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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한송이 들꽃처럼 살수만 있다면

北山편지채희동 채희동 목사............... 조회 수 3210 추천 수 0 2002.10.30 23: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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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처/http://www.newsnjoy.co.kr

목회자 단식수련회를 다녀와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성서의 구절 중에 하나는 예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마 13:8)라는 구절이다.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의 삶이 부족하고 궁핍함 없이 차고 넘치게 하시고,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천 배의 놀라운 결실을 얻게 하옵소서.' 도대체 무엇을 차고 넘치게 해달라는 말인가. 무엇을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얻게 해달라는 것인가.

차고 넘치는 신앙?

목회자들은 교인 집에 심방을 가면 차고 넘치는 설교와 차고 넘치는 축복과 차고 넘치는 기도를 해주고, 또 교인들은 차고 넘치는 은총과 차고 넘치는 물질과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음에 기뻐한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신앙관은 '차고 넘치는 신앙'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러한 신앙관이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심성을 지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얻어 초고속 성장을 해왔고, 세계교회를 제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막강한 초대형교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차고 넘치는' 신앙관이 풍요와 안락을 담보로 자연을 정복하고 인류공동체를 파괴해 온 서구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세계관과 그 맥을 같이 한다는 데 있다. 서구 산업문명은 한 국가, 한 개인의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위해서 약소국가와 그 백성의 굶주림과 더 많은 자연의 정복과 착취를 정당화해 주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자본주의에 물들어 자신들의 기도도 편리와 안락과 풍요를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런 세계관과 신앙관이 맞물려 한국의 현대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과연 이러한 한국교회의 성장이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인가. 진정 오늘 우리의 기도는 무엇을 차고 넘치게 해 달라하는 기도인가. 지금 밤새워 드리는 우리의 간구는 과연 무엇을 이루기 위한 간구인가. 마태복음 13장에 말씀하신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복과 풍요를 위한 욕심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는 길바닥 같은 마음으로 무슨 선한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우리는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서 더 좋은 상품과 더 좋은 자동차와 더 좋은 집과 더 좋은 양식을 위해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이 변하는 돌작밭과 같은 삶을 살면서 수십 배의 결실을 바라는가. 진리와 정의, 그리고 구원의 소망 없이 그저 풍선처럼 거짓바람이 가득 들어 있는 가시덤불과 같은 삶을 살면서 무슨 결실을 바라는가. 이러한 위선과 이기와 독선의 문명적 삶을 통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가 얻은 결실은 어쩌면 우리를 죽이고, 교회를 죽이고, 세상을 죽이며, 마침내 주님을 죽게 만드는 독버섯과 같은 열매들일지도 모른다.
  
좋은 밭은 많은 열매를 바라지 않는다. 단지 자기 속에 있는 양분과 물, 그리고 모든 기운을 그 씨앗에게 나누어 줄뿐이다. 좋은 밭이란 자기를 비우고 자기의 것을 내어줄 수 있기에 좋은 밭이다. 더 놀라운 것은 '좋은 밭'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많은 열매를 맺을지라도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양분을 내어 줌으로 맺은 열매는 자기의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의 것이요, 그 열매를 얻기 위해 땀흘린 농부의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것도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고, 남의 것도 내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어쩌면 길바닥 같은 신앙관을 가지고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만을 간구해 왔으며, 지금까지 한국 기독교인들은 돌밭 같은 믿음으로 차고 넘치는 축복을 위해 기도해 오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가시덤불과 같은 목회관을 가지고 죽은 나무에서 먹지 말아야할 많은 열매들을 먹고 기뻐해 오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을 해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우리의 신앙은 이미 차고 넘쳐 값싼 헌옷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총 또한 너무 차고 넘쳐 한 방울의 물보다도 더 흔해 빠졌다고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사랑을 버리고 그래서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린다.
  
이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우리의 비움이 차고 넘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나눔이 차고 넘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사랑이 차고 넘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인내가 차고 넘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하나님! 좋은 밭인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한 물결처럼 잔잔히 당신의 미소로 일렁이게 하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몸 비우기 - 하나님이 주신 자연치유력
  
나는 민족생활의학자이신 장두석 선생을 모시고 30여 목회자 부부와 함께 경기도 마석에 있는 {감리교교육원}에서 <감리교 목회자 단식 수련회>를 한 적이 있다. 채움과 쟁취의 시대, 풍요와 안락의 시대에 자기 몸과 마음을 비우기 위한 모임은 생각보다 많은 목회자들이 참석하지는 못해 '자기 몸 비우기에는 사람들이 마음이 없구나'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의 건강과 몸의 건강을 회복하고 마칠 수 있어서 이 행사를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할 일임을 알았다.

특히 주강사인 장두석 선생과 최민희, 이선재 선생, 그리고 열한 분의 강사들은 하나같이 물질의 시대에서 영성의 시대를 예비하시는 분들이셨고, 우리 보다 앞서서 그 길을 걸어가셨던 분들이라, 그 분들을 통하여 들려주신 살아있는 말씀은 몸을 비우는 우리에게 마음 비움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첫날 월요일 저녁은 현미오곡밥으로 공동식사를 하고, 그 다음날은 오곡가루로 죽을 쒀 먹은 다음 금요일 저녁 다시 죽을 먹을 때까지 물과 소금, 야채효소, 그리고 감잎차만으로 일주일을 지냈다.
  
우리는 나흘동안 밥을 굶으면서 된장찜질, 겨자찜질, 각탕, 그리고 매일 소금물에 관장을 했다. 한번은 관장을 하는 첫날이었다. 우리는 4시간 동안 된장찜질을 하고 모두 관장을 했다. 관장이란 관장기를 이용해서 2리터 정도의 소금물을 항문을 통해 배속에 넣고 약 20분 정도 뒤에 뒷간에 가서 속을 비우는 것이다. 뒷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 온 계동교회 윤상호 전도사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들어와 소리를 지른다.
  
"형님! 너무 너무 기쁘고 속이 시원해요. 이 기쁨을 형님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무엇이 그리 기쁘고 좋으냐?"
"아, 글쎄 4주전에 먹은 포도 씨가 방금 전에 빠져 나왔어요."
  
우리는 모두 크게 웃었다. 사람의 몸 안에는 5Kg - 15Kg의 똥을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몸 안에 썩은 물질이 늘 남아 있는 것이고, 그 똥은 어제, 혹은 몇 일 전에 먹은 음식물의 찌꺼기가 아니라 한 달, 두 달, 혹은 그 이전의 오래 동안 묵은 똥인 것이다. 바로 몇 개월 동안 썩은 똥이 독을 만들고, 가스를 만들고 해서 병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고 잠자리에 다시 들 때에 모두 알몸으로 자연바람을 맞는 '풍욕'과 '냉온욕'을 했다. 풍욕은 창문을 모두 열어 놓고, 밖에서 들어온 신선한 공기로 피부가 호흡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남자들은 커다란 방에서 옷을 모두 벗고 둥그렇게 앉아 풍욕을 했다. 모두 옷을 벗고 알몸에 맑은 바람으로 호흡을 하며 서로 얼굴을 맞대고 운동을 하면서 우리는 어느덧 한 몸이 되는 듯했다. 풍욕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태초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종교적 행위요 예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은 말 그대로 자기 몸 안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없애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였다. 자기 몸을 비우는 것은 생명의 본능이다. 야생동물이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몸이 아프면 먹기 싫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생물체의 본능은 단식이었다. 그러나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만이 이 본능을 잃어 버렸다. 그것은 몸의 언어보다는 머리의 언어 즉 이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많은 지식은 어쩌면 태초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는 일을 해왔는지 모른다. 몸의 소리를 듣지 못한 인간은 많은 질병 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우리가 일주일 동안 몸비우기를 한 것은 곧 우리의 몸이 문명의 때를 벗고 자연에 가까이 가려는 거룩한 행위였다.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본래의 몸으로 가려는 종교적인 행위였다. 자기 몸의 찌꺼기를 없애고 단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사람에게 부어 주신 생명력을 키우려는 생명창조의 행위였다. 더러운 문명에 오염되어 생명력, 창조력을 상실한 우리가 자기 몸을 비움으로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함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 몸비우기를 통하여 몸 안에 잠재되었던 자연치유력을 키우고 그래서 자기 몸을 더욱 생기 가득하게 만든다. 그 자연치유력이 곧 자기 몸의 질병을 물리치는 힘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어느 질병이든지 제 몸 스스로 그 병을 물리칠 수 있는 힘, 즉 '자연치유력'을 주셨다. 어떠한 병이든지 자연치유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그 질병을 물리쳐 건강한 몸으로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보다는 기계에 의존한 삶을 살아가며, 조화와 나눔보다는 정복과 쟁취의 삶을 살아간다. 먹거리는 오염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양을 먹음으로 그 자연치유력은 소멸되었다.
  
단식은 바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 본래의 모습으로 가깝게 가려는 행위이다. 자기 몸을 비우는 것은 바로 몸 안에 있는 찌꺼기를 비울 뿐만 아니라 자기 마음의 찌꺼기를 없애서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의 몸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비움으로 솟아나는 힘을 통해 이 세상을 아름답고 생기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서구의 산업기계문명은 우리 사람들의 자연치유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완전히 그 흔적마저도 소멸시키고 있다.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생활하는 집, 이 모든 왜곡된 생활문화들이 우리 몸 안에 있는 자연치유력을 잠재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의 食.衣.住文化는 바로 자연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生活文化, 생명문화, 살림문화였던 것이다. 자연에서 난 음식을 먹고,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옷을 만들어 입고 집을 지어 살았으며,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일체된 삶을 살았다. 지금 우리는 조상들의 생명문화와 단절하여 서구문화에 질식되어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자기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손과 사람의 기술과 사람의 욕심으로 잉태된 모든 인공품 속에 묻혀 하느님의 형상을 상실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우리는 앞산의 다람쥐보다도, 뒷동산의 부엉이보다도, 개울 속에 노니는 붕어보다도, 언덕 위에 핀 들꽃보다도 못한 존재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 이상을 먹고, 그래서 차고 넘치는 시대에도 여전히 가난한 형제들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또 그 먹을 것을 위해 싸우고 사람을 해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사람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사회는 병들어 간다.
  
야생동물은 질병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동물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 하늘이 준 壽命을 온전히 누리다 자연사하고 만다. 그것은 절대로 過食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동물은 배가 부르면 절대로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몸의 느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생각이나 이성이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몸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이 발달하여 몸의 요청을 무시하고, 몸이 머리에 지배되어 몸의 삶을 거부한다. 몸은 더 이상 먹고 싶지 않는데 사람의 정신은 더 많은 것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과식하여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은 찌꺼기로 뱃속에 남아 독이 되고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야생동물은 사람이 앓는 질병도 없을 뿐만 아니라 癌이라는 병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입으로 먹을 만큼만 먹지만, 사람은 본래 가지고 있는 하나의 입에다 이성이 선물한 두개의 입으로 게걸스럽게 닥치는 데로 먹어 치운다. 그 입도 山처럼 커다란 입으로 말이다. 바로 이 癌이란 질병이 우리 시대의 문명을 대변해 주고 있으며 우리의 몸과 영혼도, 우리의 신앙과 교회도 지금 癌이라는 질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차고 넘치는 신앙, 무엇이든지 닥치는 데로 삼키는 현대교회는 너무 비만하여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능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몸 하나 지탱할 힘조차도 없다. 심각한 성인병에 걸려 자기 정화능력을 상실한 현대교회는 그 안에 속한 성도들의 몸과 영혼까지도 질병에 걸리게 하고 있다.
  
야생동물은 아프면 먹지 않는다. 만병의 원인인 몸 속의 썩은 찌꺼기(숙변)를 빼내지 않고는 몸을 회복시킬 수 없다는 자연법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까이 기르고 있는 개를 보면, 개는 몸이 아프면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 속에 있는 찌꺼기를 빼내기 위해 부엌으로 가서 구정물을 먹은 뒤, 항문을 땅에 대고 먼 산을 바라보며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런 뒤에 썩은 흙이 많은 상추밭에 구덩이를 파고 항문을 들이밀고 앉아 똥을 싼다. 염분이 몸에 들어가면 장운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을 개는 알고 있기에 구정물을 먹는 것이다. 이처럼 개는 아프면 속을 비우고 단식을 하는 것이다.
  
개도 몸이 아프면 자기 몸을 비워 병든 몸을 치유하는데, 사람과 현대교회는 여전히 자기 몸 살찌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울 생각을 못한다. 문제는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데 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자기를 비워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시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행한 처음 일은 단식이다. 주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을 함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온갖 탐욕과 욕망, 그리고 명예와 권력 등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욕심을 극복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일을 할 수 있었다. 주님의 삶이란 온전히 자기를 비우는 삶이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완전히 비움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완성할 수 있었다.
  
온전히 비움의 삶을 사셨던 주님은 오늘날 탐욕과 이기, 과식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단식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하고 계시다. 단식은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파사람들이 하듯이 율법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만들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행위임을 말씀하고 계시다. 즉 자기를 비워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비움으로 새로워진 사람만이 새로운 존재이신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몸 안에 더러운 찌꺼기와 탐욕과 이기로 가득한 사람은 새로운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 송이 들꽃처럼 살 수만 있다면

언덕 위에 핀 한 송이 들꽃은 아무런 욕심 없이 잘 산다. 바람이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내리면 비 내리는 대로 비를 맞으며 서 있다. 더 많은 양분을 먹기 위해 다툼도 경쟁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주신 햇볕 한 줌, 바람 한 점, 그리고 물 한 모금이면 된다.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꽃을 자랑하지도 않으며,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며 하루 밤, 하루 낮을 한 송이 어여쁜 꽃을 피우기 위해 하늘의 은총을 바랄 뿐이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12장 22절 이하에서 한 송이 들꽃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27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말라. 그것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29-30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욕심과 이기에 따라 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 송이 들꽃처럼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의 오만과 욕심을 버리고 한 송이 들꽃처럼 사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마침내 "너희 아버지께서는 하늘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32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인간의 탐욕을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자기의 몸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고, 한 송이 들꽃처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채희동 (2001-11-26 오전 1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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