를 끊임없이 엑스타시하게 하고 엑소더스하게 합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기독교는 예수의 의도를 저버리고 예수를 믿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실제적인 선교 목적은 퇴색되고 예수의 인격에 대한 믿음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오신 목적을 기독교인들이 피해 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만 믿으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목적은 예수의 가르침, 즉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장벽과 감옥을 부수고 나아가서 도달해야 할 그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연결 고리가 끊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합니다. 그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결국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 우리를 작은 울타리에 가두어 놓는 모든 감옥들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해방은 인간의 욕망을 더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의 복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장 12-13절 봉독된 말씀처럼 우리도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힘없이 늘어진 손을 쳐들고 쇠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그리고 바른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절름거리는 다리도 뒤틀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될 것입니다. (공동번역)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우리 주위에 어떠한 첩첩산중의 어려움이 있다거나 우리가 그 앞에서 아무리 맥이 빠져 힘을 잃고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능력 안에서 떨쳐 일어나라고 우리를 독려해 준다. 실제로 이 말씀은 우리가 어려움을 이기고 일어나서 바른 길을 걸을 때, 즉 우리의 모든 하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일이 되고 그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할 때 아무리 힘들고 유혹에 빠지기 쉬울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꾸준히 걸어간다면 우리의 어려운 형편들이 오히려 나아질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자신을 버리고 높은 이상을 향해 헌신하며 지금 주어진 주위의 현실을 개혁해 나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살아남을 뿐 아니라, 그가 가진 어려움들이 오히려 잘 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진정, 우리의 그리스도와 그가 가르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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