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 성령의 단비 내리던 날

이경민 | 2003.07.24 06:59:5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령의 단비 내리던 날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우리네 농촌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가뭄은 계속되고 있다. 양수기 공급, 지하수 파기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지만 단지 하늘만 원망스럽게 바라볼 뿐 자연의 섭리 앞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렸을 땐 누구나 그랬겠지만 난 유독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아침에 잔뜩 흐린 하늘을 보며 번거롭지만 우산을 챙겨 가지고 나가면 오후는 화창하게 개었고, 괜찮겠지 싶어 그냥 나가는 날엔 비가 내렸다. 머피의 법칙이 꽁무니를 종종 따라다닌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시거나, 좀 늦은 시간이면 아빠의 자가용들이 교문 앞에 줄을 섰다. 난 그런 날이 정말 싫었다. 몸집이 성장해서 작아진 교복은 비에 흠뻑 젖어 몸에 축축이 달라붙었고, 줄줄이 승용차들은 내게 흙탕물을 튀며 지나갔다. 그런 날엔 버스마저 왜 그리 더디 오던지 …. 그때마다 비만 내리면 될 것을, 빗물과 함께 눈에서 뜨거운 것이 왠지 모를 설움까지 씻어내려는 듯 흘러내렸다.
그런 추억, 아니 아픈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 시절도, 젊음과 낭만으로 충만할 대학 시절도 비 오는 날만 되면 우울함에 젖어들어 하루를 기분 나쁘게 보내곤 했다.
복음성가 중에 '맑고 밝은 날'이란 제목의 곡을 참 좋아한다. 그런데 가끔 회중 찬양 인도자가 가사를 '비 오는 날에'로 바꿔서 부르게끔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함께 찬양하던 입술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속으로 다른 기도를 하곤 했다. 비에 대한 나의 반응은 이러했다.
1997년,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을 15일 동안 일본 후쿠오까에서 보내게 되었다. 난생 처음 비행기란 걸 타게 되었고 타국의 땅을 밟아 보는 첫 경험이었다. 일본을 사랑하기 위해 선교여행을 떠난 것이다. 어딘가 낯선 사람들, 언어가 다르고 생활풍습이 다른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으로 생각하는 그 나라 사람들에게 유일신 신앙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리라 ….
너무나 더웠고, 사람들의 반응은 냉랭했지만 선교 팀원 어느 누구도 낙심하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선크림으로 무장하고 무반응의 그들에게 전하고 또 전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똑똑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 비였다. 전에 그렇게 싫어했던 그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린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찬양했다. " ∼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 언제나처럼 내 뺨엔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달랐다. 성령의 단비처럼 내 영혼을 촉촉이 적셔주는 그것이었다. 성령의 위로와 평안이 내 마음 가득 따뜻함을 채워주었다.
요즘, 비가 내리면 그때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기쁨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하나님의 피조물 모두를 사랑하게 하신 그분에게 조용히 기도한다. "이 메마르고 황막한 땅을 성령의 단비로 적셔 주소서."


- 이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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