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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46 추천 수 0 2017.03.02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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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16453 

jys.jpg복음

롬 1:1-7, 대림절 넷째 주일, 2016년 12월18일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마틴 루터는 『로마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경의 진정한 핵심이며,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그 내용을 낱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외울 정도로 숙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편지가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한 문서로 인정받아 신약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신약성경 중에서 복음서도 중요하고, 사도행전과 요한계시록도 중요하지만 로마서는 훨씬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유대인들을 뛰어넘어 세계 종교로 확장될 수 있는 신학적인 토대가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학적인 토대를 한 마디로 하면 ‘복음’의 보편적 성격입니다.


롬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방인 선교자로서의 소명을 복음에 근거지우고 있는 겁니다. 이어서 2절에서 그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서 마지막 대목인 16:24절에서 바울은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신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언급한 뒤에 이어서 25절에서 하나님이 ‘이 복음’으로 로마 기독교인들을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대목과 마치는 대목에서 ‘복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걸 보더라도 로마서가 복음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복음’의 새로운 해석


‘복음’이라는 단어가 바울 시대에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즉위한다거나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황제 숭배가 복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황제 흉상을 세워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머리를 숙이게 했습니다. 모두가 황제에게 집중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에 황제는 모든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만인지상의 인물로서 구원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에게 황제에 관한 소식이야말로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를 거부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배척했습한 것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황제 숭배라는 표현은 일단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매력적인 이념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자본 숭배를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총체적으로 자본 숭배에 의해서 굴러갑니다. 황제 숭배도 그와 같습니다.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절대 이념이었습니다. 로마 정치와 법과 군사와 문화와 예술은 모두 로마의 평화를 지향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체제에 적응해야만 출세할 수 있었고, 최소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 체제 안에서만 안정감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밀려나면 실제로 삶이 불편하기도 했고, 상실감과 소외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세상살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과감하게 황제 숭배를, 즉 로마 중심주의를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복음’이라는 바울의 주장은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로마서>는 불온문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문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를 읽고 싶어지지 않으시는지요?

 

어떤 사람들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큰 수술을 앞두거나 아주 중요한 시험을 앞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일 겁니다. 감옥에 갇혀서 출옥할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불임으로 힘들어하던 여자에게 임신 소식은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마 5장의 팔복에 나오는 사람들이 대표적입니다. 가난하고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혼이 갈급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기다림이야말로 복의 근원입니다. ‘그게 무슨 복의 근원이냐, 오히려 불행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인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현대는 그런 삶을 기피하고 두려워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기준에만 머물러 있어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좋은 삶의 조건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라서 팔복의 의미를 놓칩니다. 이런 것에 완전히 길들여지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받아들이기는 더더욱 어려울 겁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가난해지고 불의에 시달려야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에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사람들이 다 피하는 삶의 조건이 무조건 불행한 게 아닙니다. 2) 우리 모두는 언젠가 팔복에 해당되는 운명에 떨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누가 가난하지 않으며, 누가 외롭지 않겠습니까. 3) 지금 우리가 상대적인 삶의 조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절대적인 것에 영혼의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정채봉의 시 <오늘>을 읽겠습니다. ‘꽃밭을 그냥 지나쳐 왔네/ 새소리에 무심히 응대하지 않았네/ 밤하늘의 별들을 세어보지 않았네/ 친구의 신발을 챙겨주지 못했네/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은 시간이 있었네/ 오늘도 내가 나를 슬프게 했네’ 이 시인에게는 꽃밭과 새소리와 밤하늘의 별이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이런 시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마태복음의 팔복을 이해할 수 있으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내용


바울은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는 육신의 차원이며, 다른 하나는 영의 차원입니다. 3절은 이렇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바울은 기독교 전통에서 분명하게 서서 예수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 자체를 높이는 말이 아니라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더 나가서 예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인성을 약화시키려 했던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축출할 정도로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이유는 이럴 때만 복음이 관념에 떨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삶을 담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정작 중요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영의 차원, 즉 예수의 신성에 대한 것입니다. 4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그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이 사실에서만 기독교 신앙이 성립됩니다. 사도신경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습니다. 우선 예수가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앞에서 예수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예수의 역사성을 가리킨다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의 죽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 인간과 동일한 삶의 조건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죽음은 소멸입니다. 모든 관계와의 단절입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소유와 사회적 신분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상태가 죽음이자 소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런 것들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많이 얻는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우리에게서 다 떠나고 맙니다. 완전한 소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합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섬뜩한 기분으로서의 불안’이 그것입니다. 예수에게 일어났던 운명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운명을 각오하지 않으면 결코 복음을 복음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운명을 영혼의 깊이에서 경험할 때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자의 운명을 절실하게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은 그것이 극복되는 것을 유앙겔리온, 즉 기쁜 소식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입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복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세달 시한부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병이 치료될 수 있는 약이 개발되었다는 뉴스를 이 사람이 들었다고 합시다. 1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노벨 문학상에 선정되었다는 소식도 이 사람에게는 별로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약 개발 소식만이 그에게 기쁜 소식, 즉 유앙겔리온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그 어느 것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황제에 관한 소식에만 붙여졌던 복음이라는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더 이상 황제에게는 이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후예들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왜 복음일까요?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데 어떤 조건이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은 ‘복음’이라는 말에 조건을 늘 붙입니다. 로마 황제를 숭배해야만 합니다. 로마법을 지켜야만 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국으로서의 로마를 절대화해야만 합니다. 유대교도 역시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어떤 조건을 제시합니다. 율법이 그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로마 정치와 유대 종교는 각각 로마법과 율법을 절대화함으로써 그 외의 사람들을 배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에는 그런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도 조건이 아니냐, 하고 생각하실 분은 없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 정치와 유대 종교가 요구하는 기준은 눈에 보이는 업적과 능력입니다. 수능점수이고, 기도와 안식일 준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만을 요구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유명 대학의 입시 요강이 수능이나 내신 점수라고 한다면 그건 로마 정치와 유대 종교가 요구하는 기준인 반면에, 대학에 들어와서 전공할 과목에 대한 열정이라고 한다면 그건 기독교 복음이 말하는 기준입니다. 개인의 어떤 업적과 능력이 아니라 그냥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반복적으로 외칩니다. 복음에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만 주어지는 특권도 없습니다. 비선이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복음으로의 소명


복음을 경험한 바울은 로마서 전체 16장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도, 또는 테니스나 다른 스포츠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어도 거기에 매달리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을 경험했으니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5,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내가 은총으로 사도직을 받은 것도 그분을 통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을 믿고 복종할 것을 가르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은 자신의 삶을 복음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삶의 능력입니다. 이런 소명으로 사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사냐고 연민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상의 재미가 엄청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것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으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흔들리지 않는 삶이 최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특별한 방식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출가 수도승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기도와 노동으로 아주 단순하지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어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재가 수도승의 삶입니다. 기도와 노동이라는 형식으로 출가 수도승들이 산다면 우리는 세속의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그 토대는 기도와 노동이어야 합니다. 이걸 오늘 설교 주제로 바꾸면 복음에 천착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주 생생한 삶의 능력으로 바울이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 외에 우리의 인생에서 더 소중한 게 무엇인가요?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7절에서 당시 서신 형식에 따라서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복음에 근거하여 흔들리는 않는 삶에 나타나는 영적 현상이 바로 은혜와 평화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화를 허락합니다. 1) 은혜는 삶을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삶을 자기의 소유로 여깁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걸 확대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를 피곤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듭니다. 2) 평화라는 말도 세상 사람들이 자주 하지만 그걸 삶의 능력으로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자기의 뜻대로 하는 걸 평화라고 여깁니다. 자기의 삶도 훼손시키고 다른 이들의 삶도 훼손시킵니다. 바울은 은혜와 평화가 복음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접한 사람은 더 이상 아쉬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도 바울과 동일한 심정으로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유앙겔리온, 즉 복되고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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